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의 수수께끼에 대한 스피노자의 해답은 '실존하는 모든 사물들은 철저한 상호의존 속에서 필연적으로 실존한다'로 간단 명료하게 표현 될 수 있다. 여기에 기반하는 형이상학은 인간의 자기이해와 연관하여 얼마간 혼란을 초래한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성(mentality)은 인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럼에도 삼라만상은 관념으로도 물리적 대상으로도 표현되리 수 있고, 관념과 연장을 가진 사물들간의 관계는, 스피노자의 속성 이론에 따르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더 쉽다.
더구나 스피노자의 일원론은 인격에 대한 매우 역설적인 관념을 만들어낸다. 개별적 인격은 결코 개별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는 인격의 동일성, 고립성 그리고 자기충족성을 부인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바위와 돌과 나무보다 더 중요할 것이 없는 듯이 보인다.
결국 모든 것이 필연성에 따라 일어난다는 단정은 도덕성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스피노자에게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불명료하다. 왜냐하면 그 '나'-신의 가변적 양태로서 개별성도 자족성도 갖지 못하는-가 무엇인지 문제되는 듯이 보이고, 그러한 '내'가 실제로 어떤 것을 행한다는 암시도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이 '나'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갖지 않는다.
---pp.79-80
스피노자는 신을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되어 있는 실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신의 실존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떠한 '원인이나 이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신의 본성 속에 있기 때문에 신이 방해받지 않는다면 실존해야만 한다. 그러나 신은 방해받을 수가 없다.
스피노자 알아챘듯이, 어떤 실체에 대해서도 그와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체는 그 자신 안(그의 관념 속)에 자신의 질존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실체란 존재론적 논증에 의해 그것의 존재가 밝혀진 것들이다. 자신의 실존을 '외적인 원인'에 의지하는 것은 당연히 실체가 아니라 양태이다. 더구나 실체는 언제나 '그 자신의 성질에서 무한하다.' 즉 자신과 동일한 본성을 갖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는다(왜냐하면 제한받는다는 것은 '외적 원인'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무한하게 실존한다.
--- p.65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책은 전(前)과학적 세계관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탈주술의 길을 계속 걸어나가는 것이다. 낡은 주술과 새로운 주술을 모두 버림으로써 우리는 마침내 진리 자체에서 의미를 발견한다. 세계를 탈주술화하는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 속에서 신을 인정하고, 신의 작품들을 발견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신의 작품들을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주술에 걸린다.
--- p.153
...모든 정열의 핵심에 놓여 있는 '정신적 활동'은 더 크거나 작은 완전성, 실재성, 힘 등을 표현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암시하듯이 완전성, 실재성 그리고 힘은 동일하다. 그리고 정신적 측면에서 이것은 관념의 '적확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감정은 그 속에 포함한 관념의 '적확함'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된다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과정의 무력한 제물로 있는 정열의 극단에서부터 사물의 진리에 대한 청명한 관조를 통해 마음이 자신의 완전성과 힘을 선언하는 정신적 활동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 p.116
...모든 정열의 핵심에 놓여 있는 '정신적 활동'은 더 크거나 작은 완전성, 실재성, 힘 등을 표현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암시하듯이 완전성, 실재성 그리고 힘은 동일하다. 그리고 정신적 측면에서 이것은 관념의 '적확성'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감정은 그 속에 포함한 관념의 '적확함'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열된다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과정의 무력한 제물로 있는 정열의 극단에서부터 사물의 진리에 대한 청명한 관조를 통해 마음이 자신의 완전성과 힘을 선언하는 정신적 활동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