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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목적 사유의 탄생

[ 개정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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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2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400g | 128*188*30mm
ISBN13 9788992055574
ISBN10 899205557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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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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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었던 유형의 소설이나 영화는 아마도 여성의 불행을 묘사한 작품들일 것 같다. 고단한 20세기를 남성들보다 몇 갑절 더 고단하게 보낸 여성들의 애환이 펼쳐지곤 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장편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다.
이 소설에서 우선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그리고 있는 서구 사회의 모습이었다. ‘근대화’에 일로매진하던 당대 분위기에서 서구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 삶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목로주점』은 나로 하여금 서구를 전혀 다른 눈길로 보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민중들/노동자들이 살아가는 거리는 내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서울의 거리들과 흡사했다. 또한 제르베즈가 딸을 낳고서 실망하는 광경은 서구에도 남존여비 사상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었고, 로리외 부인과 르라 부인이 남자아이를 낳으려면 침대의 머리 방향을 북쪽으로 놓아야 한다는 둥하고 말다툼하는 모습은 서구의 대중들 역시 주술에 사로잡혀 산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또 꾸포가 내뱉는 “신부란 작자들과는 가까이 상대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법이다” 같은 말은 서구는 으레 기독교적 분위기에 젖어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도 깨주었다.
---「문학과 더불어 「생의 애환」 」중에서

유비에 대해 줄곧 내려온 호평은 ‘촉 정통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한실 부흥’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다는 것, 유교적 덕목인 인의 체현자였다는 것에다 약한 자를 동정하는 대중심리가 겹쳐, 촉 정통론이 이루어졌다 하겠다. 이런 관점은 유교 부흥과 중원 회복의 기치를 내건 송대에 굳어져 원을 거쳐 명대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비의 음험함을 세세히 지적하면서 혹평한 왕부지 같은 인물도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유비가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 또는 위선적이고 교활한 인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 조조는 『삼국지』가 창조한 가장 복잡미묘한 인물이며, 그만큼 다재다능한 인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한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지식인이었고, 건축이나 기계공학에도 뛰어나 여러 궁전들 및 기계들을 직접 설계했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작곡까지 했다고 하며, 서예 또한 출중했고, 예리한 상황 판단력과 포용력, 특유의 재치와 익살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젊은 시절에는 한실에 대한 굳은 충정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환관의 손자라는 ‘출신’과 빼어난 ‘재능’ 사이에 존재하는 엇박자는 그를 교활하게 만들었다.
---「문학과 더불어 「역사 속의 군상들」」중에서

하나의 삶, 하나의 세계, 하나의 상황이 극에 달하면 그 삶, 세계, 상황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거나 어떤 식으로든 탈주가 발생하게 된다. 『변신』의 그레고르의 상황이 그렇다. “아아, 이렇게도 힘든 직업을 택하다니. 이 일은 회사에서 하는 실질적인 일보다 훨씬 더 신경을 자극시킨다. 식사는 불규칙적이면서 나쁘고, 대하는 사람들은 항상 바뀌고 따라서 그들과의 인간관계는 절대로 지속적일 수 없으며 또한 진실한 것일 수도 없다. 이 모든 걸 악마가 가져갔으면!” 그레고르의 이런 상황은 현대의 직장인 모두의 상황이며 따라서 변신 또한 일반적인 상황이다. 열심히 일해봤자 빚 갚는 데 급급하고, 늘 시간에 쫓겨 시계를 쳐다보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 메마른 인간관계에 황폐한 가슴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현대인. 그런 현대인의 상황의 극한에서 변신이 발생한다.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할 때면 늘 장자의 변신(化而爲鳥)을 생각하게 된다. 암울하고 극한적인 카프카의 변신과 호방하고 초연한 장자의 변신.
---「문학과 더불어 「인간의 심연」 」중에서

『부분과 전체』는 20세기 초 과학계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 나누었던 대화들을 기록하면서 양자역학이 탄생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이 생각했던 것은 ‘아낭케’ 개념이다. 자연에 대한 합리적?수학적 사유를 펼쳤던 플라톤은 그러나 자연 속에 존재하는 비결정성에 예민하게 주목한다. 플라톤은 이 대목을 비유를 써서 설명하고 있는데, 누스〔이성〕가 멋대로 굴려는 아낭케를 잘 달래서 우주를 이끌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모종의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불확정성 원리를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전 역학에 근거한 결정론을 생각해봐야 한다. 고전 역학의 체계에서는 한 물체의 위치(x)와 운동량(질량×속도, p=mv)을 동시에 알면 그 물체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물체들에 대해 그 위치와 운동량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우주 전체의 운행을 예측할 수 있다는 ‘라플라스적 결정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과학의 세계 「물질의 심층」」중에서

