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소질이 있는 노예에게는 기예나 학문을 가르쳐, 그 기능과 재능에 따라 값이 매겨졌다. 부유한 원로원 의원 저택에는 학예 분야이건 기능 분야이건 온갖 직업 노예들이 있었다. 사치와 관능적인 생활을 위한 노예들의 수는 오늘날의 사치 관념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많았다.
상인이나 제조업자는 일꾼을 고용하기보다 노예를 사는 편이 이로웠으며, 농촌에서는 노예가 가장 값싸고 일 잘하는 농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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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더없이 행복한 세상에서 살 때,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쇠퇴의 기운을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바야흐로 이때 제국 중심부에는 그러한 오랜 평화와 로마의 단일 지배에 의한 해독이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점차 획일화하고, 천재의 불꽃은 사그라지고, 심지어 무예를 중시하는 마음도 희미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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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욕망 가운데 가장 위험하고 배타적인 것은 무엇일까? 바로 권력욕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만족을 위해 많은 사람의 복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법은 사문화(死文化)하는데, 그렇다고 인도주의가 그것을 대신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치열한 경쟁심, 승리에 의한 오만, 성공에 대한 갈망, 잊을 수 없는 원한, 미래의 위험에 대한 공포, 이 모든 것이 격정에 불을 붙이고, 자비의 목소리를 잠재운다.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동기에 의해 민중이 피를 흘리지 않았던 시대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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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탈자는 즉위하자마자, 그 대가로 병사들에게 막대한 상여금을 내렸는데, 그것은 원래 피폐한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것이었다. 아무리 고결한 인물이라도, 또는 아무리 숭고한 의도에서라 해도, 빼앗은 지위를 유지하려면 수탈과 폭거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몰락하면 휘하 군대와 속주도 함께 몰락했다.
--- p.162
로마법에서는 기만적이고 위협적인 고문(이렇게 강변했다)이 인정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용인되었다. 이 잔학한 고문 방법은 노예에게만 적용되었다. 오만한 공화국 시민들은 정의와 인도주의를 저울질할 때 천민들의 고통은 생각지 않았지만, 자유시민의 신성한 신체를 침해하는 데 대해서는 죄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 p.315
고트인은 모두 자유를 사랑했지만, 자유로워도 비참한 환경에서 삶을 마치는 것보다, 예속된 상태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쪽을 선택했다. 악랄한 것이라 치면 은인으로 가장한 자들의 횡포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은혜를 베푼 뒤 나중에 취소하고는 처음의 자선에 대한 보답은 꼬박꼬박 강요한다.
--- p.372
제국으로까지 팽창했던 한 도시의 융성은 매우 놀라운 일로서 철학자의 탐구심을 유혹할 만한 주제다. 그러나 그 쇠퇴의 원인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바로 비정상적인 팽창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번영이 쇠망의 스위치를 움직이자 쇠망의 요인이 정복의 확대와 함께 여러 가지로 늘어났다. 이윽고 시간과 사건에 의해 인공적인 기둥이 제거되자, 이 엄청난 구조물은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로마제국의 쇠망 과정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하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떻게 이다지도 오래 존속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 p.428
옛적과 오늘날 항해자들에 의한 발견 이야기나 개화한 나라들의 역사와 전승을 읽어 보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헐벗고 법과 예술은 물론 관념, 아니 거의 언어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야만인 이야기가 반드시 나온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동물을 길들이고 농사를 짓고 바다를 건너고 천체를 관측하게 되었다. 그러한 인간의 활동은 처음에는 발걸음이 불규칙하고 한없이 느리지만 그 뒤 가속도가 붙어 장족의 발전을 보이면서 상승한다.
그리고 정점에 도달하면 갑자기 다시 추락한다. 그렇게 세계의 다양한 지방이 빛과 어둠의 변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그 4000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불안을 떨치고 희망을 키워야 한다. 왜냐하면 인류가 어느 정도의 완전성을 지향해야 하는지 밝히는 것은 어렵다 해도, 자연이 완전히 뒤바뀌지 않는 한 어떠한 국민도 다시 원래의 야만적인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436
이러한 민중의 고질병은 수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지방의 각 도시에서도 두 파의 지지자가 각각 강력한 당파를 형성하여 서로 싸우며 지배체제의 취약한 기반을 뒤흔들었다. 격정에 휩쓸린 민중의 이 집요한 대립이 가장 심각했던 분야는 경제상의 이해관계와 종교상의 문제였다. 게다가 이 대립은 가정의 평화를 파괴하고 형제와 친구들도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또 종종 여성을 유혹하여 마음대로 농락하거나 남편을 배신하게 했다.
그야말로 옥석 구별 없이 법이라는 법은 모조리 무시된 것이다. 승자가 된 당파의 행동에서는 개인과 사회를 배려하는 모습은 눈곱만큼도 볼 수 없었다. 안티오키아에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방종의 극을 달린 그들의 모습은 ‘민주주의의 자유’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명예를 원하는 사람은 불문곡직하고 청색파 또는 녹색파, 어느 한쪽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 p.452
대도시의 몰락과 이어지는 약탈에 대해 기록할 경우, 역사가는 그 참상만을 되풀이해 얘기하게 마련이다. 같은 격정에서는 같은 사건이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한 격정이 무한정으로 허락되었을 때 문명인과 야만인의 차이는 없어진다. 편견과 증오에 뿌리를 둔 격렬한 항의 가운데, 이슬람교도가 그리스도교도의 피를 마음껏 흘렸다는 비난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실천 원칙, 즉 고대의 법칙으로 치면 피정복자의 목숨은 정복된 단계에서 잃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정복자는 합법적인 대가로서, 포로의 노역과 매각 등을 통해 재산을 얻는 것이 허용되었다.
---p.502~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