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이런 구상은 성왕의 처지에서만 계산해본 달콤한 꿈이었다. 신라는 말할 것 없고 임나 소속국이나 왜까지 백제가 내놓은 계획에 달가워하지 않았다. 백제가 이런 계획을 세운 의도는 임나·왜에 신라까지 동맹으로 묶어놓고 백제가 조종하겠다는 뜻이다. 백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임나가, 백제가 원할 때마다 고구려와 분쟁에 화살받이나 되어주는 임나로 되돌아가라는 제의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왜 역시 백제가 통제하는 임나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백제-왜 관계가 우호적이라고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백제와 동등한 관계의 동맹을 맺어놓았던 신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백제가 주도하는 동맹체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그런 동맹체가 생기는 것부터가 달갑지 않다. 성왕은 이 과정에서 근초고왕 때와 달라진 상황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근초고왕 때는 임나와 왜의 전폭적인 협조 아래, 목라근자(木羅斤資) 같은 백제 요원이 현지에 상주하며 임나 요인들을 수시로 소집하여 현안을 논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백제가 원하는 사항을 반영하여 일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광개토왕의 임나가라 정벌로 백제-가야-왜를 잇는 협력 체제가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임나의 대표자들을 수도 사비로 불러들여 성왕이 이들을 상대로 직접 현안을 논의하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근초고왕 때와 달리 임나의 대표자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해주지도 않았다. 임나 한기들을 소집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자기 나라의 사소한 사정을 내세워 소집에 응하지 않는 수법이 통했던 것은 이런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왕은 이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 pp.33-34
위덕왕이 즉위한 해인 554년 10월에 고구려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해 왔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이 공략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침공 자체는 간략하게 마무리되었지만, 이 사건이 암시하는 바는 크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가 백제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3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며 붕괴해버린 것처럼 묘사한 것과 상반되는 사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를 감안하면 3만 병력이 전멸하는 희생을 치르고 나서 백제가 무사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도 백제는 곧바로 이어진 고구려의 공세를 쉽게 격퇴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몇 년 후 백제는 신라에 대한 침공을 재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백제군의 위기 상황은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p.53-54
이렇게 보면 의자왕 말년에 접어들며 백제의 정치가 어지러워졌다는 인식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우선 의자왕이 특별히 나라의 안정을 해칠 조치를 취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통상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합리성과 거리가 먼 현상들을 놓고, 백제의 정치가 실제로 어지러워졌다는 근거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수적인 시각을 고집하는 전문가들은, 백제가 의자왕의 고집 때문에 당과 외교에 실패하고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쇠약해져갔다고 보려 한다. 그렇지만 이 역시 납득할 만한 설명은 되지 못하는 듯하다. 즉위 초 의자왕은 자주 조공 사절을 보내면서 당과 관계를 다져나갔다. 당의 요구 때문에 애써 감행한 신라 침공을 포기하고 철수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배신을 당해 국가적 숙원 사업이던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에 빼앗긴 백제가, 자기 나라의 처지를 무시하고 무조건 화해를 요구하는 당의 요구를 밑도 끝도 없이 들어주어야 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사실 당시 백제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것처럼 신라에 한강 지역을 빼앗긴 채 위축되어가고 있던 나라가 아니었다. 일부 백제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의자왕 때 백제가 쇠약해지고 있었다는 인식을 심고 있으나, 실상 백제는 신라에 대해 주로 선제공격을 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신라의 반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김유신 위주로 반격에 나서고 있을 뿐, 양적·질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던 상황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실 신라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부터 적극 외교에 매진하여, 충돌을 빚던 고구려와 전통적으로 적대 성향이 강하던 왜에까지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교섭에 나섰을 정도였다. 결국 당의 구원을 요청하여 그 군사력을 끌어들인 것은, 신라가 직면해 있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