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서 현대로 온 사람이라면 도덕성이나 자유, 혹은 여성의 지위, 예술, 인종, 자녀 양육, 동성애, 교회, 여행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성 간의 상호작용, 아이들이 부모를 대하는 태도, 흑인이 백인에게 말하는 방식, 동성애자들이 서로를 만지는 것 같은 평범한 사회적 관계들에 놀라겠지만,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랑관만은 금세 이해할 것이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개념들 중에서 오로지 사랑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얼어붙은 듯 보인다. 어째서일까?(14쪽)
그 어떤 고귀하고 필수적이고 혁명적인 이상도, 서양의 정신이 여전히 갈구하는 삶의 목적과 의미의 궁극적 근거가 되어줄 수는 없다. 사회가 더 개인주의화해갈수록 사랑이 소속감과 구원의 궁극적 원천으로서 계속 격상될 것을 우리는 더 기대할 수 있다. 서양 우상들의 황무지에서, 오로지 사랑만이 무사히 살아남는다.(23쪽)
사랑은 왜 존재하는가, 사랑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잘 산 삶에서 사랑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사랑은 어떻게 함양되어야 하는가, 사랑은 어떤 조건하에서 아름답거나 추하며 선하거나 악한가 하는 것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내가 제시하는 사랑의 역사는, 이 보편적 욕망과 헌신의 힘이 우리가 ‘서양’이라고 부르는 특정 문화집단에서 수세기에 걸쳐 어떻게 해석되어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35~36쪽)
사랑이 어떻게 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그것을 가두고 있던 헛되고 비현실적인 기대로부터 풀려날 수 있느냐는 물음의 핵심은, 사랑을 다정한 보살핌이나 자애로운 연민 같은 뜨뜻미지근한 무언가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이 최고의 감정을, 그리고 잘 산 삶에서 그것의 위치를 좀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세속적인 시대에 내가 제시하는 전반적인 주제는, 우리는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알려진 것이 아닌, 우리에게 부여된 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인간 사랑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39쪽)
욥의 고난은 하느님의 어떤 심오한 사실들에 관한, 그리하여 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실마리를 준다. 이런 최고의 사랑의 대상은 우리에게 좋은 것, 사실상 생명 그 자체를 주지만, 나쁜 것도 준다. 최고의 사랑 어린 친절함을 주지만 가장 지독한 잔인함도 준다. 우리 삶과 존재를 떠받쳐주는 약속을 주지만, 동시에 의지할 데라곤 없는 끔찍한 ‘부당함’도 준다.(71쪽)
내가 이 책에 담아내려 하는 목표는 이것이다. 플라톤이 그토록 거장다운 솜씨로 표현한, 사랑을 통해 우리의 개인적 존재가 발을 디딜 불멸의 터전을 찾으려는 탐색은, 어떻게 인간관계를 포함한 인간 삶을, 극복하려 애쓰기보다는 용인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사랑은 플라톤과는 반대로, 정확히 시간과 일시성과 상실과 고통과 불완전성과 체화된 개인들의 특수성에 이입하는 고귀한 수단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랑은, 그리하여 플라톤의 최고의 사랑이 넘어서고자 하는 바로 그 현상을 칭송하는가?(108쪽)
12~13세기 이후로 서양의 사랑에는 혁신적인 사상이 자리잡았다. 한 개인인 인간이, 이전에는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었던 종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가장 큰 좋음을 체현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따라서 신적인 존재에게나 바칠 만한 숭배를 받는 대상이 된다. 비록 우주는 여전히 하느님에게로 올라가는 사랑의 사닥다리로 여겨지지만, 그리고 모든 사랑은 결국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복속되지만, 타인에 대한, 또는 사실상 자연 일반에 대한 헌신은 더 자유로워져 자체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다.(241쪽)
슐레겔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처음으로 사랑을 시작할 때부터 실험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관계들을 시험해보기 전에는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파트너를 찾아내기 어렵다. 특히 남자들은 남성적 정체성이 자부심으로 너무 강력하게 굳어져 있어 여성적 특성들을 아울러 가지기가 어렵기에 더 그렇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성숙이 일어나기 전에 결혼을 한다. 그 결과 “거의 모든 결혼은 단순히 내연관계나 정사, 혹은 그보다 임시적 실험에 불과한, 참된 결혼과는 거리가 먼 아류작이다”.(309쪽)
기독교의 사랑을 일러 “가장 심오하고 숭고한 종류의 사랑”이라 한 니체의 말에는 물론 역설적 의도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추함에서 위대함의 씨앗을 보고 병에서 건강함을 본다는 것이 니체라는 철학자의 섬세한 점이다. 우리가 퇴행을 통해 고귀해진다는 그의 말은 새김직하다. 고통의 세계에 겁먹고, 자신의 무력함을 원망하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신의 불가피한 존재를 혐오하는 인간은, 자신의 번영을 위한 바로 그 조건들, 즉 고통과 시련을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번영을 갈망하고 있다.(357쪽)
프루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사랑이 지닌 배덕의 위력과 풍부함에 눈을 뜨고, 고통이 얼마나 사랑을 구축하고 기만이 얼마나 사랑에 활력을 주며 지루함이 얼마나 사랑을 마비시키는지를 깨닫고, 질투, 잔인함, 무관심, 그리고 나르시시즘에 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묘사들을 접한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막대한, 어쩌면 극복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최고의 좋음으로 구원받고 싶은 서양의 갈망을 다시금 떠올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자의 고통을 그려내고 정당화하느라 장장 3000쪽 가까이 소모하고 있지만, 반대로 그 고통이 없었다면 태어날 수 없었던 예술작품을 통해서 말이다.(392~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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