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친척들 결혼식에서 만나는 이모나 고모들이, 오랜만에 동창회에서 얼굴 본 결혼한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그런 소리를 늘어놓았다. “네가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래. 임자를 만나야 결혼하지.” 그러니까 자기들은 그 임자를 만나서 결혼에 골인을 했다는 표정들인데 진짜 가관이다.--- p.48
“인수오빠 이번 선, 조건이 좋대. 저쪽에서도 좋다고 하니까 그 오빠 복 터졌지, 뭐.” “촐싹대지 좀 마라. 식장에 들어가기 전 까진 모르는 거야.” 엄마가 프라이팬을 탕탕 두드리며 한소리 했다. 엄마는 그 동안 인수 엄마와 통상 3번의 자존심 싸움을 벌였다.
1차전. 대학 : 난 서울의 4년제 대학, 인수는 K대 법대---1패. 2차전. 예전직업: 난 의류회사, 인수는 고시 준비생---1승. 3차전. 현재직업: 난 쇼핑몰운영, 인수는 검사시보---1무. 통상전적----1승 1무 1패.
이제 마지막 남은 게 나와 인수의 결혼이었다. 만일 나보다 인수가 먼저 식장에 들어간다면 엄마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p.54
“굳이 붙이자면 스테인리스가 낫겠다.” “네? 스테인리스요?” 모두의 눈길이 내게로 쏠렸다. “응. 여길 한 번 둘러봐. 이 테이블만 봐도 포크, 수저, 냄비, 다 뭘로 만들었니?” “스테인리스요.” “그럼 우리 생활에 골드, 실버, 브론즈가 쓸모 있겠니? 스테인리스가 더 쓸모 있겠니?” “당근 스테인리스죠.” 수미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남들이 멋대로 부르는 골드미스 보단 그냥 실속 있는 대로 사는 스테인리스 우먼이 될란다.” “오호 그거 멋지다.” “역시.” 진희가 외쳤다. “스테인리스 우먼을 위하여!”--- p.67
엄마가 자꾸 성화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내 사정은 아니다. 몇 년 동안 고생고생해서 이제 매출도 오르고 일하는 재미도 쏠쏠해지고 있다. 거기다 뭔가 이뤄간다는 자신감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걸 접고 누가 결혼을 하겠는가. 더구나 인수처럼 조건 따지며 하는 결혼은 더더욱 생각이 없다. 하지만? 거실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똑딱똑딱 돌아가는 시계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폭탄을 만나서 그런 걸까, 아님 인수가 곧 결혼한다는 얘길 들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보라가 애인과 함께 속초에서 밀월여행을 즐기고 있어서 그런 걸까. 소파에서 몸을 뒤집어 납작 엎드렸다. 쓸쓸하고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등을 따라 기어 내려왔다. 다시 옆으로 돌아누웠다. 소파가 몸에 짓눌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냈다. 눈길이 천장을 따라 배회하다가 할일 없이 벽의 모서리를 따라 맴돌았다. 시계를 보았다. 고작 5분이 흘러갔을 따름이었다. 오늘따라 시간은 더디고 잠은 오지 않고 맥주도 미지근했다. 허전하고 고적하다. 이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쓸쓸함만 채울 수 있다면 뭐든지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 p.82
커피 향이 빗소리 사이로 달콤 쌉싸래하게 퍼져나갔다. 이런 날 옥상에 올라와 본 것도 파라솔 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처음이었다.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뭐랄까. 낭만의 발견이라고 할까. 낭만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언제든 자기를 불러주기를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옥상 귀퉁이의 빗물 통이 콸콸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중략) 비오는 밤 옥상에서 마시는 커피는 색다르고 특별했다. 커다란 파라솔을 들고 잠자코 서서 빗소리를 듣고 있는 원준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닫고 있었다. 원준과 함께 있는 시간을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건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것도. --- p.197
“그래 나 나이 많아. 아직 시집도 못 갔고 변변한 애인도 없어. 그게 왜? 그게 무슨 잘못이라고 이렇게 난리야? 그래도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잘 살고 있거든. 근데 왜 시비야? 너도 지금 내가 나이 많다고 우습게 보는 거야, 뭐야? 내가 나이 많은 거 빼고 너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있으면 어디 말해봐? 어서 말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