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은 ‘공기의 다른 형태를 부추겨 예술이라는 망집을 낳고’ 거기 들어가 ‘폐광’의 ‘광부’처럼 사는가 보다. 그는 ‘폐광의 영화관’ 속에서도 ‘빛을 도륙당한 몸 안의 탄진들로’ 누군가와 겹쳐진 존재로 존재하는데 그 누군가는 아버지나 연인, 죽은 나이기도 하지만 ‘안팎’과 ‘죽음 너머’와 ‘이곳에 없음’과 ‘지척이 광년으로 늘어나는 격조’ 등 무한일 때도 있다. 이것은 시공을 자유자재로 늘였다 뒤집었다 하는 그의 놀라운 이미지 축조술 덕분에 가능한 것인데, 이렇게 겹쳐진 존재로 있음이 강정의 시적 공간을 넘치도록 광활한 주름으로, 시원에 가 닿게, “전부 멀리로 흘러가는 영화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 그의 시적 표현은 ‘여자로 울려고 태어난 몸처럼’ 관능적이고, 그의 시적 해석은 전율의 자성을 띤 채 시 속에서 태초의 자석처럼 진동한다. 이만큼 한국어를 자유롭고 찬란하게 부재와 버무려서 시공(時空) 없는 시공에 가 닿게 하는 시인도 드물겠다. - 김혜순 (시인)
물과 거울에 비친 세계가 아니라, 물과 거울이 쏟아 낸 세계. 시인이 시를 붙든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점령해 버린 형국. 죽음의 한가운데서 에로스의 꽃이 핀다. 강정은 혼쭐이 났겠다. 정신이 없었겠다. 강정은 강정이 아니었겠다. 강정은 “삶도 죽음도 이미 다 겪은 건강한 노인”이었다가, “여자라 여긴 모든 형상과도 다른 여자”였다가, 그 모든 것이었다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가…… 지금은 기진하여 강정으로 돌아와 뻗었는가. 강정은 강정이 아닌 먼 길을 달려 강정에 거의 닿았으니, 시집 뒤에 드러누운 자는 이제 막 태어난 새끼 사자, 새끼 사슴, 순결한 아기 강정이다. 시가 강정을 낳았다. 김행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