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이코노미스트의 스마트한 경제 공부
다만 최근 3~4년을 돌이켜보면, A4 한 장 분량이 넘는 독서평을 남긴 책이 1년에 50여 권 정도 되니, 연간 적어도 150권 이상 읽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블로그에는 기본적으로 ‘괜찮은 책’의 서평만 올리기 때문이다. (…) 그나마 국민연금에 일했던 지난 3~4년은 내 인생에서 책을 가장 적게 읽은 시기이니, 40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읽은 책이 대략 6,000권 이상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잡지나 만화, 여러 장르 소설까지 포함하면 못해도 1만 권 이상을 읽어 왔으리라. --- p.20~21
결국 나는 1986년 말, 서울 어느 명문대의 사학과 합격증을 받아들 수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사학과에 갈 수 있었는지 돌이켜 보면, 부모님의 지극한 뒷바라지가 첫째이겠지만 책에서 원인을 찾아 본다면 『장길산』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저렇게 끝도 없는 학정을 이어간 허약한 나라가 어떻게 500년 넘는 기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단 말인가? 특히 같은 기간 나폴레옹과 넬슨을 비롯한 전설적인 장군들에게 단련된 유럽의 ‘전쟁 기계’들이 동양을 정복하러 오기 전에 왜 멸망하지 않았는가? 한편으로는,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 스스로 일어날 기회가 없었는가? --- p.42
1993년 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모 경제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직 대학원을 마치기 전이라 결과적으로는 사학과 졸업 학력밖에 없는 내가 경제연구소 연구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당시 우리나라 경제가 역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p.67
나는 1997년 봄까지 경상수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표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경기회복이 지연되는 정도로만 생각하다, 1997년 7월 태국에 이어 10월 홍콩까지 외환시장의 불안이 전염되고서야 급히 외환 위기의 위험을 경고하는 등 뒷북을 치게 된다. 물론 이때 쓴 보고서 덕분에 일거에 인지도를 올리고, 또 외환 위기 충격이 완화된 1999년에는 오히려 급격한 연봉 인상을 경험했으니 ‘전화위복’으로 작용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외환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이를 인지하지 못했고, 또 IMF 구제금융을 받기 며칠 전에야 외환 위기 관련 보고서를 쓰는 등 이코노미스트로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자괴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발견한 책이 영남대 경제학과 차명수 교수의 『금융 공황과 외환 위기, 1870-2000』이었다.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피오르의 책보다 더 큰 영향을 준, ‘인생 책’이라고 부를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 p.77~78
이코노미스트와 치과의사는 대표적인 문과와 이과의 고소득 직군이다. 그러나 이 두 직업의 실상은 전혀 딴판이다. 치과의사는 6년에 걸친 학업을 마친 후 점진적으로 기술을 연마하고 지식을 쌓음으로써 자신의 분야에 점점 더 능숙해진다. 초보 의사 시절에는 환자가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또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실수가 줄어들고 나중에는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나이가 듦에 따라 의료사고 등의 분쟁에 휩싸일 일은 줄어들고 그의 소득은 더욱 안정적으로 변해 간다.
반면 이코노미스트의 업무는 시간이 흘러도 복잡하고, 그의 성과는 ‘운’에 많은 부분 의지한다. 테틀록 교수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리 ‘여우’ 같은 이코노미스트가 되려고 노력할지라도 결국 그 예측의 정확성은 상당 부분 운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로서 일을 계속해 나가려면, 경제 전망에 최선을 다하되 늘 자신의 전망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만일 이런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아마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병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 p.106
나도 한때 일확천금의 꿈을 꾼 적 있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의 급등장을 보면서, 그리고 2004년부터 시작된 대세 상승장 속에서 쉽게 돈 벌고 또 빨리 부자가 되어 은퇴하려는 욕망에 발버둥 쳤다. 위험을 무릅쓰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투자한 덕에 돈은 좀 벌었는지 모르지만, 자산 가격의 등락에 일희일비하며 정작 본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스트레스로 불면증을 얻고 급기야 허리 병 때문에 매일같이 병원을 다니면서야 ‘이게 정말 맞는 길인가?’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 p.109~110
증권업계를 떠나 은행으로 직장을 옮긴 후 어려움 깨나 겪었다. 조직 문화의 차이도 있었지만, 가장 큰 난관은 은행이 이코노미스트에게 원하는 정보가 증권사와 무척 다르다는 데에서 비롯했다. 증권사에서는 주식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특히 금리)에 관심이 많다면, 은행에서 가장 원하는 정보는 외환 및 상품시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외환을 공부하면서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방향이 정반대라는 것을 발견하고 정말 크게 놀랐다. --- p.111
지난 2014년 8월부터 국제 유가가 급락했건만, 오히려 한국은 수출이 얼어붙으면서 경제성장률이 더 떨어지고 있다. 저유가가 그렇게 한국 경제에 좋은 일이라면, 왜 우리 경제성장률은 유가 하락 1년이 지나도록 이 모양인가? 그 이유는 바로 ‘공급 사슬’에 있다. 여기서 공급 사슬이란 ‘소비자→소매업체→도매업체→제조업체→물류업체→부품업체→원자재업체’로 이어지는, 소비자 수요가 충족되는 과정에 연관을 맺고 있는 기업들의 연쇄적인 고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 사슬의 제일 끝에 위치하고 있다. 그건 중국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 경기는 거의 늘, 한방향으로 움직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 즉, 원자재 생산 국가나 제조업 위주의 수출 국가 경제가 선진국 경제에 비해 더 큰 경기 변동성을 갖는 것은 “소비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채찍 효과의 피해자가 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중국 모두 그 경우에 해당한다. --- p.112~115
이코노미스트 생활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을 고르라면, 역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해 읽는 순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책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에는 마치 아리따운 소녀를 처음 만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형 서점을 나가 봐도 마음에 드는 경제 경영 서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경제 경영 베스트셀러 코너를 살펴보면 자기계발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그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화폐 전쟁』 류의 음모론 소설들이다.
