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속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며,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매우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가령 헬레네가 전남편 메넬라오스와의 결투에서 쩔쩔매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돌아온 파리스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한번 보자.
“그래서 당신은 싸움에서 돌아왔군요. 차라리 당신이 한때 내 남편이었던 그 용감한 사내의 손에 쓰러졌으면 좋았으련만. 당신은 맨손과 창으로 싸우면 메넬라오스보다 뛰어나다고 떠벌리곤 했죠. 그럼 가세요, 가서 그에게 다시 도전하세요―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그러지 말라고 권해야 하죠. 왜냐하면 당신이 어리석게도 그 사람과 일대일 결투에서 마주한다면 곧 그의 창날에 쓰러져 버릴 테니까요.”
전남편에게 왕창 깨지고 망신을 당한 채 돌아온 파리스를 못마땅해하면서도 금세 그렇다고 멍청하게 또 도전하지는 말라며 걱정하는 헬레네. 만약 이 대목에서 헬레네가 파리스를 마냥 비겁자로 조롱했다든가, 반대로 아무런 불평 없이 남편이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하기만 했다면 일차원적인 캐릭터로 남아 버렸을 것이다. 이렇듯 생생한 전투 장면이나, 고대인들의 일상에서 정말 있었을 법한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입체적 심리 묘사 등은 모두 『일리아스』를 고전 중의 고전으로 만드는 힘이다.
---「『일리아스』의 리얼리즘」중에서
그런데 이렇게 무슨 먹는 것도 아니고 무려 한 사람의 영혼을 놓고 장난치려 드는 메피스토펠레스는 대놓고 미워할 수만도 없는 악역이다. 심지어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악마, 파이팅!” 하고 응원하게 되는, 독자와 악역 캐릭터 사이에 스톡홀름 증후군 비슷한 심리까지 생길 지경이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가 곰곰 생각해 보면, 우선 메피스토펠레스는 비단 파우스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가려운 곳을 골라 팍팍 긁어 주는 존재다. 즉 우리가 한번은 생각해 봤음 직하지만 체면이나 주변 분위기 때문에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다. 그런 맥락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처음 접근했을 때 정체를 밝히라고 다그치는 파우스트에게 내놓는 답변이 일단 걸작이다.
파우스트: 그럼 너는 누구냐?
메피스토펠레스: 나는 항상 악을 탐하면서도 언제나 선을 행하는 힘의 일부입니다.
사기꾼이 스스로를 사기꾼이라고 소개하는 법은 없겠다. 하지만 역시 “나는 메피스토펠레스라고 합니다. 직업은 악마죠”라고 하는 것보다 위의 대답은 얼마나 시적인가? 그렇게 우리의 숨은 본성과 욕망에 호소하는 어두운 힘이 바로 악마의 특기인지 모른다.
---「악마, 파이팅!」중에서
셜록 홈스의 추리력과 관련하여 「실버 블레이즈의 모험」에 등장하는 “밤 시간 개에게 일어난 수상쩍은 상황(the curious incident of the dog in the night-time)” 또한 오랫동안 서구 지식인들의 사랑을 받아 온 표현이다. 추리력과 개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유명한 경주마 실버 블레이즈의 사육사가 살해된 사건을 조사하던 홈스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던 밤 마구간을 지키던 개가 짖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사건 관계자 가운데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홈스가 이 단서와 관련해 런던 경찰청에서 파견된 그레고리 경사와 나누는 대화를 잠깐 감상해 보자.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한 사항이라도 있나요?”
“밤 시간에 개에게 일어난 수상쩍은 상황을 생각해 보시죠.”
“밤에 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게 수상쩍다는 겁니다.” 홈스가 말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우리 한국의 옛 속담을 생각해 보자. 연기가 난다는 것은 불을 지피는 활동이라는 원인에 의한 결과다. 따라서 이 속담을 거꾸로 풀어 보면,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면 밑에서 불을 지피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다시 실버 블레이즈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개는 낯선 사람을 보면 짖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나던 밤 개가 짖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 대목부터 홈스의 추리력은 불붙기 시작한다.
---「셜록 홈스 시리즈-추리는 지적인 모험」중에서
『뜻대로 하세요』에는 숲 속으로 망명한 태공을 따라다니며 매번 중요한 순간에 썰렁한 대사를 읊어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썰렁맨’ 자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가 2막 7장에서 중얼거리는, “세계는 하나의 연극 무대(All the world’s a stage)”로 시작하는 독백 또한 셰익스피어 대사의 백미로 꼽힌다.
세계는 하나의 무대요,
모든 남녀는 배우일 뿐.
