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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1

생각의 역사 1

: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 양장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동 생각의 역사이동
리뷰 총점9.4 리뷰 11건 | 판매지수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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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7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240쪽 | 1721g | 153*224*60mm
ISBN13 9788975278365
ISBN10 897527836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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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에 죽었다. 1962년 옥스퍼드 사상사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예일 대학교에서 연속 강의를 했다. 나중에 책으로 출판된 이 강의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여파로 그리스에서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16년쯤 뒤에 에피쿠로스가 아테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 뒤로 키프로스 키티온 출신의 페니키아 사람인 제논이 왔다. 몇 년이 지나자 두 사람의 학교는 아테네 최고의 철학 학교가 되었다. 마치 갑자기 정치철학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듯했다. 도시 자체는 달라진 게 없었다. 시민들은 여전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교육을 받았다. …… 사회적?공적 성취의 관념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불과 20년 만에 위계 대신 평등이 자리 잡았고, 전문가의 권위를 강조하는 대신 누구나 똑같이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고 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지적 재능을 강조하는 대신 …… 의지, 도덕, 품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외적 생활 대신 내적 생활, 정치적 헌신 대신 …… 개인적 자족, 금욕적인 삶의 찬미, 의무에 대한 청교도적인 강조의 관념이 싹텄다. …… 최고의 가치는 마음의 평화, 개인적 구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길은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을 안다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친 것처럼) 과학적 지식이 점차 증대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 순간적인 전환, 내적인 빛이 번쩍여야만 가능하다. 모든 사람은 전환한 자와 전환하지 않은 자로 구분된다.”
벌린은 이것이 서양 정치 이론의 세 가지 중대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 개인주의의 탄생이라고 말한다(나머지 두 가지는 곧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 고전시대에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로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철학자, 극작가, 역사학자 모두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은 폴리스의 제도화된 삶”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다. 『정치학Politica』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시민이 자기 혼자 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모두가 폴리스에 속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개인은 폴리스의 일부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다르다. “인간이 시민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데 적응한 것은 천성이 아니다.” 그 자체로 목적을 이루는 것은 개인적 행복뿐이다. 정의, 의무, 투표는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 자립이 가장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도 제논을 좇아 아파테이아apatheia, 즉 무심을 추구했다. 그들은 무감각하고 냉담하고 초연한 태도를 이상적으로 여겼다. “인간은 수레에 묶인 개와 같다. 현명하다면 수레와 달릴 것이다.” 스토아 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제논은 다른 곳을 볼 게 아니라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피시스, 즉 자연의 법칙 이외에 어떤 법칙도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 사회는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자족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물이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성적 난교, 동성애, 근친상간, 인육을 먹는 행위까지 극단적인 사회적 자유를 옹호했다. 인간의 법칙은 비합리적이며, “결코 현인에게 미치지 못한다.”
벌린은 이런 사상적 결별의 결과가 대단히 크다고 보았다. “최초로 정치란 현인과 선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추잡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싹텄다. 윤리와 정치의 구분이 확연해졌다. …… 공적 질서만이 아니라 개인적 구원이 무척 중요해졌다.”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이 변화가 일어난 원인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많은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자 폴리스의 비중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벌린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오래고 익숙한 도시국가들이 사라지고 방대한 제국이 들어서자 개인적 구원에 대한 관심이 부각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침잠했다.
