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물건을 훔치지 않아도 늘 발이 저렸고, 딱히 뒤가 구린 짓도 하지 않았는데 거의 매일 거짓말을 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훔쳐 봤자 뭘 얼마나 훔치고 구린 짓을 해 봐야 뭐 얼마나 구리겠는가? 내가 계속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내 행동이나 생각 때문이 아니라, 솔직해졌을 때 한없이 창피하고 초라해지는 나의 상황 때문이었다. 내가 거짓으로 대답해야 했던 질문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거 네가 한 거야’ 같은 것보다 ‘너 어디 사니’, ‘너희 부모님은 무슨 일 하셔’, ‘넌 학원 어디 다녀’ 같은 질문이었다. 어린 나이의 나는 엄마와 단둘이 주공 임대 아파트에 살고 엄마는 일 없이 매일 집에서 쉬고 학원은 돈이 없어 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차마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 p.25
그렇게 신발이 도착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상자를 열었다. 나이키 운동화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멋졌다. 개학 직전 친구와 만날 일이 생겼고, 마침내 처음으로 나이키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가뿐했다. 생각보다 발이 엄청 편하지는 않았지만 원래 그렇게 신는 신발이겠거니 했다. 내가 산 신발이 정품이 아닌 가품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약 일주일 후였다. 신잘알(‘신발 잘 알고 있는 놈’의 준말)이었던 한 친구가 내 신발을 보더니 ‘이거 어디서 샀냐? 이미테이션 티 엄청 나는데’라고 물어본 것이다. 나는 나이키 로고의 모양이 그렇게 다양한 줄 몰랐고, 로고 끝이 살짝 꺾인 것과 바느질 마감 상태를 보고 짝퉁을 감별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OEM 상품’이라는 말이 가품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단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엄청 충격을 먹거나 하진 않았다. 다른 곳에 비해 지나치게 저렴한 가격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 가품이라는 걸 알고 난 후에는 그 신발을 신지 않았다. 몇 번 억지로 신고 나가긴 했는데, 이전과 같은 기분으로 신고 다니는 건 불가능했다. 신발은 바뀌지 않았다. 내 생각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게 날 더 슬프게 만들었다. --- p.43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치과에서 나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말없이 이를 닦았다. 때는 겨울이었고, 수도꼭지에서는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물이 나왔다. 나는 그 물로 치약 거품을 머금은 입안을 헹궜다. 10초 정도였을까? 죽고 싶을 만큼 이가 시렸다. 그다음에는 꽤 견딜 만했다. 양치를 끝내고 나왔고, 엄마는 방 한쪽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날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에. --- p.76
언젠가 너무 화나는 일이 생겨서 자취방에서 혼자 이불과 베개를 두들기다가, 분이 풀리질 않아서 물건을 마구 던지고, 끝내는 벽을 쾅쾅 걷어찬 적이 있었다. 한 15초쯤 지나서였나? 그날 처음으로 옆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30대 직장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덩치가, 매우, 큰, 직장인. 분노라는 게 그렇다. 자기보다 센 사람 앞에서는 너무나 조절이 잘된다. 자연스럽게 분노 조절에 성공한 나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 p.87
엄마는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는 못했지만 엄마는 여자인데도 고등학교까지 나왔다는 사실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다. 나와 엄마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자는 거의 찾기 힘들었다. 엄마는 밖에서 다른 아줌마들과 대판 말싸움을 하고 돌아와선 으레 이렇게 중얼거렸다. "고등학교도 못 나온 게 까불고 있어!" 나는 여자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가 왜 쉽지 않은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냥 그런 줄로만 알았다. --- p.101
흙수저로 태어났지만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도 분명 있다. 그 성공담들을 예시로 들며, 수많은 흙수저에게 더 노력하라는 말로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노력이라는 말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태생적으로 불리한 사람들은 대부분 누구나 노력만 하면 되는 사회에서 당연하게 패배자가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패배자들은 곧 패배를 내재화한다. 내가 지금 비참한 것은 모두 과거에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노력했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처럼 이룰 수 있었을 거야 등등.
타고난 환경 때문에 노력할 기회조차 별로 주어지지 않았고 내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다는 걸 인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내가 사는 삶이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으니까. 자신의 삶에서 티끌만큼의 가치라도 찾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니까. 그래서 시스템을 욕하는 다른 패배자들을 보며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자존심을 회복한다. 그래도 난 쟤들처럼 남 탓은 안 한다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쉽게 패배자들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 p.128
새벽 4시,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재고 정리를 대충 끝내고 휴대폰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당시 시급은 4000원이었다.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장점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고, 단점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던 곳은 대로변에 붙은 편의점. 한 시간에 한두 명 꼴로 오는 손님에게 카드를 받고, 긁고, 담배 이름을 잘 알아듣고, 정확하게 한 갑을 뽑아 주는 게 하는 일의 대부분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일이긴 했지만 정작 일을 하면서 ‘이런 건 로봇이 해도 되는 일 아닌가’ 같은 생각을 자주 했다. 농담 삼아 편의점 사장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사장님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야, 로봇은 암만해도 인간만 못 해. 로봇이 필라멘트를 팔리아멘트라고 알아듣기나 하겠냐. 인공지능이니 뭐니 해도 아직은 인간이 최고야. 사장님이 날 믿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기뻤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이 이세돌을 바둑으로 꺾어 버리는 시대가 와 버렸다. 사장님… 당신은 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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