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이라 신부는 기독교 전래기의 일본이들이 받아들인 신은 실은 서구인들이 믿는 그런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일본식으로 굴절시켜 받아들인 신이었다고 토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 민족은 인간과 아주 동떨어진 신을 생각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오. 이 민족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생각할 힘도 갖고 있지 않소.... 이 민족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장시킨 어떤 것을 신이라 부르오. 다시 말해서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신이라 부르오."
결국 일본에는 아무리 해도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신도적인 어떤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는 엔도 슈사쿠가소설적 인물을 통해 기독교의 일본적수용 양태를 진단한 말이자, 일본인들이 서구 기독교 세계를 비롯한 타자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일본적 특수성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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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는 정치적 통합을 위해 조작된 이데올로기 측면을 내포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거기서 몸적인 것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신화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이 장에서 바로 이런 몸적인 상상력을 중심으로 일본 신화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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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보들레르는 인간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권태를 '악의 꽃'이라고 노래했는데, 신도 또한 무엇보다 생명력의 고갈을 악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싶다. 생명력이 고갈된 상태인 케가레는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악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라이'라는 정화의례를 통해 정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마쓰리를 거행하기에 앞서 먼저신사에서 케가레를 씻어내어 정화시키는 의례가 행해진다.
하라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악과 흉(凶)을 씻어내는 정화의례이고 다른 하나는 선과 길(吉)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다. 이 두 가지 하라이는 통상 동시에 행해진다. 이처럼 선과 악 모두에 관련된 하라이의 정화의식이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레의 축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축제이며 생명력의 누림을 뜻한다. 거기에는 본래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은 더럽혀진 것일 뿐이며, 그것은 씻어내기만 하면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본래의 생명력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다.
과연 고대 일본인들은 절대적인 악이나 흉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앞서 살펴본 일본 신화에 의하면 이자나기가 황천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이자나미는 날마다 지상의 인간을 천 명씩 죽이겠다고 저주했다. 이에 대해 이자나기는 날마다 천오백 명을 태어나게 하겠노라고 응수한다. 이 신도신화에는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옵티미즘과 페시미즘, 선과 악의 미묘한 뒤엉킴에 대한 고대 일본인들의 태도가 안개꽃처럼 묻어나 있다. 만일 고대 일본인들이 죽음을 절대적인 악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런 신화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은 절대적인 악이 아니라 다만 생명력의 일부일 따름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신도에서의 악이란 생명력의 쇠퇴, 즉 탁해진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
요컨대 신도에서의 선악 관념은 반드시 도덕적 가치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신도의 가미는 서구의 윤리적 유일신관의 전제인 '절대적으로 선한 신'과는 달리, 도덕적인 선악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로 여겨진다. 일본을 대표하는 탁월한 사상가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고사기전>에서 신도의 '가미'를 '고전에 나오는 천지의 제신들을 비롯하여, 그 신들을 모시는 신사의 어령(御靈), 인간, 조류, 짐승, 초목, 바다, 산 등 범상치 않으며 은덕 있고 두려운 모든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가미에는 이렇게 여러 종류가 있다. 가령 귀한 가미, 천한 가미, 강한 가미, 약한 가미, 좋은 가미, 나쁜 가미 등이 있으며, 그 마음도 행함도 여러가지라서 어떤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다"고 정의 내리고 있다. 이는 통상 일본인의 신관념을 가장 전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모든 것이 신이 될 수 있다. 그 신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할 만큼 힘 있는 존재이기만 하면 되며 반드시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도덕과는 무관한 선악에 대한 태도를 '선악의 피안'이라고 상정했다. 이 말은 니체의 용어이다. 니체가 이 말을 쓴 것은 선뿐만 아니라 악 또한 삶의 필요충분 조건이라고 보는 입장에서였다.
--- pp 54~56
도쿄 시내 중심부의 치요다(千代田)구 구단에 이는 야스쿠니 신사에는 과거 군국주의 시대에 천황을 위해 전쟁터에서 죽은 250여 만 전사자들이 신으로 모셔져 있다. 이 야스쿠니 신사는 패전 후 미군정에 의해 다른 신사들과 마찬가지로 민간 종교 법인으로 전화되었으나, 일본의 우익 집단 및 수상과 각료들에 의해 공식 참배 또는 국영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것이 바로 '야스쿠니 문제'라는 것이다. 이른바 '망언'이란 주로 이 야스쿠니 문제를 둘러싸고 나온 것이 많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일본 국민들의 태도다.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대부분 '평화헌법'을 지지하며 전쟁을 반대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범이 신으로 모셔져 있는 이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왜 그럴까? 그런 심정적 동조의 배후에 깔려 있는 것이 바로 원령 신앙이라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일본인들은 전쟁터에서 비정상적으로 죽은 자의 원령은 위무해주어야 하고, 그게 바로 야스쿠니 신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원통하게 죽어간 자는 원령이 되어 산 자를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그네들의 믿음이다. 이렇게 보면 야스쿠니 문제에는 단순히 정치적인 관점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pp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