여기서 벌린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모든 과정이 너무 빠르다. 게다가 기존의 폴리스들을 알렉산드로스가 파괴했다기보다는 새로운 폴리스들이 생겨났다고 봐야 한다. 그 대신 벌린은 새로운 관념의 기원을 기원전 5세기 말의 소피스트인 안티폰과 진정으로 자립적인 인간만이 자유로우며 “자유만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 폴리스 체제에 반대한 디오게네스에게서 찾았다. 인간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사생활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본성을 따라야만 행복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벌린은 이것이 오리엔트에서 수입된 관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제논이 페니키아의 식민지인 키프로스 출신이고, 디오게네스가 바빌론 출신이며, 그밖에 시돈, 시리아, 보스포루스 출신들 가운데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럴듯한 추측이다. (“옛 그리스에는 스토아 철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기원이야 어떻든 생각의 혁명은 다섯 가지 핵심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정치와 윤리가 결별했다. “자연적 단위는 이제 집단이 아니라 …… 개인이다. 개인의 욕구, 의도, 해결책, 운명이 중요하다.” 둘째, 참된 삶은 내적인 삶이고 외적인 삶은 가치가 없다. 셋째, 윤리는 개인의 윤리다. 윤리는 이제 사생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하며, 지금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자유라는 관념으로 이어져야 한다. 국가로서는 이 장벽을 넘어설 수 없다. 넷째, 정치는 진정으로 유능한 사람에게는 하찮은 문제로 전락했다. 다섯째, 사람들 간의 공통적 유대가 있고 삶의 통합이 가능하다는 견해와 모든 사람이 고독한 섬이라는 견해 사이에 근본적인 구분이 생겨났다. 이 점은 향후 사람들 사이에 중대한 정치적 차이를 낳게 된다. --- 6장 「과학, 철학, 인문학의 기원」 중에서

마호메트의 시대까지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주장했듯이 새 신앙은 바깥으로 뻗어나가야 했다. “이슬람은 피의 종교가 아니라 믿음의 종교다.” 이것은 아랍인들에게 새로운 관념이었으나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불과 100년 만에 이슬람교는 동쪽으로 인도, 서쪽으로 대서양, 남쪽으로 아프리카 한복판, 북쪽으로 비잔티움에 이르기까지 권역을 넓혔다. 그 매력의 일부는 종교적 확신이었다. 초기에 이슬람교는 예전의 계시 형태(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용인하는 관용적인 종교였다. 또 한 가지 매력은 대단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비잔티움 제국보다 부과하는 세금이 적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팽창할 수 있었던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호메트가 죽자 새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의 측근들은 초기 개종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부 바크르를 낙점했다. 그는 자신의 칭호로 칼리파Khalifa를 선택했는데, 이 말은 계승자 혹은 대리자를 뜻하는 아랍어였다. 여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마호메트를 대리/계승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신을 대리/계승한다는 뜻일까? 아부 바크르의 진의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렇게 성립된 칼리프 제도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칼리프는 세습제가 아니었다(묘하게도 코란에는 후계에 관한 지침이 없다). 흔히 정통 칼리프라고 불리는 초기 네 명의 칼리프는 세습된 게 아니라 현대의 이슬람교도들이 라시둔Rashidun, 즉 ‘적법한 자’라는 호칭을 붙인 것뿐이다. 그 가운데 초대 칼리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암살되었으나 그들의 치세는 대체로 황금시대로 간주된다. 그러나 4대 칼리프인 알리는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사촌이었으며, 이슬람 이전 시대의 전통으로 복귀하고자 했다. 여러 차례의 암살을 목격한 신도들은 예언자의 친척이라면 마호메트에 가까운 영도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알리의 추종자들은 알리, 시아투, 즉 알리의 당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알리라는 명칭이 떨어져나가 시아Shi'a만 남았다. 훗날 이 시아파는 커다란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되지만 당시는 알리가 암살되는 바람에 힘을 잃었다. 뒤이어 벌어진 이슬람 내전의 승자는 시리아 속주 총독이자 우마이야의 메카 가문 출신인 무아위야Mu'awiya였다. 이 사건을 기화로 이슬람 세력은 또 한 단계 발전했다. 거의 한 세기 만에 칼리프는 우마이야 왕조에서 세습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통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 우마이야 이전은 ‘적법한 자’의 시대였고, 우마이야 이후는 이슬람 지배권이 “신의 승인을 받은” 칼리프들에게 넘어간 시대였다. 이것은 이슬람권에 커다란 분할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아파는 신의 권리에 의해 칼리프가 마호메트의 혈통에 속한다는 견해를 유지했으며, 이를 근거로 680년에 알리의 아들이자 마호메트의 외손자인 후세인은 우마이야 왕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패주하고 말았는데, 전설에 따르면 단 한 명의 계승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났다. 시아파는 칼리프가 마호메트의 혈통에게 돌아가야 하며, 코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우마이야 왕조가 후세인에게 승리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대단히 기민한 정치 지도자들이었다(그들의 제국은 인도, 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까지 팽창했다). 또한 그들은 웅장한 건축물을 지었고 학문을 장려했다. 여기에는 아브드 알말리크Abd al-Malik(685~705)와 그의 계승자인 히샴Hisham(724~743)의 공로가 컸다. 히샴의 치세에 아랍어는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를 누르고 공식 행정 언어가 되었으며, 로마와 비잔티움의 주화가 아라비아 주화로 대체되었다. 특히 예루살렘에 세워진 바위돔 사원과 그 옆의 아크사 모스크는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종교 건물 단지”로 불린다. 이슬람이 세계적 문명으로 발돋움한 전환점이었다.
