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정의로운 가족’을 꿈꿔보셨습니까? 가훈 중에 ‘화목한 가족’은 많은데 ‘정의로운 가족’은 잘 없지 않나요? 어떤 가정을 꾸리고 싶은지 물었을 때, 정의로운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대답은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정의로운 가족은 꿈꾸지 않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족과 사회의 차이점이 뭘까요? 카를 마르크스는 재화를 필요에 따라 분배하자고 했습니다. 필요한 사람이 재화를 갖는 것이 정의롭다는 거죠. 그런데 이게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족입니다.
아빠, 엄마, 큰아들, 작은아들, 막내딸로 구성된 가족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막내딸이 아파요. 그럼 누가 약을 먹습니까? 능력 있는 사람이 먹습니까, 필요한 사람이 먹습니까? 필요한 사람, 막내딸이 아프니까 막내딸이 먹죠. 이게 가족입니다. 가족은 정의를 꿈꾸지 않습니다. 다섯 명 중에서 누가 나가서 일을 합니까? 아빠죠. 아빠가 능력이 있으니까 일을 하는 겁니다. 가족이라는 건 이미 철저하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이미 정의가 필요 없는 곳입니다. 정의라는 담론이 주제가 될 수 없는 공간입니다.
이처럼 가족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정의가 실현되는 이성적인 사회라는 것은, 어쩌면 더 이상 정의라는 담론이 필요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가족이 아니면 쉽지 않죠.---「프롤로그」중에서
공리주의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쉽지 않은 겁니다. 더 생각해보면 복지국가론도 나올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먼저 유명한 경제학 이론을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저한테 연예인 뺨칠 정도로 예쁜 여자친구가 있다고 해봅시다. 제가 처음 여자친구랑 키스할 때는 어떤 기분일까요? 너무 행복해서 아마 심장마비로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키스할 때는 어때요? 처음보다는 설레는 마음이 덜하겠죠? 세 번째 할 때는 더 그렇고, 네 번째는 ‘어? 침 냄새 나네? 이 안 닦고 왔구나?’ 이렇게 될 겁니다. 이게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입니다.
그럼 다시 보세요. 철수, 영호, 민수가 있습니다. 철수는 5만 원 있고, 영호는 10만 원, 민수는 1억 원이 있습니다. 5만 원을 누구한테 주어야 할까요? 누구에게 주어야 사회적 쾌락의 총합이 가장 많겠습니까? 철수한테 주면 100퍼센트 증진하고, 영호한테 주면 50퍼센트 증진하고, 민수한테 주면 티도 안 납니다. 이게 복지국가론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벤담입니다. 얼마나 멋진 사고방식입니까? 사실 어떤 사상가에 대해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를 평가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공리주의자라고 하면 요즘은 보수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은데, 저는 쉽게 단정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공리주의란 무엇인가」중에서
아무튼 우리는 칸트를 다 알지만 칸트 철학이라고 하면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 칸트에 대한 논문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용어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정언명령입니다. 정언명령의 반대말은 가언명령입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매우 간단합니다. 정언명령은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가 없는 명령이고, 가언명령은 목적이나 의도를 가진 명령입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사례금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잽싸게 구해줬습니다. 그럼 무슨 명령이죠? 가언명령이죠. 왜 가언명령입니까? 뭐가 존재합니까? 돈을 받겠다는 목적이나 의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자 의무라 여기고 구했습니다. 이건 정언명령이죠. 이게 전부입니다. 그럼 칸트는 어떤 게 더 정의롭고 더 선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까? 정언명령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정말 간단합니다. 모든 행동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라는 겁니다. 가언명령을 행하지 말고. 간단하죠? 물론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칸트 ,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중에서
대한민국 모든 사람이 버스를 탈 수 있지만 휠체어 타는 장애우들은 버스 계단을 어떻게 오릅니까? 누구나 삼성전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남자 사원이 더 많지 않습니까? 기회가 배제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소록도의 가난한 학생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산점을 주자는 겁니다. 사회적 약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은 결코 역차별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회의 평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 평등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만으로는 실질적 평등을 제공해주지 못할 수 있다고 롤스는 보았습니다. 장애자도 버스를 탈 수 있고, 화장실 마음대로 이용하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래서 공중화장실에 장애인 소변기도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일반인이 보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야, 이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쓴다고? 일반 소변기나 더 만들지.” 이래선 안 된다는 겁니다. 롤스는 이들 소수자, 최소 수혜자를 우선 배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롤스는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습니다.---「존 롤스, 기회의 평등, 결과의 불평등」중에서
조건이 동일하다면 좋은 차를 갖는 것은 당연히 가장 노력한 사람의 몫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장주의가 개입되어야겠죠. 서울시장은 누가 해야겠습니까? 다수결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교각은 어디에 먼저 건설해야 할까요? 볼 것도 없이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 건설해야 합니다. 공리주의의 원칙이 적용되어야겠죠. 장애인 주차장은 건물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되는 게 맞습니다. 존 롤스의 주장이죠. 에이즈 치료약은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 먹어야 합니다. 사회주의죠. 그리고 신데렐라의 구두는 누가 신어야 할까요? 당연히 신데렐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존재론입니다.
이렇게 사안에 따라서 어떤 것은 공리주의가 정의로울 수도 있고, 시장주의가 정의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분은 앞서 나온 어느 하나의 의견을 지지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나 상황에 맞는 방법으로 정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정의롭기 위해서는, 우리가 많이 알고 많이 생각하고 정의로워져야 합니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