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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뜨락을 거닐다

연암의 뜨락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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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9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230쪽 | 148*210*20mm
ISBN13 9788928404162
ISBN10 892840416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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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비가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는 공무에 치여 문상하러 오질 못했다. 모진 사람 같으니라고. 어린 자식을 남기고 먼저 가 버렸으니, 원. 쯧쯧.”
선생은 나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애써 슬픈 기억을 털어 버리려는 듯 말을 꺼내셨다.
“그래, 어떻게 지냈느냐? 네 모친은 여전하고?”
나는 요사이 하는 일 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안부를 전하고, 잠시 글공부를 쉬고 있다고 얼버무렸다. 그런 나를 보는 선생의 눈빛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강렬하고 매서웠다. 연암 선생은 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으셨다.
“이 집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은 잠시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말씀하셨다.
“잠시 쉬기도 할 겸 예전에 살던 집을 한번 둘러보러 왔다. 당분간은 이 집에서 지낼 생각이다.”
말씀이 끝나자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지금 나의 처지와 어두운 마음을 들킬 것 같았다. 잠시 눈치를 보다가 인사를 올리고 물러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연암 선생을 만나다」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어떤 집 벽에서 본 글이 있다. 호랑이에 대해서 쓴 내용이었는데, 점심도 배불리 먹었겠다 어디, 내 이야기 좀 들어 보겠느냐?”
? ? ?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취하고, 남을 못살게 굴며 생명을 뺏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더군. 너희들은 밤낮으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돈을 형님으로 모시며 명예를 위해 아내를 죽이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심지어 메뚜기에게서 밥을 빼앗고 누에에게서 옷을 빼앗으며, 벌에게서 꿀을 약탈하고 개미 알로 젓을 담그니 인간보다 더 잔인한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늘의 눈으로 보면 호랑이나 인간이나 모든 존재들은 가치 있는 생명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다른 생명들을 약탈하고 죽여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지. 우리 호랑이도 말과 소를 잡아먹기는 하지만 너희만큼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큰 도적이 아니겠느냐? 그러면서 인륜의 도리를 논하는 꼴이 참으로 같잖구나.

--- 「선비를 꾸짖은 호랑이 호질」

“하늘은 백성을 네 종류로 내었다. 그중에 양반인 선비가 가장 귀하다. 양반은 그야말로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나 장사를 하지 않고 옛글과 역사를 대강 익히면 크게는 문과에 급제할 것이요 작게는 진사가 될 것이다. 문과 급제 후 합격 증서인 홍패를 받는데, 두 자 남짓한 이 홍패를 보고 사람들은 온갖 물건들을 갖다 바칠 것이다. 그러니 이게 바로 돈주머니라 할 수 있다. 서른에야 진사가 되어 벼슬에 발을 들여놓아도, 이름난 음관蔭官이 되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일산 쓰고 부채 바람 쐬어서 귀가 하얗게 되고, 모든 일을 종에게 시키니 뱃살이 처지게 될 것이다. 방 안에는 기생들을 즐비하게 거느리고, 뜨락에는 곡식을 뿌려 두고 학을 기른다. 시골에 사는 궁한 선비라도 이웃의 소로 내 밭을 먼저 갈게 하고, 일꾼들 시켜 내 논의 김을 매게 해도 감히 거역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코에 잿물을 붓고 상투 잡아 도리질을 치며, 귀밑머리나 수염을 다 뽑아도 감히 원망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만두십시오. 나더러 도적놈이 되라는 말입니까?”
부자는 군수가 증서를 다 읽기가 무섭게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곧장 관아의 문을 박차고 나가며 다시는 양반이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양반에 대한 이야기 1 양반전」

자네가 천한 일을 한다고 무시하는 엄 행수는 나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았네. 그런데도 나는 언제나 그를 칭찬하고 싶어 안달이지. 그는 끼니때마다 밥을 든든하게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조심 걷고, 졸리면 쿨쿨 편하게 자고, 웃을 때는 시원하게 껄껄 웃는다네. 그러다 가만히 있을 때는 바보처럼 보이기도 하지. 그는 흙으로 벽을 쌓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락거리며 지내지.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잘 때는 개처럼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즐겁게 일어나 삼태기를 메고 마을로 내려와 뒷간을 청소한다네.
구월에 비와 서리가 내리고 시월에 얇은 얼음이 얼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 똥과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밑에 쌓인 닭똥, 개똥, 거위 똥, 돼지 똥 그리고 비둘기 똥, 토끼 똥, 새똥 따위를 보물처럼 여기며 거둬 가지만 그것이 청렴함에 해가 되지 않고, 모든 이익을 혼자 다 갖지만 그것이 의로움에 해가 되지 않는다네. 욕심을 부려 더 많이 얻으려 애써도 어느 누구도 그가 만족할 줄 모른다고 말하지 않지.
? ? ?
나는 똥을 치우는 엄 행수보다는 훨씬 나은 운명을 타고났다. 그런데도 나는 내 운명을 증오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차별만 받는 삶이 사무치도록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내 운명이 아무리 나를 얽어매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지만 나는 내 삶에서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원망과 욕심을 버리고 묵묵히 나만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 「오물 속에서도 향기를 발한 사람 예덕선생전」

그의 말을 들은 민 영감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작은 벌레가 무슨 큰 근심이 되겠나? 내가 보기에는 저 종로 거리에 가득 찬 것들이 모두 황충이라네. 하나같이 키는 칠 척인데 머리는 검고 눈은 반짝거리지. 입은 주먹이 들어갈 만큼 큰데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구부정한 모습으로 줄줄이 몰려다니면서 곡식이란 곡식은 죄다 먹어 치운다네. 농사를 해치고 곡식을 짓밟는 데에는 이들 무리보다 더한 것이 없네. 내가 그것들을 잡고자 하였지만 바가지가 작아 잡지 못했네. 큰 바가지가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야.”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민 영감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말로 그런 벌레가 있나 싶어 두려워하였다.
이렇게 민 영감은 모든 말에 재치 있게 대꾸하고 해학적으로 받아쳤다. 그러면서도 날카롭게 세상의 잘못을 비판하기도 했다. 민 영감은 나를 찾아온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 「세상에 당당했던 늙은이 민옹전」

선생은 함자는 지원趾源이고 자는 미중美仲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일찍이 나의 선친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선친께서 작고하신 후 통 뵙지 못하다가 선생께서 잠시 한양의 옛집에 들르셨을 적에 다시 뵙게 되었다.
당시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세상과 벽을 쌓고 내 처지를 비관하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다시 만난 연암 선생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며 내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이끌어 주셨다.

특히나 잊지 못할 가르침 중 하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의 뜻을 펼 수 없었지만 끝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 속에 숨어 살며 신선이라 불렸던 김홍기와 해학과 골계로 세상을 조롱하고 풍자하며 당당하게 세상에 맞섰던 민유신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서자로서 느낀 자괴감을 극복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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