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대학 버크벡 칼리지의 역사학 교수이며, 전공은 중세사와 역사철학이다. 저서로 『중세 유럽의 신앙과 불신앙Belief and Unbelief in Medieval Europe』 『종교재판과 권력Inquisition and Power』 『중세사란 무엇인가?What is Medieval History?』 등이 있다.
역자 : 이재만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옮긴 책으로 『역사와 역사가들』(공역) 『제국의 폐허에서』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 『공부하는 삶』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등이 있다.
‘추측’은 역사서술 과정이 어느 정도 불확실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역사가들이 때때로 틀린다는 것까지 시사할지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당연히 틀린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잘못 읽거나 잘못 기억하거나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역사가들은 언제나 ‘틀린다.’ 우리가 틀리는 이유는 우선 결코 완전히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적 서술에는 빈틈과 문제, 모순,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우리가 ‘틀리는’ 다른 이유는 서로 언제나 동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틀릴’ 필요가 있다. --- p.28∼29
이 장을 사람들이 과거에 관해 쓰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능숙해진다는 ‘진보’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읽는다면 요점을 놓치는 셈이다. 이 장에서 말한 역사가들은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과거를 최대한 잘 이해하려 시도했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위치에서 일부 시도가 다른 시도보다 정확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이 ‘진실하다’는 우리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 p.58
기번은 문서고를 방문한 적이 없고 문헌을 인쇄한 판본들에만 의존했다. 기번의 글은 우아하지만 때로는 짓궂다. 아울러 『로마제국 쇠망사』의 큰 문제는 로마가 쇠락한 이유를, 또는 문명의 ‘멸망’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에게 적절히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번은 최초는 아닐지언정 탐구하는 역사가의 가장 완전한 사례였을 것이다. 기번은 철학자도 아니고 연대기 편자도 아니고 지역지리학자나 골동품 연구자도 아닌 역사가였다. --- p.88
역사가는 사료의 ‘편향’도 고려하라고 배운다. 그렇지만 여기서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신사 클럽’의 문제 중 하나는 사료를 다루면서 ‘편향’이라는 관념에 지나치게 집중했다는 것이다. ‘편향’(필자의 편견, 필자가 서술을 왜곡하는 방식)을 찾는 사람은 ‘편향되지 않은’ 입장을 찾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문제다. 누구에게나 있는 특색이 ‘편향’에 포함된다면, ‘편향되지 않은’ 문헌이란 없다. --- p.113
동의하든 깨부수든 무시하든, 역사가는 다른 역사가들의 서술과 논증도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 이야기를 창작하는 과정은 건축물이 생길 때까지 그저 벽돌 위에 벽돌을 쌓는 과정이 아니다. 그 과정은 기술하는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결정하는 일, 다른 역사가들이 이미 말한 것과 교섭하는 일, 이야기의 의미를 논증하는 일을 포함한다. --- p.135
미국 소설가 팀 오브라이언Tim O’Brien)은 내가 감탄해 마지않는 작가다. 베트남전에 군인으로 참전했던 오브라이언의 글은 ‘진실한 전쟁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는 문제, 그리고 그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문제와 씨름한다. ‘진실한 전쟁 이야기’라는 표현에 담긴 역설의 엄청난 중요성을 오브라이언은 나보다 훨씬 잘 포착한다. 그러니 그에게 마지막 발언을 넘기겠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실하다. 이야기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