『화폐 전쟁』 같은 베스트셀러를 비판하는 것은 수많은 독자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임을 잘 알지만, 이 대목에서 음모론을 다룬 책을 비판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이런 책들은 독자의 ‘이성적 판단’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p.139
반대로 내가 ‘저자의 이름’만 보고 바로 책을 구입하는, 글 잘 쓰는 경제학자 리스트를 소개해 보는 것도 좋겠다.
· 폴 크루그먼: 칼럼은 되도록 안 읽지만, 그는 타고난 글쟁이다.
· 로버트 쉴러: 2000년 정보통신 거품과 2008년 부동산 버블을 예측한 경제학자, 더 말이 필요 없다.
· 팀 하포드: 이만한 글쟁이는 다시 보기 어렵다.
· 제러미 시겔: 주식시장 참여자뿐만 아니라 경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놓쳐서는 안 될 저자.
· 라구람 라잔: 현재 인도 중앙은행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게 아쉬운 글쟁이. 부디 빨리 책을 써 주길!
· 장영재: 『경영학 콘서트』의 저자. 제발 책 한 권만 더! --- p.159
경제학에 대한 기초를 다지고 나면 경기순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2008년에 겪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충격이 워낙 컸기에, 앞으로 또 이런 대대적인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욕구가 치솟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경기순환에 관한 책이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군터 뒤크의 『호황의 경제학 불황의 경제학』이 현재 절판 상태라는 게 무척 안타깝다. 혹시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면 무조건 구입하기를 바란다. --- p.160
『화폐 트라우마』 덕분에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유럽 경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부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국 연준은 1929년 대공황 당시 잘못된 정책 대응으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한 것을 깊이 반성했고, 또 이게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작용했기에 2008년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중앙은행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은 전혀 다른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무분별한 화폐 발행이 초인플레이션(월간 인플레이션율이 30퍼센트가 넘는 일이 지속되는 상태)을 유발했고, 결국 나치의 득세를 가져왔다는 자기반성 속에서 모든 행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 p.175
피터 린치는 총 세 권의 투자 관련 서적을 펴냈는데 이 가운데에서 『피터 린치의 투자 이야기』가 초보자에게 가장 적합하다. 일단 이 책은 다른 주식 투자 책들과 달리 매우 쉽다. 그러면서도 저자인 피터 린치가 워낙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인 터라 주식 투자를 위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지식들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 --- p.185
부동산 시세를 매일 쳐다보는 사람과 1년에 한 번 재산세 낼 때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둘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 내 생각에는 재산세 낼 때나 한 번 보는 사람이 훨씬 행복할 것 같다. 왜냐하면, 시장의 자산가격은 늘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에 시세를 쳐다볼 때마다 시시각각 희로애락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인간은 가격 상승이 주는 기쁨보다 가격 하락이 주는 고통을 훨씬 크게 느끼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시세를 자주 들여다볼수록 불행을 느끼는 빈도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박원갑 박사는 『한국인의 부동산 심리』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 p.213
그런데 차명수 교수는 『기아와 기적의 기원』에서 이 두 가지 주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한국이 산업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성공 요인을 지목한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 당시 교육 투자(주로 소학교), 둘은 수출 지향 경제성장 노선, 셋은 조선 이후 축적된 문화자본(특히 한글)의 영향으로, 저자는 이 세 가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 p.246
순대국밥으로 시작된 미식 생활 덕분에 항상 과체중과 비만 사이를 맴돌았다. 딱 한 번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10킬로그램 가까이 살을 빼면서 대학생 시절 몸매를 잠깐 되찾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시 후덕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나는 평소에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6시까지 회사에 출근하고 또 매일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등 남들에게 ‘매우 부지런하다’는 평을 듣는다. 나름 의지력 면에서는 남부럽지 않은 내가 왜 다이어트에는 번번이 실패하는 것일까? --- p.275
저자 우용표의 입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대체 불가능한 일. 다시 말해 ‘이 사람이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지 않으면 회사에서 각 개인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물론 경기가 좋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경기가 나빠지는 순간 ‘자리 뺏기’ 게임은 언제 시작될지 모른다. --- p.309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품는 것이 ‘기’에 해당한다면, 서문을 쓰고 목차를 잡는 단계는 ‘승’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여러 자료를 모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 ‘전’에 돌입하는 것이요, 편집자에게 지적당하거나 스스로 맘에 들지 않아 끙끙대며 글을 고치는 단계가 ‘결’이 되겠다. 이러한 네 단계를 이 책만큼 제대로 밟은 책은 없지 않았나 싶다.
--- p.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