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념적 변화가 생겼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단지 나에게 변한 것이 있다면 북한 동포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눈이 달라졌다는 사실뿐이다. --- p.35 중에서
내가 평양에 갈 때마다 북한 동포들에게 남한 제품들을 전해주고 싶어 했던 이유는, 최고 품질의 남한 제품을 북한 동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저 북한 동포들에게 남녘 동포 노동자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물건을 전해주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 p.44 중에서
저만치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이 테이블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노는 모습이 보인다. 어서 떠나자는 영길 아우의 재촉을 물리치고 그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잡은 매미를 가지고 놀고 있다. 아이들이 수줍음을 많이 타 말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이름을 물어보니 겨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늘은 여기서 이 아이들과 함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매미나 잡으면서 놀다가 그냥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다. --- p.73 중에서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자본주의의 퇴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도덕에 어긋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여자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봉건시대의 낡은 유습이다. 단지 의문이 가는 것은 여성해방운동에 일찍이 눈을
떴다는 북한에 어떻게 오늘날까지 남존여비의 유교 전통이 이토록 뿌리 깊게 박여 있는가 하는 점이다. --- p.93 중에서
내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남쪽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증오하고 살아온 내게 ‘혁명의 수도’라는 평양의 한복판에 수양딸이 있고, 그의 집을 찾아와 지금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인간의 정과 사랑보다 더 강력하고 위대한 것은 없다. --- p.120 중에서
비행기 안에서 나는 천지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다시 한 번 눈을 감는다. 이제 백두산은 애국가의 가사에서나 나오는, 막연한 상상 속의 산이 아닌, 실제 존재하는 산으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모습은 가슴속 깊이 새겨진다. --- p.172 중에서
이내 눈물이 흐른다. 2011년 10월의 첫 북한 여행 후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이제는 눈물이 그칠 때도 되었으련만, 그럼에도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북한 여행은 아무리 자주 한다 해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이유가 끊이질 않고 나타난다. 감동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갈라진 조국
이 억울해서 울고. --- p.174 중에서
한 여성 새터민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 이 강을 건너면 후에 다시 돌아와 어떻게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으며 조국은 또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회상한다. 강을 건너기 전 뒤를 돌아보고 울고 또 울었다는 그녀는 북한을 떠날 당시 십대 후반의 어린 소녀였단다. 세상에 이런 효녀가 없고, 애국자가 따로 없다. 아마도 나였으면 밥을 굶긴 부모를 원망하고 나를 방치해둔 조국에 조금의 미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강을 건넜을지 모른다.
내가 북한에서 만난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렇게 순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나라를 사랑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답하곤 한다. --- p.180 중에서
우리의 전통이 북한에도 남아있고, 사람들은 그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얽혀 있다. 씨족사회의 전통이 남과 북에 여전히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남’이 될 수 없다. --- p.193 중에서
어디서 왔느냐고 하면 이제는 거리낌 없이 “미국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처음 북한에 왔을 때는 꺼렸던 대답이다. 미국이라면 사람까지도, 나아가 동포라 할지라도 증오할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야! 멀리서도 오셨네요. 미국에도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나요?”
“네, 로스앤젤레스라는 도시에는 ‘아바이 순대’라는 함경도 음식점까지 있을 정도예요.”
미국에도 순대집이 있다는 말에 함경도 북한 동포들이 감동을 한다. 우리 민족음식 ‘순대’라는 말 한마디가 서로의 마음을 순식간에 연결할 줄이야! 한 사람이 상기된 목소리로 제안을 한다.
“야, 우리 모두 나가서 허리 잡고 순대처럼 길게 늘어져서 춤 한 번 추자무나.” --- p.207 중에서
“남녘의 동포 여러분, 그리고 저를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계순희입니다. 조국이 분단된 지 60년이나 흘렀습니다. 통일이 되어 함께 살아갈 날을 기다립니다. 그때가 오면 저 또한 통일 조국의 선수단을 이끌고 조국을 드높이 모시는 가슴 벅찬 일을 할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동포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 p.247 중에서
아,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통일 조국의 부산을 출발한 기차가 서울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를 통과해 중국 대륙으로 들어간다. 이 기차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모스크바로, 베를린으로, 로마로, 파리로, 마드리드로 유럽을 헤집고 다닌다. 통일 전이라도 철길만 연결된다면 남한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조국의 기차역 전광판에는 세계지도와 함께 전 세계의 지명이 꽉 차 있을 것이다.
--- p.323~324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