또한 우마이야 왕조의 시대에 아라비아 최초의 학문 중심지들이 생겨났다. 알바스라와 알쿠파가 그런 곳들이다. 바로 여기서 최초의 문법서와 사전이 편찬되고 아랍어가 체계적으로 연구되었다. 하디스hadith의 전통이 성장한 곳도 여기다. 하디스란 원래 ‘전통’이라는 뜻이지만 더 구체적인 의미도 있다. 마호메트나 그의 주요 측근이 한 행위와 말을 가리킨다. 하디스는 코란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졌으며, 이슬람 신학과 피크fiqh(법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코란은 알라의 말씀이고 하디스는 마호메트의 말씀이다. 하디스에서는 의미만이 영감을 담고 있으며, 코란에서는 의미와 말이 모두 영감을 담고 있다. --- 12장 「바그다드와 톨레도의 팔사파와 알자브르」 중에서

신앙과 이성이 통합될 수 있다는 토마스의 강력한 믿음은 처음에 교회의 비난을 받았다가 나중에는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투스처럼 그도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같은 시대 파리에 살았던 브라방의 시제Siger de Brabant는 철학과 신앙이 화해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성과 과학의 영역은 어떤 의미에서 신학의 범위 바깥에 있어야만 한다.” 한동안 이 문제는 ‘이중 진리’의 개념으로 ‘해결’되었다. 교회는 이런 상태를 인정하지 않았고, 전통적 신학자와 과학적 사상가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했다. 독립적인 성향을 지닌 과학자/철학자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이성을 통한 탐구를 계속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리스도교를 융합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환골탈태할 수 있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리스도교화하고자 했으나 결과는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아리스토텔레스화한 격이었다. 세속적 사고방식이 세계에 도입된 결과 인간의 이해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 점은 이 책의 다음 대목과 연관된 주제다.
과학적 방법, 정확한 측정, 효과적이고 지적으로 통합된 세속 세계. 서양의 근대를 어떻게 정의한다 해도 이런 것들이 근본 요소로 포함된다. 그보다 덜 구체적이지만 더 흥미로운 관념은 1050년부터 1200년까지의 어느 시점에 유럽에서 기본적인 심리적 변화, 개인성의 한 형태가 탄생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의 심성을 나타내며,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서양이 모든 면에서 앞서간 원인을 설명한다. 만약 개인성이 진정한 원인이라면, 다른 모든 진보들―과학, 학문, 엄밀함, 세속화 등―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가 된다.
