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건축물은 도시와 도시인의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기억 저장소이자 시간을 담는 그릇이다.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가 서쪽으로 전파되기 전에 수메르문명에서는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찍어 남겼고,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 식물 줄기로 만든 파피루스 종이에 글을 남겼다. 점토판은 깨지기 쉽고 파피루스는 부서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돌에 새기는 방식은 반영구적이었지만 운반이 너무 어려워 편지 같은 글은 양피지에 써서 전달했다. 그러나 양피지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양가죽을 벗겨 여러 번 문질러서 얇게 만든 양피지는 가격이 비싸, 부자들도 양피지 편지를 받으면 글을 읽고 글자를 지운 뒤 재활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새로 쓴 글자 아래 처음에 썼던 글자가 배어나오기도 했다. 이를 ‘팰림시스트’(원래의 글 일부 또는 전체를 지우고 다시 쓴 고대 문서)라고 하는데, 과거의 흔적이 현재의 도시 공간에 미친 영향을 설명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 예를 들어 서울 강북에 구불구불한 길이 많은 것은 과거에 구불구불 흐르던 시냇물을 복개해서 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불구불한 시냇물이 구불구불한 도로로 남아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대표적 광장인 나보나 광장은 동그랗거나 사각형인 대부분의 광장과 달리 가로로 긴 형태다. 나보나 광장이 이런 형태를 갖게 된 이유는 2000년 전 고대 로마시대 때 전차 경기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 p.9∼1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부지는 조선시대 왕실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종친부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있던 곳이다. 특히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미술관의 사무동으로 쓰이는 붉은 벽돌의 기무사 건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근대식 병원으로 처음 세워졌다가 광복 후 육군통합병원을 거쳐 1971년부터는 국군보안사령부(이후 기무사로 개칭)가 사용했다. 1979년 10·26 사태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신이 처음 안치된 곳이기도 하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2·12 쿠데타를 모의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또 종친부가 있는 터는 조선시대의 규장각·사간원 등의 관청이 자리했던 곳이다. 종친부는 신군부 집권 당시 테니스장 건립을 이유로 인근 정독도서관으로 옮겨졌다가 미술관이 조성되면서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서울관 부지는 조선시대의 왕실 관청과 일제 강점기의 군 병원, 군사정권 시절의 기무사 등 권위적인 공간으로 사용되며 일반인의 출입이 전혀 허용되지 않았던 도심 속 외딴섬 같은 곳이었다. --- p.20
윤동주문학관의 원래 모습은 낡은 수도가압장이었다. 가압장은 높은 지대로 올라오면서 점차 약해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흐르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낡고 작은 수도가압장을 윤동주문학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인물은 이소진 아뜰리에리옹 서울 대표다. 설계 의뢰를 받고 고민하던 이소진 대표는 수도가압장이 자리 잡은 장소에 반해 프로젝트를 맡기로 결정했다. 이후 벌어진 우연의 연속으로 인해 윤동주문학관은 이소진 대표에게도 특별한 건축물로 기억되고 있다. 처음 구상했던 설계는 건물 옥상을 활용한 큰 정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좁은 실내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고심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2011년 7월 집중 호우로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한 이후, 윤동주문학관의 안전진단을 진행하던 중 감춰져 있던 두 개의 물탱크를 발견하게 된다. ‘바닥면적 55제곱미터, 높이 5.9미터’의 물탱크를 발견한 순간 이소진 대표는 작은 구멍을 통해 (물탱크 안으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시적으로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주저 없이 물탱크 공간을 활용한 설계로 바꿨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이뤄졌다. 이로써 물탱크 한 곳은 지붕을 걷어내고 ‘열린 우물’로, 다른 한 곳은 공간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닫힌 우물’로 재탄생했다. 열린 우물에서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빼꼼히 보이는 팥배나무도 우연이 남겨준 선물이었다. 공사 과정에서 뿌리가 절반 이상 외부로 드러났지만 끈질긴 생명력과 공사 진행팀의 노력으로 살아남았다. 살아난 나무는 열린 우물 안쪽으로 가지를 드리웠다. --- p.52∼54
