▶ 내가 믿어주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믿어주라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사실을 믿어주라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우주선을 타고 온 것을 믿기는 힘들지만, 그가 자신의 갈 길을 잃었으며, 집으로 갈 수가 없고, 이곳에 혼자 떨어져 막막하다는 그 사실을 믿어주라는 것이다. 모든 거짓말에는 진실의 씨앗이 들어 있으며, 우리가 접속하고자 하는 진리는 속에 있는 그 씨앗이다. 다 싸잡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절대 들을 수 없는 것이므로 씨앗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히 열어볼 일이다. --- p.68
▶ 서구의 심리학에서는 나와 네가 독립된 존재임을 아는 것이 정신 건강의 척도지만, 공동체적인 다른 많은 사회에서는 ‘개별화의 확립은 자아의 건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의 고립을 의미하거나 부적응 또는 정신이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연구들이 있다. 생태심리학의 선구자인 로작Roszak은 ‘자기’에 관한 집착은 이 사회의 집단적인 정신병이며, 개인을 존재하게 하는 많은 관계--- p.예를 들어서 타인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와 따로 떨어뜨려서는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 p.129
▶ 어쩌면 공감이라는 것에 다양한 형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어쩌면 공감이라는 것에 다양한 형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작은 목소리이지만 자폐적 상태를 ‘독특한 문화’ 또는 ‘소수인의 행동 양식’으로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있다. --- p.130
▶ 내가 정신 병원에서 일하면서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불평은 자신의 병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으면, 병이나 가난이나 살 집이 없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외로움이라고 했다. 치료를 더 잘 받았으면, 더 좋은 약물이나 더 좋은 의사를 만났으면 하는 게 아니고, 애인이 있었으면, 가족이 있었으면, 친구가 있었으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또 그 한 명이 하루라도 문병을 왔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환자이기 전에, 정신병자이기 훨씬 전에 나와 같이 외로워하는 인간이다. 공감하고 공감 받고 싶어 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 p.136
▶ 나도 이 아이들의 과거를 기록한 차트를 보다 보면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읽기가 힘들었다. 그 아이들의 짧은 삶의 기록은 학대와 폭력과 강간과 버림받은 이야기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여기 어떻게 오게 됐니?'라는 질문에 입을 꼭 닫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내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 아이들의 삶을 보면,‘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고 문제가 있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나?’가 아니라,‘이 아이들이 인간으로서 당해서는 안 될 일들을 그렇게 당하고도 어떻게 삶의 희망을 가지고 있을까?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배반당하고도 어떻게 아직도 사랑을 갈망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 p.154
▶ 폭력 안에 깃든 두려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두려움은 폭력의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곳에서 터득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질러대는 욕이나 휘두르는 주먹에 동요한다면 내 안에 있는 두려움과 자기 보호 본능이 발동하여 나도 함께 욕을 내뱉거나 주먹을 쓸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다면 내가 분명 그들에게 맞을 거다. 그래서 나는 맞지 않고 직장을 다니기 위해서라도 폭력 앞에서 두려움이 없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내 스스로의 폭력성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내 내면에 있을 수 있는 폭력성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을 타인에게 투사할 수도 있고, 부정하다 보면 어느 날 이상한 데서 이상하게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160
▶ 상대방이 내 편인지 아니면 적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인 것 같다. “나는 네 편이야”라고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만나지만, 아이들이 정작 그 말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여러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받고 자라온 아이들은 이 동물적인 본능이 더 많이 살아있다. 그러다 보니 이들과의 처음 만남은 기쁘고 설레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이뤄지는 일종의 의식이고 시험이다. “너는 내 편이니? 내가 너를 이렇게 나쁘게 대해도 내 편이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편이니?” 하고 묻는다. 물론 말로 묻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인 표현 방식으로 묻는다. 미운 짓, 버림받을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으로 이 애들이 말하는 것은 “이래도 나를 끝까지 안 버릴 거야? 그럴 수 있어?” 하는 것과 “이래도 나를 버리지 말아줘”라고 하는 두 가지일 것이다.” --- p.160
