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그 후로도 가끔 그녀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 학기보다 더 친해진 적은 없었습니다. 오늘 처음 남에게 솔직히 이야기해봅니다만, 사실 저는 그 학기에서 1년쯤이 지나자 일부러 그녀를 좀 피해서 다니기도 했습니다. 혹시 그녀가 다른 남학생과 그 사이에 사귀어 지내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 정말 괴로워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멍청함 때문에 저는 그렇게 피해 다니면서도 오히려 그녀가 다른 남학생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은 신속히 잘 알게 되었고, 예상한 만큼 의미도 없는 마음의 괴로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느라 고민도 하고, 다른 다툴 일도 생기고, 갑자기 큰돈을 구해야 할 당황스러운 일도 문득 생기고, 그렇게 저렇게 시간이 지나가다 보니, 또 그냥저냥 시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하기야, 그녀와 내가 무슨 대단한 운명의 사랑으로 보이는 관계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같이 다니면서 또 많은 추억을 만들고 잊히지 않는 경험을 나누고 뭐 그랬던 것도 아니지 않았겠습니까.
나중에 제가 뉴질랜드에서 만난 한 돈세탁업자가 그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다 나이 들면 들수록 재미없고 흐지부지되는 겁니다.”
그녀에 대해서 제가 생각한 것도 그냥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그래, 수고했고. 이거 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법인 카드로 저녁때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일단 이 내용을 한번 소장님께 올려 보고, 이거 누구 연구 결과로 학회에서 발표할지는 투자심의회에서 결정돼서 나올 거야. 직접 연구한 사람이 자기 이름 달고 발표할 수 있으면 제일 좋기는 한데… 이게 회사 사람들 승진 문제도 있고, 또 외부 투자 받으려면 소장하고 임원들 연구 결과가 계속 꾸준히 발표되어야 요건을 만족하는 게 있으니까 그분들 이름으로 발표가 나가야 하는 거거든.”
저는 그 정도야 알고 있다면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렸습니다. (중략)
“사실 그것 때문에 어느 정도 이득을 본 게 있는 것도 사실은 사실입니다. 우리 회사가 디지털 카메라 센서 연구를 하는데, 이 센서가 군사용 정찰 카메라나 유도 카메라, 야시경에도 사용이 되어서 군수품으로 분류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니까, 우리 회사가 개성 공단에 세운 공장이 군사, 무기 분야에서도 남북이 협력하는 사례로 부풀려져서 언급이 되고, 이쪽 분야에서 주목을 받는 일이 엄청 많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실 여기저기서 투자랑 지원금도 많이 당겼고요.”
팀장이 다시 끼어들어 말했습니다.
“애초에 억지로 개성 공단에 공장을 만든 것도, 딱 그런 광고 효과를 노리고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에게 눈길을 끌려고 그런 거 아냐.” ?본문 중에서
그 마지막 한 장만은 그게 굳이 마지막에 눈에 뜨여서 그런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확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 한 장을 보고 있던 아주 짧은 동안에 그 내용을 똑똑히 읽고 기억하려고 애썼습니다. 바랜 종이, 오른쪽 아래에 무엇인가 얼룩이 졌는지 습기가 찼는지 약간 색깔이 다른 부분,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약간 비뚤게 기울어져 있는 배치, 처음 막 갈아 놓은 진한 먹으로 똑똑히 써놓은 글자들, 먹이 말라갈 때 물을 묻혀 조금 희미하게 그려진 그림들. 그 내용들은 지금도 똑똑히 외고 있습니다.
제가 보고 기억한 그 『봉이비결』, 단 한 장의 제목은 닳고 해져서 ‘언제나… 이겨서 돈을 버는 법’이라고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분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아래 내용의 뜻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 내용을 다시 떠올려서 하나하나 옮겨 놓을 때 닳은 제목 부분이 원래 뭐라고 되어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쪽에 나와 있었던 것은 바로 ‘언제나 노름에 이겨서 돈을 버는 법’이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이렇게 지내다 보니, 벌 수 있는 돈은 더 적게 보였습니다. 한번은 잠깐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인천공항에 들어오다가, 문득 이렇게 살며 지내도 정작 손에 쥐는 현금은 예전에 직장 생활을 할 때에 비해 별로 많지도 않다는 계산을 얻었을 때 실망도 크게 했습니다. 몇 분 동안이기는 했지만,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 싶어서 인천공항의 대기 의자에 앉아 그냥 멍하니 망연히 있었습니다. 커다란 청사 안을 바쁘게 지나다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갖고 있을 일과 계획들을 생각하니,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따져 보자면, 저는 호텔에서 생활하고 매일같이 이 나라 저 나라를 건너 다니고 여행을 하면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비용을 제하고 나서도 남는 수입이 예전과 같다면 이것은 그렇게 문제가 있는 금액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만큼 제가 정착해서 사는 데 드는 방세나, 자동차 유지비를 따로 쓰고 있지도 않았고, 정확한 직장과 사는 곳 없이 지내다 보니, 경조사비나 아는 사람 만나 술 한잔하며 쓰는 돈도 없었습니다. 꼼꼼히 따져보면 따져 볼수록, 저축액에서부터 삶의 질까지,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예전보다 확실히 생활이 윤택해진 것이었습니다. (중략)
이 수법을 얻고 이렇게 사는 세상으로 넘어오면서 저는 제가 세상을 보는 방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밥 한 끼, 차 한 잔을 사 마실 때 그 가격을 보고 받는 느낌에서부터, 매월 통장에 쌓인 잔액을 보고 받는 느낌까지 모든 생각의 바탕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저는 나중에 알게 된 돈세탁업자에게 이런 사업을 한번 해 보라면서, 실업자들에게 실업 기간 동안 적당한 병이 있어서 쉬고 있었다는 핑계를 만들어 주는 서비스를 팔아 보라는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돈세탁업자는 아는 병원 관리업자에게 그 이야기를 해서 정말로 그 서비스를 합법적인 사업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증세와 의학적으로 말이 되는 이유를 의견으로 제시하여 실업기간이 오히려 취업 기회를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끊을 길을 보여 주는, 사회에 큰 도움을 준다는 사명감으로 일을 진행했던 것입니다.
얼마 후에 이 사업을 시작한 회사는 ‘실업자로 있었던 기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보이게 돈은 안 주지만 직함은 걸어 놓고 고용된 것처럼, 또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꾸며 주는 사업’이란 것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