이런 감성의 변화를 이끈 것은 주로 세 가지다. 첫째는 도시의 발달이다. 이로 인해 교회 바깥의 다른 직업들, 이를테면 법률가, 서기, 교사 등이 생겨났다. 갑자기 전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둘째는 토지 소유관계의 변화다. 장자상속권으로 향하는 추세가 강화되고 영지가 서서히 분화되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졌다. 부수적 효과로,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상속권을 얻지 못해 다른 곳으로 가서 스스로 진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의 경우 그 진로란 다른 궁정과 결탁해 전사로 활약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영웅문학(다른 궁정에서 성공하는 과정)의 취향이 생겨났고, 기사도와 궁정 연애의 관념이 싹텄다(물론 다른 원인들도 작용했다). 내밀한 정서가 일약 초점으로 떠올랐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그 예다. 12세기에는 의상에서 대담한 혁신이 있었는데, 이것도 개인성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셋째 요인은 12세기의 르네상스, 고전고대의 재발견이다.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있었던 결함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 고전시대의 저자들이 인간의 다양한 동기,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 교회 바깥에서 완전한 삶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스콜라 철학이 과거의 대가들 간에 때로 커다란 불일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자기 나름의 새로운 해답을 찾고, 새로운 학설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관념, 즉 개인적 신앙을 낳았다. 서던은 그것을 이런 구절로 요약한다. “신에게 이르려면 너 자신을 알라.” 기본 관념은 사람마다 개인적 정신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 각 개인들은 서로 공통이 많지만 신에게 다가선 정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영향을 받은 것은 주로 엘리트였다. 예배의 양식에도 변화가 있었으나 대중은 아직 집단성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 15장 「유럽의 관념」 중에서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숫자판과 시계 바늘이 없고 종만 있었다. (시계를 가리키는 영어의 ‘clock’, 프랑스어의 ‘cloche’, 독일어의 ‘Glocke’는 모두 ‘종’이라는 뜻이다.) 괘종시계는 발명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리옹에 시계를 설치하자는 청원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그런 시계를 만들 수 있다면 상인들은 시장에 더 자주 갈 것이고, 시민들은 더 큰 위안과 행복을 느끼면서 질서정연한 삶을 살아갈 것이고, 시내가 아름답게 장식될 것입니다.” 도시들은 앞다투어 시계를 설치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기계식 시계가 발명된 것은 1270년대로 추측된다(같은 시기에 안경도 발명되었다). 단테는 1320년경에 쓴 『천국편Paradiso』에서 시계를 언급하고 있다. 중국은 유럽보다 먼저 시계를 발명했으나 시간을 균분함으로써 시간의 관념이 달라진 것은 서양이 먼저였다. 독일에서는 1330년대에 시간을 균등하게 분할했다. 백년전쟁 시대의 역사학자인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는 교회의 시과에 맞춰 역사서를 쓰기 시작했으나 집필 도중에 균일한 시간제로 바꾸었다. 얼마 안 가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데 시내의 시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근법의 발견(미의 관념에 관해서는 제19장에서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원근법과 수학의 관계는 삶의 양화를 말해주는 또 다른 측면이다. 그 최초의 징후는 조토(1266/7 혹은 1276~1337)에게서 볼 수 있으며, 다음에 타데오 가디Taddeo Gaddi(1366년 사망)로 이어졌고,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1410/1420~1492)의 시대에는 확고히 자리 잡았다. 이런 발견과 응용이 낳은 변화들은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그 변화에 깊은 인상을 받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1401~1464)는 “신은 절대적 정확함 그 자체”라고 말했다. 사고의 개혁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에게로 이어져 과학혁명이 추동되고 공간이 더 크면서도 더 정확하게 구성되었다.
인도숫자와 대수학에 관한 알크와리즈미의 책은 12세기에 체스터의 로버트가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때부터 새 숫자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로마숫자를 쓰는 방법을 설명한 마지막 수학 교과서가 나온 때는 1514년이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이 두 숫자 체계를 병용하던 재미있는 시기도 있었다. 어느 작가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지 2년 뒤의 해를 MCCC94년이라고 표기했고, 디르크 보우츠Dirk Bouts는 루뱅의 제단화에 연도(1447년일 것이다)를 MCCCC4XVII라고 썼다. 셈 기호들은 나중에 생겼다. 15세기 후반에 이탈리아인들은 ‘더하기’의 뜻으로 를 썼고 ‘빼기’의 뜻으로 을 썼다. 우리에게 익숙한 덧셈과 뺄셈 기호인 +와 -는 1489년 독일의 인쇄 문헌에 등장했다.