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란 무엇이던가? 새로워지고 싶다는 것, 허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어젯밤 자고 온 자리에는 다시 눕지 않겠다는 것, 새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것, 죽어서 다시 살겠다는 것,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것, 무덤같이 춥고 어두운 겨울이 잉태한 불타는 꿈이 아니라면!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무엇이던가? 밤이 다할 때마다 찾아오는 여명이 아니라면, 겨울이 끝날 때마다 펼쳐지는 봄이 아니라면, 숱한 꿈들이 만들어낸 현실이 아니라면, 모든 부정이 이끌어낸 긍정이 아니라면!
--- p.17
저항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간디의 비폭력적 저항에 종종 의심과 불만을 표하는 지젝이 간디가 폭력적이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간디는 아주 평화적인 방법을 택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폭력적”이었다는 것이다. 소금행진과 같은 불매운동, 납세거부운동 등이 그렇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가 겨냥한 것이 영국 식민지 정부의 모든 기능과 작동 전체”였기 때문이라 한다. 맞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간디의 비폭력은 폭력적이다. 지젝이 카드로 만든 집에서 카드 한 장 빼내는 것을 예로 들며 ‘진정한 빼기’라고 표현했던 이런 폭력, 이런 불복종, 이런 저항이 진정한 저항이고, 이런 저항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이 나아지고 진리가 구현된다는 것이 간디의 생각이었다.
--- p.79
예를 들면 밀로셰비치의 아내가 매일 머리에 조화(造花)를 꽂는 것을 풍자하기 위해 수십 마리 칠면조의 머리에 하얀 꽃을 꽂아 거리에 풀어놓았다. 그러자 밀로셰비치의 경찰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꽥꽥거리는 칠면조들을 잡으려고 바보처럼 뛰어다니다 넘어졌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시민들은 즐거워했고, 칠면조 뒤를 쫓는 경찰들은 전보다 덜 겁나는 존재가 됐다.” 시민들 중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전하려는 메시지는 뚜렷이 전해졌고 권력자들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 같은 유머와 웃음을 동반한 시위를 통해 오트포르는 2000년 드디어 독재자를 몰아내고 세르비아의 민주화를 일구어냈다. 참으로 ‘포스트모던한 빼기’가 아닌가!
--- p.83
‘그들’은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에서 “인간쓰레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쓰레기가 된 인간들”이라고 이름 붙인 잉여 또는 여분의 인간이다.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무능하다’ ‘무식하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판뿐 아니라 ‘게으르다’ ‘퇴폐적이다’ ‘위험하다’와 같은 도덕적 비난까지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또 ‘그들’은 아감벤이 고찰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 곧 모든 법적인 보호에서 제외된 ‘벌거벗은 생명(la nuda vita)’이 될 수도 있다.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끌려가고, 매 맞고, 갇히고,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 p.148
김선우: (……) 시가 사회를 바꿀 수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시가 사회 못 바꿔요. 시가 사회 못 바꿉니다. 시가 사회를 못 바꾸지만 선생님께서 아까 그런 말씀 하셨는데, 철학과 예술을 모른다고 해서 내일의 태양이 안 뜨는 게 아니에요. 철학과 예술을 모른다고 해서 일상이 주어지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철학과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주어진 하루의 일상이 엄청나게 풍부해져요. 충만해져요.
충만하게 일깨운 자기 자신의 에너지를 옆 사람과 나누면서 조금씩 행복해지고 끊임없이 뭔가를 변화시켜가는 실천들이 우리 일상을 반짝이게 하고 기쁘게 하게 하는 거잖아요. ‘혁명이야. 다 바뀌었어.’ 이런 세상, 시를 통해 절대 오지 않아요. 하지만 부추길 순 있어요. ‘야. 우리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거 아니니? 이게 사는 거야? 살아 있긴 한데 실은 죽어 있는 거 아니니?’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게 한다는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철학과 예술, 문학이 세상을 바꾸죠. 하드웨어를 바꿀 수 없다고 해서 패배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 p.223
뫼비우스 띠와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 모종의 전도가 들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순환적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 한번 갇히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나는 뫼비우스의 띠가 ‘이데올로기의 형식적 구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데 적합한 모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날 강연의 제목도 ‘이성의 등뼈’라고 정하고, 청중에게 뫼비우스의 띠를 보여주며 이데올로기를 ‘이성의 뫼비우스 띠’라고 소개했다. 이성의 산물인 이념과 사상들이―그것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린 형식을 취한 것이 이데올로기라는 뜻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성의 뫼비우스 띠’보다 ‘이성 안에 들어 있는 뫼비우스 띠’가, ‘이성의 등뼈’보다 ‘이성의 뒤틀린 등뼈’가 덜 매력적이긴 해도 더 정확한 표현이다.
--- p.308
“아니, 우리가 내내 이 나무 아래에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게 아까 그대로잖아요!”
“물론이지. 그럼 어디를 기대했는데?”
“글쎄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빨리 달리면 보통 다른 곳에 가 있거든요.”
“굼벵이 같은 나라구나. 여기선 보다시피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으면 적어도 이것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고!”
캐럴의 앨리스 시리즈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절묘하게 반영돼 있으면서도, 지적인 은유가 가득 찬 판타지와 영문학 특유의 뛰어난 유머가 효과적으로 어우러져 아동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그런데 나는 종종 이 작품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시각에서 읽어보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 p.319
김연수: (……) 어디서 그걸 직관적으로 깨달았는가 하면요. 입체 사진을 봤는데 두 개가 핀트가 안 맞잖아요? 다른 부분들이 존재하고 있죠. 그걸 렌즈로 들여다보면 두 상이 합쳐지면서 입체가 생기는 거죠. 약간 다르다는 것의 찝찝한 느낌, 이런 게 같아지면 모노로 딱 또렷하게 보일 텐데 하는 찝찝함을 놔두고 견디는 것 자체가 이 세계의 어떤 깊이를 주는 게 아닐까, 그때부터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분법 같은 거나 양자택일하는 문제들, 어릴 때 많이 물어보잖아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럴 때 대답을 하지 말자는 해결책을 발견하고 난 뒤에 알게 된 거예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걸 할 건가? 저걸 할 건가?’ 할 때 두 개 다 하는 게 정답이더라고요. ‘국제주의냐, 민주주의냐’라고 했을 때 같이 하는 대신에 찝찝함을 견디는 거죠. 한쪽이 깨끗해지는 건 없다는 거죠. 아까 생각하기에 그 견디는 게 남을 위해 참는 거잖아요? 싹 없어졌으면 좋겠는데 참는 것, 『한낮의 어둠』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던 배 밑의 짐, 그 윤리라는 것, 그렇게 꼴 보기 싫은 것들을 나한테 큰 해를 안 끼치는 한에서 참고 견뎌주는 것이 윤리가 아닐까라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 p.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