▶ 그런데 이쯤이면 짐을 싸고 도망을 가던 내가 오늘은 버티고 있으니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를 어떻게 할 기세다. 한 놈이 얼굴을 내 앞에 바싹 대고는 “어떡할 거야, 때리고 싶어? 욕해 보지?” 하면서 빈정거린다. 처음에는 이 애들 이러는 게 그렇게 무섭더니 이제 나도 좀 겪어봤다고, 싸울 수도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마음이 조용해진다. 째려보는 이 아이의 눈을 보다가 뜬금없는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 눈으로 하는 게임 하나 할래?” 이 질문에 인상 짓고 있던 아이의 표정이 확 바뀐다. “그게 뭔데?” 하고 궁금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런 놀이를 미국에서도 하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하고 자주 했던 눈싸움 놀이를 설명한다. 서로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먼저 웃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고. 째려보는 게 특기이니 뚫어지게 노려보는 게 너무나 쉬울 것 같은 이 아이들과 승산이 있을까 싶었는데, 눈싸움 놀이를 시작하자마자 이놈들 몇 초를 못 견디고 웃느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나랑 눈만 닿으면 웃겨죽겠다며 자지러진다. 그런데 웃음소리가 다르다. 비웃고 작당 모의하고 기분 나쁘게 웃어대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까르륵까르륵 넘어가는 애들 웃음소리다. 어라? 재밌어하네? --- p.167
▶ 칭찬은 양날의 칼이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도 한다지만, 과도한 칭찬은 “나는 당연히 이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대책 없는 칭찬은 아무런 힘이 없으며, 진정성 없는 칭찬은 울림이 없다. 칭찬을 잘하고 싶다면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다 좋다” 또는 “모든 것이 훌륭하다”는 식의 칭찬은 피드백으로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정성이 없다. 그 프로젝트에서, 그 발표에서, 그 옷차림에서 뭐가 멋졌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되는 칭찬이다. 칭찬은 선택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칭찬거리를 찾을 수 있다. 아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면 그 상황이 괴로울 수 있겠지만, 칭찬을 해주기로 선택을 했다면 목청의 시원시원함을 칭찬해 줄 수 있다. --- p.209
▶ 내가 하는 일에서 희망이라는 것은 이렇게 ‘순간’이라는 단위로 세어진다. 사람들은 내게 “미술 치료, 그거, 치료가 되는 거요?”라고 묻고는 한다. 미술 치료의 미술이나 예술 치료의 예술은 만들어지는 물질적인 결과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만들고 찾아내는 창조의 작업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예술적인 감성으로 하는 치료, 그거, 된다. 그러나 치료라는 것이 병에 걸렸다가 나아지는 그런 의미의 치료는 아닌 것 같다. 한 번에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다. 1년 단위나 일주일 단위도 아니고, 하루 단위로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런 순간들이 있을 뿐이며 치료의 효과도 한 순간의 단위로 계산된다. 하지만 그런 짧은 순간들이 모여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혼이 가득한soulful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모일 때 샬린에게도 치유의 날이 오지 않을까? --- p.225
▶ 미술 치료는 깊은 탐구의 과정을 거친다. 문제의 핵이 드러날 때까지 탐구하고 자신의 문제를 작품으로 투사하고, 그 표현된 것과 대화하고, 표현하면서 문제의 덩어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로 삶의 터를 옮겨 숲이 있는 마을에 살고 숲으로 치료실을 옮기면서 이러한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중해서 문제의 핵을 찾는 대신 부는 바람에, 맑은 새소리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자꾸 정신이 팔렸다. 아픔과 고통에 집중해야 하는데 날씨가 마음을 오락가락하게 했다. 해가 쨍하고 날씨가 좋으면 내담자는 앞으로의 희망과 자신을 토닥이는 이야기들을 주로 했고, 비바람이 불면 내면의 움직임이 심해져서 자신의 답답함을 발견했다. 비가 오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말수가 적어지는 대신 자신의 마음과 고통을 담는 작품을 만드는 창작 과정에 더 몰입하고 결과물에 깊이가 생겼다. 유난히 맑은 새소리가 들리면 하던 이야기와 움직이는 손을 멈추고는 한다. --- p.253
▶ 실내에서 미술 치료를 할 때는 치료사가 내담자의 말과 표정과 작업에 집중하고 공감을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치료가 끝나고 난 후에는 피곤해지기 예사였다. 그런데 숲에서는 생각이 멈추는 여백의 빈 시간들이 많아 치료 후에도 피로하지 않았다. 숲에서 상을 펴놓고 작품을 만들고 있으니 동네 사람이 와서 뭐하는가 묻고, 지나는 사람과 인사도 하게 되고, 그러다 새가 울면 대화가 멈추고, 바람이 불면 마음에도 바람이 불었다. 문제에 집중을 하기보다 문제 밖으로, 우리 밖으로 의식이 확장되었으며, 자연 속에서는 내가 치료사고 내가 상대방을 고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도 그도 함께 자연의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 p.253
▶ 미술 치료는 삶에서 문제되는 것이나 어려운 부분을 힘들더라도 마주하고 고쳐가는 의식적인 창조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떨 때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튼튼한 그릇 안에 일단 담아놓고, 삶의 문제나 고통의 원인보다는 삶이 주는 기쁨을 먼저 찾아나서는 일도 필요하다. 기쁨을 찾아 나아가는 발걸음은 비록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에도, 우리로 하여금 행복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어쩌면 우리에게 행복은 권리도 의무도 아닌 다른 무엇일 것 같다. 바로 우리가 탐험가로 살기로 마음먹을 때 비로소 나타나 우리를 손짓하는 무엇 말이다. --- p.291
▶ 힘을 내는 오랜 과정에서 내 안에 본래부터 있던 생명에 대한 경외심, 사랑, 감사, 그런 것들과 만났다. 상처의 치유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이미 길을 알고 있었던 듯, 올 곳에 도착한 듯, 가야 할 길을 나서는 듯했다. 나에게 상담 받은 그녀처럼, 나도 집 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았고, 그것이 내 꿈이 되었다.
--- p.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