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귤을 겨울의 맛으로 정했다. 내친김에 가을의 맛도 정해보기로 했다. 가을의 맛은 어려웠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사과지만 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가을의 맛을 사과와 배로 결정했다. 여름의 맛을 정할 차례에 여경은 일어나 침대에서 전기장판을 끌어 내렸다. 엉덩이가 차가워서 여름의 맛을 생각할 수 없다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너의 봄은 맛있니』
색소에서 풍기는 강렬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우유와 달콤한 팥이 어우러지자 독특한 맛이 났다. 붉은색 색소는 체리, 노란색은 참외, 파란색은 멜론, 보라색은 포도였다. 도현과 나는 경쟁하듯 숟가락질을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도현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순간, 차가운 사이다 향이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뒤 도현이 입술을 떼며 처음이라고 속삭였다. 『너의 봄은 맛있니』
세탁소 여자의 늘어진 목이 우유처럼 희었다. 여자는 그 하얀 목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만약 정말로 흡혈귀가 존재한다면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리라. 소리 없이 다가가서 단번에 머리채를 휘어잡고 거침없이 송곳니를 박아 넣는다.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삶을 위하여. 『트란실바니아에서 온 사람』
여자는 시댁 주위에 둘러쳐진 높은 담을 떠올렸다. 알루미늄 캔을 팔아 지은 견고한 성. …… 여자는 가까스로 다리를 벌리고 섰다. 코트에서 시커먼 물방울이 떨어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Q의 집 이었다. 거기서 목을 길게 내밀어 Q와 같이 되어야 했다. 그 방법밖에 없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온 사람』
P는 내가 무언가를 검색할 때마다 동방삭을 운운하며 놀렸다. 나의 호기심이 동방삭 못지않다는 거였다. …… 18만 년 넘게 살면서도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 동방삭. …… 동방삭이 그 긴 시간 동안 호기심을 유지한 건 우연일까. 어쩌면 시간을 견디게 하는 건 호기심이 아닐까. 『〔+김마리 and 도시〕』
나는 검색창에 〔+그랑 주떼 and 사전〕이라고 적었다.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토슈즈, 새틴, 아교, 콜로이드, 졸, 겔, 그랑 주떼 같은 단어들을 되뇌어보았다. 문득, 그 단어들이 나와 주영에게 완전히 다른 의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영은 그 단어 하나하나에 추억이 실려 있을 터였다. 서로 공명하는 추억들의 세계.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존재했다. 『〔+김마리 and 도시〕』
『사과 견문록』에는 과수 재배용 사과나무의 경우 일부러 발육을 억제한다고 적혀 있었다. 나무 자체보다 사과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 사과나무에는 이파리도 별로 없었다. 이파리도 거의 없이 사과만 매달린 가지에 시멘트 덩어리가 한두 개씩 걸려 있었다. …… 속이 뒤틀렸다. 이런 식으로 생산한 사과를 내가 그토록 열광하며 먹어왔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사과』
거실이 비워질수록 그녀는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수첩을 펼쳤다. 남자들이 가지고 나가는 물건을 수첩에서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1’을 적기 시작했다. …… 그녀는 무언가 적고 싶었고, ‘-1’을 적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남자들이 물건을 나르는 동안 계속 ‘-1’을 적었다. …… 집 안은 아버지가 떠나기 전과 똑같아졌다. 그녀는 수첩을 품에 안은 채 어머니를 기다렸다. 『아 유 오케이?』
거실에는 …… 불가리의 콰드라토 848 선글라스, 구찌의 멀티컬러 스트라이프 니트 드레스, 프라다의 스팽글 볼 귀걸이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걸 보면 뭐라고 할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수첩에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아버지에게 보내는 긴 편지였다. 제일 첫 줄은 루이비통 모노그램 멀티 컬러 알마 백으로 해야 할 것이었다. 『아 유 오케이?』
래인이 여자 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잘 들어. 이건 네 인생에서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야. 나랑 같이 떠나자. 서유럽 해안에 있는 크르니나탄으로. 그 나라는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지면 안 되는 곳이야. 세계의 부호들은 거기에 하렘을 가지고 있어. 하렘 알지? 부인들이 모여 사는 곳. …… 그들은 여자를 수집하는 거야. 여권도 필요 없어. 전용기를 타고 떠나면 돼. 몸매 관리는 물론이고, 그곳에 가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어. 다이아몬드, 모피, 루비, 멋진 저택, 유명 디자이너의 드레스, 근사한 식사……. 『블루 테일』
‘에르고 숨’에는 수백 개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 대부분은 아버지가 골드 리트리버로 변한 것 같아요, 언니가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우산으로 변했어요, 어머니가 토마토로 변했나 봐요, 할머니가 20년 된 샤넬 재킷으로 변한 것 같아요, 할머니가 튤립으로 변했다며 할아버지가 그 앞을 떠나지 않으시네요, 아버지가 택시로 변한 것 같습니다! 등의 제목이 이어졌다. 『카프카 신드롬』
새벽에 운전자 없이 돌아다니는 택시들이 많아요. …… 운전을 오래 한 기사들이 택시와 합체를 한 거죠. 어쩌면 물건의 삶이 더 나은지도 몰라요. …… 돈 벌려고 아등바등 애쓰지도 않아도 되고, 결혼이나 육아 같은 것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정말 편한 삶이잖아요. 저는 물건이 되고 싶어요. 디자인이 잘된 구두가 좋을 것 같아요. …… 아니면 아버지처럼 택시로 변해서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카프카 신드롬』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고 속삭였다. “아이를 갖고 싶어. 일어나줘. 꽃들아.” 너른 꽃밭에 피어 있는 푸른 꽃, 하얀 꽃, 붉은 꽃, 검은 꽃, 누른 꽃이 잠잠했다.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여자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시 말했다. “용감한 아기든, 슬기로운 아기든, 복 많은 아기든, 수명이 긴 아기든, 예쁜 아기든, 상관없어. 일어나줘!” 하지만 꽃들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천꽃밭 꽃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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