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도(助藥島=藥山島)에서 태어남. 현대문학 추천(오영수 推薦). 월간문학 신인상. 세계의문학 중편 『난동(暖冬)』(유종호 推選)으로 작품 활동. 제1회 채만식문학상 수상.
작품 활동 창작집: 『수평인간』 『장군과 소리꾼』 『진경산수』 중편집: 『반쪽거울과 족집게』 『백갈래 강물이 바다를 이룬다』 장편소설: 『숨겨진 햇살』 『높은 곳 낮은 사람들』 『만남, 그 열정의 빛깔』 『여인의 새벽』(전5권) 『해인을 찾아서』(대산창작지원금 수혜) 『토굴』 『천년의 찻씨 한 알』(문예진흥기금 수혜) 『삼겹살』(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 『감꽃 떨어질 때』(세종우수도서 선정, 전주영화제 작품 선정) 『남도』(전 5권) 현재 한실 작가의 집에서 자연과 벗하며 세상을 가꾸다.
뱃고동이 울리며 연안연락선이 뱃머리를 돌리자 삐죽갈네는 손을 흔들었다. 백상도 명상과 삐죽갈네에게 손을 흔들었다. 점점 종선이 멀어지고 상가마니산이 먼빛으로 나앉았다. 바다에 떠있는 고향의 자태가 꿈꾸는 소라 껍질처럼 아름다웠다. 왜 이렇듯 맑고 순결하기까지 한 섬이 삶의 터전으로 풍요로움을 드리우지 못하고 메말라 가는 걸까?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바다는 말없이 흉년을 이겨나게 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풍요로움이 고갈되어 가다니. 섬사람들은 그저 바다를 내려다보며 한숨짓고 있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노략질해 가기라도 하였단 말인가. 씨알을 남기지 않은 무지막지한 남획. 가만히 바다만 내려다보며 맹목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니, 다시금 풍요를 누릴 발전적이고도, 진일보한 개선책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명상이 또래의 젊은 청년들이 그 사명감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버팀목임을 포기한 채 도시로 떠나고자 한다. 어쩔 수 없는 시류의 물결인가. --- p.36
한민서는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양식장을 만들어 부락 공동체의 살림 밑천으로 삼았고, 두레의식을 고취시켰다. 지금에 이르러 양식장이 있기에 풍족함을 누린다. 그뿐만 아니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도 염려하였다. 그때는 한우균도 마음 깊이 새겨듣지 않았는데, 오늘의 유신선포까지 한민서의 우려가 그대로 묻어난 것이다. 백성들에게 언제까지 침묵을 강요하고, 재갈을 물린다면 그 만큼 평등한 사회, 진정한 민주주의는 요원한 것이다. “아직도 옛날의 고전적인 추억 어린 향수를 지니고 계십니다.” “고전적인 향수가 아니다. 시간의 무게와 세상의 부피가 다를 뿐, 내면을 들여다보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반공이데올로기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느냐. 느그 아부지의 그늘에서 온전히 벗어 날 수 있겠냐? 알게 모르게 느그 아부지로 인해 핍박을 받고 행동의 부자유를 느끼지 않느냐. 그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민족자주를 외치고, 군부독재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에 항거하는 잠재의식은 어디서 온 것이냐?” “누가 들으면 잡혀가기 딱 알맞겠습니다.” --- p.120
대문을 들어선 백상을 낯선 여인이 수줍게 머리를 숙이며 맞아들였다. 백상은 잠시 당황하였다. 직감적으로 집안에 변화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천네 어멈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젊은 새색시라? “안으로 드시지요.” 대청마루 앞에 엉거주춤 서있는 백상에게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머님은 어디 가셨나 보죠?” “방죽재 너머 밭에 나가셨구만요.” “잠깐 큰집에 다녀오겠습니다.” 백상은 분위기가 그저 어색하기만 하여 배낭을 내려놓고서 마을 고샅길을 올랐다. 종가에 들어서자 도암네가 이제 방금 들에서 돌아온 듯 머리 수건으로 옷자락을 털고 있었다. “아이고, 내 새끼 왔네! 어디 있다 소식 한 장 없이 온다냐?” 도암네는 깜짝 반겼다. 학재가 없는 종가는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기운이 돌았다. 어린 조카들은 백상을 낯설어 하였으며, 예분례는 보이지 않았다. “형수님은요?” 백상은 조금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바다에 나갔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센 줄 모른다고, 낙지 잡는 솜씨가 학수네 이상이다. 어여, 들어가자.” --- p.244
봉분이 다 될 때까지 지켜보고 있더니만 나의 손을 가만히 잡더군. 난감할 수밖에 없었소. 우리 딸년 소식 들어보는가? 자네 주위에서 술장사를 한다는디, 몹쓸 것. 곁에서 잘 좀 지켜주게나. 내 잘못이 컸네.자네에게도 할 말이 없고. 더구나 돌아가신 자네 선친이야말로 진정한 항일농민운동가요, 올곧은 사상가였네. 시절이 우리를 얄궂게 만들었어. 날 용서해 주겠는가? 노인의 갑작스런 말에 용무는 얼떨떨하였다. 용서랄 게 있겠습니까.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요. 고맙네. 저기 묻힌 쪼깐이 아범도 어떻게 보면 시대의 희생양이랄 수 있네. 우리 모두의 잘못이네. 용무는 그런 노인에게 술을 처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