생명체의 동일성은 A=A와 같은 논리적 동일성도, 시간 속에서 해체되어가는 물질적 동일성도, 또 인간의 작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문화적 동일성도 아니다. 생명체의 동일성은 차이들을 보듬으면서 점차 복잡해지는 동일성이다. 생명체가 자신의 동일성을 계속 바꾸어 나가지 못하는 경우는 그것이 이미 죽은 경우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체의 이런 특성을 “엔트로피의 사면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노력”이라고 말한다.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생각을 보다 과학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생명체에게 중요한 것은 차이들의 흐름 속에서 와해되지 않고 그 흐름들을 보듬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동일성을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진화의 과정 전체를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과학의 세계 「끝없는 회로들의 주름」」중에서

1980년에 나는 대학 2학년생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의 등장이 있었고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는 데모의 전당이었다. 교문 앞에서 시위하다가 ‘지랄탄’이 터지면 뒤로 빠져서 달려갔다가 다시 교문으로 달려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와중에 계급투쟁으로서의 역사에 눈떴던 것 같다.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나도 맑시즘 역사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맑스의 전기 저작들이 철학적?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후기 저작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 『자본론』은 그 결정판이며 특히 ‘잉여가치’의 개념은 그의 경제학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다. 『자본론』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인식을 얻을 수 있다. 맑시즘 경제학은 경제학 자체로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 윤리학, 정치학 등과 결합해서 맑시즘 철학이라는 보다 거대한 사유 체계의 한 고리를 형성한다. 바로 이 때문에 주류 경제학과 맑시즘 경제학을 같은 지평에 놓고서 비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과학의 세계 「계급투쟁의 역사와 정치경제학」」중에서

『철학적 탐구』는 처음 읽으면 묘한 느낌이 든다.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철학책’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 물리학책을 집어들었을 때 거기에 수식과 그래프가 하나도 없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될 것이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가 어떤 분야의 책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미지가 있다. 철학책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이미지는 고도의 추상성, 복잡한 개념들, 서울의 논리성과 정치함 등일 것이다. 아마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같은 책들이 가장 전형적인 철학책들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적 탐구』는 우리의 이런 선입견을 뒤집는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언어에 관한 책이다. 논의되는 문제들은 분명 언어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나 서술이 지극히 평이하며 철학사를 가득 메우고 있는 전문 용어들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논리 전개도 얼핏 보면 그다지 치밀하지 않다. 그런데도 거기에 담겨 있는 사유는 심오하다.
---「철학 마을 가로지르기 「최초의 텍스트들」」중에서

내가 다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근대성의 말류인 천민자본주의가 아닌, 우리 문화 속에서 형성되었고 근대성의 씨앗을 뿌렸으나 불행하게도 꽃피지 못한 어떤 사유로 회귀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자생적 근대성’이라 부른다.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내적 역부족과 외적 강압 때문에 좌절되고야 만 사유로 돌아가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세기 조선에서 나는 세 사유를 발견했다. 다산, 혜강, 그리고 동학. 나는 특히 다산의 ‘도덕적 주체의 탄생’에 관심을 갖고 『논어고금주』『맹자요의』『중용자잠』 등을 주로 보았다.
다산이 세우고자 했던 도덕적 주체의 이념은 성리학의 본질주의를 거부하고 현실적인 노력을 통해서 점차 자신을 완성해가는 주체의 이념이다. 그러나 이 주체의 힘은 본격적으로 시험에 부쳐지기도 전에 외부의 힘에 의해 차단되어버렸다.
---「철학 마을 가로지르기 「전통, 근대, 탈근대」」중에서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는 내게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푸코도 “위대한 책들 중의 위대한 책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철학의 역사에 솟아오른 드높은 준봉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들에 속하는 걸작들이라고 생각된다. 『차이와 반복』이 세계의 심층을 다룬다면, 『의미의 논리』는 표층을 다룬다. 즉 전자가 잠재성의 세계를 다룬다면, 후자는 현실성의 세계를 다룬다. 나에게 『차이와 반복』은 기氣의 사유로, 『의미의 논리』는 역易의 사유로 다가왔다. 세계의 잠재성은 기이고 기화의 결과로서의 생성이 역이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이 칸트카 물자체로서 남겨놓은 차원에 대한 심오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면, 『의미의 논리』는 현상계에 대한 참신한 사유를 새롭게 개념화하고 있다.
---「철학 마을 가로지르기 「존재론의 구상」」중에서

문학책들을 읽으면서 인간과 인생을 깊숙이 반추할 수 있었다. 그후 과학책들을 읽으면서 물질, 생명, 문화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식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사유 능력을 얻었다. 그 많은 책들이 내 마음에 심어준 여러 생각들, 지식들이 없었다면 삶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을까.
새 책을 구입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들 중 하나이다. 나는 책장을 넘기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내 영혼과 사유에 영향을 끼칠 글들을 발견한다. 내가 쓰는 글들에는 어느새 그런 글들의 흔적이 묻어 나온다. 책을 통해서 내 영혼은 다른 영혼들을 만난다. 그들과 대화한다.
---「에필로그 「끝없이 이어지는 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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