흥국생명빌딩과 열린 갤러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해머링맨’, 즉 망치질하는 사람이다. 해머링맨은 높이가 22미터로,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 중에서 가장 키가 큰 것으로 알려진 사우로포세이돈(16∼17미터)보다 크며, 무게도 50톤에 달해 세종로 사거리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해머링맨은 지난 2002년 6월 4일부터 망치질을 시작했으며,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1분에 한 번씩, 하루 660회 쉬지 않고 망치질을 한다. 과거에는 노동절인 5월 1일이 되면 망치질을 쉬었으나 최근에는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도 망치질을 하지 않는다. 2002년부터 지금까지 한 망치질을 계산하면 약 340만 번에 달한다. 이에 2015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두 달간은 노동에 지친 해머링맨에게 12년 만에 처음으로 휴식을 주고 노후 부품 교체와 도색 작업을 했다. 해머링맨을 만든 미국 작가 조너선 브롭스키는 1976년 튀니지 구두 수선공이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사진을 보고 노동자의 심장소리를 듣는 듯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진에서 영감을 얻어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표현한 해머링맨을 제작했고 1979년 미국 뉴욕에서 3.4미터 높이의 해머링맨을 처음 소개했다. 이후 독일 프랑크푸르트(21미터), 노르웨이 릴레스트롬(12미터), 스위스 바젤(13.4미터) 등 유럽 지역 세곳과 미국 시애틀(14.6미터), 캘리포니아(10미터), 댈러스(7.3미터) 등 미국 도시 7곳을 포함해 전 세계 11곳에 해머링맨을 설치했다. 아시아에서는광화문에 설치된 해머링맨이 유일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다. --- p.93
잘 알려졌듯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전통적인 방패연을 형상화한 건축물이다. 경기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사각 방패연 모습이다. 이는 승리를 향한 희망과 한국의 이미지와 문화 그리고 통일과 인류 평화에 대한 희망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월드컵 개막식에서는 플라스틱 연에 풍선을 달아 하늘로 날려 보내는 퍼포먼스도 보여줬다. 하지만 애초의 설계는 이와 달랐다. 어렵게 설계 용역을 따낸 류춘수 이공건축 회장이 한 달여 동안 가다듬은 형태는 잠실 종합경기장 또는 여타 축구경기장과 같은 원형이었다. 세부 도면작업을 넘기고 프랑스 월드컵경기장을 보러 가던 비행기에서 그는 무심코 잡지를 폈다가 무릎을 쳤다. 첫 페이지를 가득 차지한 방패연 사진을 본 것이다. 케이블과 직물로 공간을 구성한 건축이 트레이드마크인 그에게 방패연은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이미지였다. 앉은자리에서 그는 바로 스케치를 했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본사로 팩스를 넣었다. --- p.101∼102
황순우 대표는 도시 재생을 설명할 때 ‘10 + 10’ 개념을 강조한다. ‘10년 정도에 걸쳐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이후 도시가 운영되고 정착하는 데 추가로 10년 정도 걸린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60∼70년에 걸쳐 노후화하고 슬럼화된 도시를 재생하려면 이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도시 재생 현주소는 이와 다르다. 그는 “도시 재생과 관련해 정부는 선도사업을 정하고 사업 목표에 따라 3∼5년의 짧은 기간에 성과를 내려다보니 성급하게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많은 오류와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도시의 공동체와 문화·생태계에 대한 고민 없이 땅값을 올리고 관광상품을 만들려는 보여주기식 작업만 난무한다는 지적이다. 황순우 대표는 도시 재생을 위한 자금은 오랜 기간 조금씩 투입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단기간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면 지역 공동체가 분열되고 사업이 망하는 경우가 많아 도시 재생 관련 기금을 만들거나 특별 회계를 통해 자금을 지속적으로 집행하는 게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 역시 성공적인 도시 재생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강조한다. --- p.157∼158
르네상스호텔은 건축가 고 김수근의 유작이다. 1988년에 완공된 이 호텔은 김수근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5년 병상에서 스케치한 마지막 작품 중 하나다. 비슷한 시기에 설계한 서울역 인근의 벽산빌딩(현 게이트웨이타워)도 르네상스호텔처럼 곡선 형태의 모서리가 특징이다. 이런 특징은 당시 김수근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단서가 된다. 그의 제자인 승효상 이로재 대표는, 르네상스호텔은 단순히 하나의 건축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질서’를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승효상 대표가 말하는 질서는 바로 맥락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르네상스호텔이라는 건축물이 갖고 있는 맥락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설계자가 구현하고자 했던 맥락이다. 승효상 대표는, 설계 측면에서 볼 때 르네상스호텔의 가장 큰 특징은 코어를 중심으로 두 개의 ‘켜’로 보이도록 설계한 점이며, 저층부까지 합치면 세 개의 ‘켜’로 이뤄져 있는데 이것이 주변의 다른 건물로 이어지며 또 하나의 켜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김수근의 제자들은 이렇게 스승의 철학을 이어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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