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자라고는 두 개밖에 없는 좁은 공간에 뱃사람들과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자들이 작전을 짜듯 모여 있었다. 뱃사람들도 입술이 빨간 여자들도, 모두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중략) 그제서야 우리를 발견한 아빠의 눈이 토끼처럼 붉다. 아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뱃사람은 아직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옆에 앉은 여자의 가슴을 움켜잡고는 킬킬 웃었다. 아빠는 진짜 토끼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상 위에 놓인 반찬을 집어 오물오물 씹었다. 다시 술잔은 돌아가고 나와 언니만 얼음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투명인간의 기분이 이런 걸까? --- pp.19~20
그와 함께 취하는 일은 언제나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우리가 취해 침대에 나란히 누우면 놀랍게도 이 지구상에는 우리 둘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큰 발소리를 내며 지구 밖으로 사라졌다. 그때부터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기존의 시간을 벗어나 움직였다. 평상시 일 초는 눈을 깜빡하면 사라져버리는 시간이겠지만, 우리가 취했을 땐 양팔을 천장으로 높이 뻗어 흔들고 다시 양쪽 다리를 들어올려 신나게 흔든 다음 내려놓아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간혹 중력도 사라져 매트리스 위로 몸이 뜨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때의 행동에 집중했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모든 일들이 저마다 존재의 이유를 남기며 눈과 머리를 어지럽혔다. --- pp.23~24
네모난 식탁을 채운 우리 가족은 앞에 있는 돈가스 자르기에 각자 집중하고 있었다. 튀김가루에 쌓여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 고기를 무거운 성인용 포크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는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창가에 앉은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동그란 눈에 깔끔하게 묶은 양 갈래 머리를 한 내 또래의 아이는 몇 달 전, 부산에서 전학을 왔다. 아빠가 우체국장이라는 아이는 우체국 뒤에 정원이 넓은 집에 살았고, 언제나 깨끗한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 손에 포크를 쥔 채 반갑게 눈웃음을 지었다. --- p.75
문득 몇 년 전, 흑백 모니터로 보았던 내 배 속에 있던 씨앗 하나가 생각났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깊이 생각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었고, 시간을 끌면 더 힘들어질 뿐이었으니 서둘러 일을 진행하고 잊어버리려 했다. 그 씨앗이 흡입기로 빨려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세 살이나 네 살쯤 된 아이가 되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성별을 알 수 없는 짧은 머리 꼬마와 그 옆에 아이의 손을 잡고 선 ㄷ의 뒷모습이 보였다. --- p.112
사랑을 몰랐더라면, 나는 예전처럼 자신만만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언제나 더 많은 걸 갖기 위해 신나게 앞만 보고 뛸 수 있었을 텐데. 그때 우리에게 왔던 사랑은 한 사람 빼고는 모두 다 잃는 것이었다. 서로를 위한 시간들은 결국 서로를 망치는 시간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재활원으로 들어가기를 결심한 사람처럼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나는 제 손으로 찢어버린 자명고 앞의 낙랑공주처럼 멍하니 서서 다음 전철을 기다렸다. --- p.160
J는 호주 서부의 세탁공장에서 일을 할 때 만났다. 오롯이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일 년을 만들고 싶어서 호주로 건너가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내가 했던 일은 호텔이나 식당에서 오는 테이블보나 냅킨을 오염된 상태별로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간혹 며칠씩 묵은 세탁물을 분류할 때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행주와 걸레 때문에 인상을 쓸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이 일은 별다른 생각 없이 몸만 열심히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고, 시급이 22달러나 되었기 때문에 몇 달만 버티면 제법 돈을 모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 p.168
답장을 보내지 않고 메일을 닫았다. 결국 우리 셋은 같았다. 우리는 그저 사랑이라는 것에 철저하게 패배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은 일본도를 든 무사와 같이 힘없이 고개 숙인 우리 셋의 목을 베고는 힘차게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