사람들은 저마다 퇴장과 등장이 있고,
살아가는 동안 여러 배역을
일곱 시절에 걸쳐 소화하죠.
이어서 그는 아기 역부터 시작되는 일곱 역할을 각각 묘사하는데, 학생, 연인, 군인을 거쳐 커리어와 허세를 좇는 중년과 장년의 배역을 소화하고 나면 끝으로 노년이 온다. 인간이 그 마지막 일곱 번째 배역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지 보자. 심히 우울하다.
이 이상하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끝맺는
최후의 장면은
두 번째의 철없는 아동기, 그리고 다만 망각뿐이죠,
이도 없이, 눈도 없이, 입맛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자크에 의하면 사람은 이렇게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7단계의 변신 연기를 시행하는데, 그래 봤자 결국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쯤 되면 썰렁맨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독한 허무주의자에 가깝다. 하지만 얼핏 『뜻대로 하세요』라는 코미디와는 맞지 않을 듯이 약간 터무니없는 이 자크라는 캐릭터는 묘하게도 작품 속에 이질적이지 않게 녹아들어 있다. 약간 맛이 떨떠름한 감초 역할이라고나 할까.
---「『뜻대로 하세요』, 엎치락뒤치락 사랑 이야기」중에서
피쿼드 호의 일등 항해사 스타벅(Starbuck) 역시 눈길을 끄는 인물이다. 작품에서 스타벅은 시간이 갈수록 에이해브 선장을 교주로 모시고 모비 딕 잡기를 사명으로 여기는 사이비 종교 집단 비슷하게 변해 가는 피쿼드 호 속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에이해브와 스타벅이 나누는 대화를 잠깐 보자.
“하지만 스타벅 군, 이 시무룩한 얼굴은 뭐지? 자네는 흰 고래를 쫓지 않을 건가? 모비 딕 사냥에 참여하지 않을 셈인가?”
“에이해브 선장, 만약 놈이 우리가 따라가는 항해 경로에 나타난다면야 나는 그놈의 사악한 턱주가리를, 아니 저승사자의 턱뼈라도 사냥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 고래를 잡으러 왔지, 내 지휘관의 복수를 위해서 온 게 아닙니다. 에이해브 선장, 설령 성공한다고 해도 당신의 그 복수심이 고래 기름을 도대체 몇 배럴이나 생산할까요? 낸터킷의 고래 기름 시장에서 큰돈을 벌지는 못할 겁니다.”
에이해브와 그 똘마니들의 으쌰으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스타벅. 하지만 비록 동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는지 몰라도 그의 이름은 『모비 딕』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보다도 더 현대인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 최고의 커피 브랜드라고 할 스타벅스(Starbucks)가 바로 그의 이름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회사 창립자들 중 한 명이 『모비 딕』의 광팬이라는 인연 덕분이었다.
---「허먼 멜빌과 『모비 딕』」중에서
보들레르는 인간의 내면을 이렇게 온갖 추잡한 맹수들로 상징되는 “악덕의 더러운 동물원”이라고 정의하더니, 다시 그 악덕 가운데서도 최악의 존재는 따로 있다고 진단한다. 그렇게 파괴력이 큰 악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놈’의 정체를 한번 보자. 격정에 넘치는 피날레, 시의 마지막 연이다.
권태!―눈물이라도 고인 듯한 젖은 눈으로,
놈은 담뱃대 물고 교수대를 꿈꾸지.
그대는 알리라, 독자여, 그 까다로운 괴물을,
위선의 독자여,―내 동류,―내 형제여!
원래 프랑스어이기도 한 ennui는 흔히 권태(boredom)로 해석되지만, 무료함, 따분함보다는 삶에 대한 의지나 정열 자체가 식은 보다 심각한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한번 여기에 빠지면 술, 마약, 도박 등의 보다 파멸적인 자극을 찾는 단계로 넘어가기 쉽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권태를 이토록 요주의 괴물로 묘사한 이유 역시 “교수대를 꿈꾸는”, 즉 인생을 한 방에 훅 가게 할 수 있는 파괴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선의 독자여,―내 동류,―내 형제여!”로 마무리되는 이 시 한 편에서 알 수 있듯이, 보들레르의 미덕은 무엇보다 그 솔직함과 화끈함에 있다. 시인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까발리는 것은 물론이요, 그렇게 하면서 독자에게도 어서 그 구질구질한 속내를 드러내고 발가벗으라고 다그친다. 보들레르의 시를 읽으면 마치 구정물에 몸을 담갔다가 나온 듯한 느낌과 함께 역설적으로 그 구정물로 깨끗하게 ‘씻김굿’을 당한 듯한, 일종의 뒤틀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보들레르와『악의 꽃』」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