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차에 함유된 카페인은 인간 두뇌의 활동과 성취를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켰다. 독일계 유대인 역사학자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은 커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커피가 발견되기 전에는 극소수 천재들에게나 가능했던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게 됐다면서 “한 잔의 커피는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찬양했다. ---p. 7
커피, 설탕, 차의 생산은 주로 아프리카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노예제의 광범위한 도입을 초래하여 전 세계 인종구성을 바꾸어 놓았다. 특히 설탕은 근대적 공장체제를 갖추어야 대량생산이 가능했으므로 산업구조의 변화를 야기했다. 이 세 가지 상품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커피, 설탕, 차의 교역에 따른 자본축적은 인류의 생활양태를 근본적으로 바꾼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p. 10
1780년대에 생도맹그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와 커피의 60%를 생산했다. 이는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설탕과 커피 생산량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었다. 18세기 프랑스의 번영은 생도맹그, 마르티니크 등 카리브 해의 식민지에서 생산된 설탕과 커피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p. 38
1555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알레포 출신의 하캄(Hakam)과 다마스쿠스 출신의 샴스(Shams)가 각각 카흐베하네(kahvehane: 커피의 집, kahve는 커피, hane는 집이란 뜻이다)를 열었다. 커피가 급속히 보급됨에 따라 카이로는 경제적 위상이 더욱 올라갔다. 카이로의 상인 계층은 유럽이 신항로를 개척함에 따라 자신들이 입게 된 손실을 커피라는 신상품에서 나오는 이익으로 메우고자 했다. ---p. 73
에드워드 로이드가 설립한 로이즈 보험회사는 그가 운영하던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다. 그의 커피하우스에서 고객들이 해상보험을 들곤 했다. 1728년부터 1년간 영국에 머물렀던 프랑스 소설가 프레보(Antoine Francois Prevost, 1697~1763)는 런던의 커피하우스에 대해 “모든 친정부, 반정부 신문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며 “영국의 자유가 있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 1672~1729)은 사람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1709년 〈태틀러(Tatler)〉라는 매체를 창간했다. ---pp. 88~89
1600년 창립된 영국 동인도회사는 250년간 중국 차 수입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1833년 영국 정부의 무역자유화 조치로 그 특권을 잃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상사(商社)와 중개인, 소매상이 차 무역을 시작하여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동인도회사가 차 무역을 독점하던 시절에는 경쟁이 없었으므로 운송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무역 시대가 도래하자 청에서 영국 본토까지 얼마나 빨리 차를 운송하느냐가 경쟁의 관권이 됐다. 신선한 햇차가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차를 빨리 운반하기 위한 티 레이스(Tea race)가 시작됐다. ---p. 147
아이티의 자작농이나 해방노예에게는 설탕 플랜테이션을 세울 자본이 없었다. 그들은 대신 적은 자본으로도 가능한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커피를 찾는 고객은 처음에는 파리의 유행을 좇는 아이티의 상류층이었다. 커피 농사가 이윤이 많이 나자 생산량이 대폭 늘어 아이티 안의 수요량을 능가하게 됐다. 과잉생산으로 고민에 빠진 아이티의 커피 재배업자들을 구원한 것은 미국 무역상이었다. 이후 아이티는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갔다. 아이티는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p. 201
1760년대에 스페인이 쿠바의 항구를 개방하자 쿠바에서 설탕 붐이 일어났다. 쿠바는 기후와 풍토가 사탕수수 생산에 최적인 곳이었다. 설탕 붐이 일어나자 많은 스페인 본토인들이 쿠바로 이주했다. 또한 1790년대에 아이티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수천 명의 프랑스인들이 아이티에서 쿠바로 이주하여 동부지역에서 커피를 재배하고 제당공장을 세웠다. 19세기에 들어 노예노동의 확대와 기술개발로 쿠바의 설탕 생산량은 세계 1위가 됐다. 노예노동 못지않게 근대적 제당기술도 설탕 생산을 증대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p. 217
고종이 자신의 커피 애호 때문에 독살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과 어머니 민씨의 상중인 1898년 9월 11일 자신의 생일을 맞았다. 이날 고종은 생일축하연을 열지 못하게 하는 대신 원로대신 3명만을 경운궁으로 불러 조촐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가 끝나고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가 나왔다. 그런데 커피를 마신 황태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고종은 커피를 마시다 토하고는 냄새가 좋지 않다며 더 이상 마시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커피에는 대량의 아편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김홍륙 독다(毒茶)사건’이다. ---p. 236
다방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다. 폐병에 시달리던 이상은 황해도 배천 온천에 요양하러 갔다가 거기서 금홍(錦紅)이라는 이름의 기생을 만나 서로 연인 사이가 됐다. 이상은 1933년 7월에 그녀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종로 1가에서 다방 ‘제비’를 개업했다. 그러나 이상은 제비를 사업으로 경영하기보다 주로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장소로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장사가 수지가 안 맞아 폐업하게 됐다. 그 뒤에 이상은 인사동의 다방 ‘쓰루(鶴)’를 인수했으나, 이것도 얼마 뒤에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이상은 1937년에 지병인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