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는 이랑이 화실 앞에서 주워 온 유기 고양이다. 명작의 마스코트가 들어왔다며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세기의 명배우 이름을 붙여 준 사람은 이모였고. 실 포인트의 샴이 명작에 등장하자마자 이모는 고양이가 오드리 헵번을 닮았다며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모른다. 오드리는 정말 오드리 헵번처럼 날씬하고 간결하며 우아하면서도 발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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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들을 건 없어. 그냥 네가 이랑이한테 너무 딱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안도현 시인의 「간격」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거든? 숲이 울창해지려면 나무들 사이에 충분한 간격이 필요하다.”
“걱정 마. 우린 서로를 알기 위해 더 이상 가지를 뻗칠 필요가 없거든.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까.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까지. 그리고 이모, 사랑도 우정도 집착이고 열정이야. 구속이란 말을 들이대면서 히팅 온도를 제한하는 게 폭력이지. 난 그렇게 생각해.”
--- p.68
“넌 그런 얘기 숨기다 꼭 힘들어질 때 털어놓더라? 중딩 때도 그랬잖아. 두 번이나. 그러더니 고딩 때도? 넌 내가 추궁해서 말했다지만 니가 헷갈리고 혼란스러우니까 얘기해 버린 거야. 잘되고 있음 계속 지퍼 닫았겠지.”
“말했잖아. 비밀로 하기로 한 약속 깰 수 없었다고.”
“절친이면 무슨 얘기든 다 해야 하는 거 아냐?”
소리는 고함치듯 말했다.
“모든 얘길 다 하는 게 베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울고 싶었다.
소리는 벌떡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명작극장 끝내자. 절친을 그따위로 무시한 너, 못 보겠어.”
--- p.115
느닷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여성 보컬과 남성 보컬이 번갈아 부르는 노래가 꽤나 감성적이어서? 아니었다. 느닷없이, 소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차가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듯했던 그 말. 어디 가서 나랑 친구였다고 말하지 마, 어디 가서 나랑 친구였다고 말하지 마, 어디 가서 나랑 친구였다고 말하지 마…….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못된 계집애, 그렇게 아프게 때릴 거였다면 요란스럽게 잘해 주지나 말지. 스무 살이면 날 데리고 살겠다고? 됐어. 누가 그러든 다시는 그런 말 믿지 않을 거야.
--- pp.153~154
“이은성, 좀 솔직해질 수 없니? 너 스타일 왜 바꿨니? 중학교 때는 완전 스타일 쩌는 여왕님이었다며.”
머릿속에서 벼락이 내리친 것 같았다. 입이 얼어붙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어떻게 우리한테 감쪽같이, 정말 기막혀.”
소리는 화를 참는 듯 얼굴이 빨개졌다.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정신 차려, 이은성.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나는 입에 남아 있던 추로스를 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그래, 나 스타일 완전히 바꿨어. 그런데 뭐. 친구가 되려면 과거를 고백했어야 했단 얘기니? 그러고 나서 출입증이라도 받고 명작극장엘 들어와야 했다는 말이야? 나, 완벽하게 새로 태어나고 싶었어. 그렇게 한번 놀았다고 영원히 아웃 돼야 해? 잘 살아 볼 기회를 얻는 게 죄냐고.”
--- pp.207~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