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그 기호의 기원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아마 창고지기가 화물의 무게가 더 나가거나 덜 나가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짐 꾸러미와 상자에 분필로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1542년 잉글랜드의 로버트 레코드Robert Recorde는 “이 + 도형은 많다는 뜻을 나타내며, 가로선이 없는 - 도형은 적다는 뜻을 나타낸다”고 썼다. 16세기에 ‘같다’는 말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 기호를 발명한 사람도 레코드로 추측된다. “두 가지가 완전히 같다는 뜻이다.” 곱셈을 가리키는 × 기호가 확정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세 문헌에는 곱셈 기호가 열한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장사에 중요한 분수도 처음에는 무척 복잡했다. 197/280이 있었는가 하면 3345312/4320864 같은 분수가 사용된 적도 있었다. 십진법이 도입되기는 했으나 최종적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300년이 더 지나야 했다(제23장 참조). --- 17장 「학문의 확신과 정확성의 추구」중에서

제노바 직조공의 아들인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함선을 타고 기니까지 갔다. 그러나 그는 전문적 항해가라기보다는 “설득력이 대단히 뛰어난 지리학 이론가”에 가까웠다. 1492년 그의 항해를 인가한 협정에 따르면 그는 “대양에서 섬이나 대륙을 발견하고 획득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아직 희망봉 항로가 발견되기 전이었으므로 그가 발견할 곳은 인도가 아니라 일본과 중국이었다. 그런 원정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졌고 유럽과 중국 사이에 대륙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콜럼버스는 1484년 포르투갈 왕에게 먼저 항해를 제안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거절했고 이후 프랑스와 영국도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콜럼버스는 1488년 포르투갈에 다시 한 번 제안했는데, 이번에는 승낙을 얻었을지도 몰랐으나 마침 디아스의 성공에 세인의 주목이 집중되어 있었던 탓에 또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카스티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마침내 국왕과 부자들에게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1492년 8월 그는 팔로스 항을 출발해 ‘그림자의 바다’로 들어갔다.
현대의 연구에 의하면 콜럼버스는 그다지 첨단의 항해가는 아니었고 다만 세심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단 카나리아 제도(북위 27도)에서 정서 방향으로 출발했다. 얼마 뒤 남쪽으로 방향을 틀자 마침 순풍이 불었다. 첫 항해는 운이 좋았다. 33일간 해초와 새들만 보면서 항해한 끝에 그는 바하마 제도의 외곽 섬에 도착했다(산살바도르는 북위 24도다). 그가 보기에 이 섬들은 일본으로 이어진 다도해에 속하는 게 확실했다. (마르틴 베하임Martin Behaim이 1492년에 제작한 세계지도에는 바로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아시아의 동서 길이를 모른 탓에 일본이 중국에서 2400~25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보았던 마르코 폴로의 착오와, 지구의 크기를 실제보다 25퍼센트나 작게 잡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착오가 결합된 결과였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1만 600해리에 달하는 유럽과 일본의 거리를 불과 4500킬로미터로 보았다.
이제 그의 다음 과제는 일본을 찾는 일이었다. 콜럼버스는 계속해서 쿠바와 히스파니올라(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를 발견했다. 히스파니올라에는 약간의 사금이 있었으나 금목걸이나 금팔찌는 ‘원주민’과의 물물교역으로 얻었다. 좌초로 기함을 잃은 뒤 그는 귀국하기로 결정하고, 일부 인력을 현지에 남겨 기지를 세우고 금을 찾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콜럼버스는 더 북쪽으로 이동해 버뮤다의 위도(북위 32도) 가까이에서 서풍을 탔다. 유럽 부근에서 함대는 심한 폭풍을 만나 고초를 겪다가 가까스로 리스본 항구에 닿았다. 그를 심문한 포르투갈 측은 전에도 허풍을 떠는 이탈리아인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그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만일에 대비해 콜럼버스의 발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에스파냐도 무척 신중했다. 그들은 콜럼버스에게 2차 항해를 지시했다. 포르투갈보다 먼저 교황의 승인을 얻어 정착지와 항로를 독점하려는 심산이었다. 당시 교황은 마침 에스파냐인이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다. 1493년에 출발한 2차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도미니카, 버진 제도,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를 발견했다. 1498년의 3차 항해는 자원자가 없어 죄수들 가운데서 인원을 모집해야 했다. 이번에는 더 남쪽까지 가서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강을 발견했다. 이 강은 유럽의 어느 강보다도 컸고 수량도 엄청나 대륙이 얼마나 클지 짐작하게 해주었다. 이 대륙은 아시아의 일부로 보기에는 너무 남쪽이었다. 콜럼버스는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히스파니올라에 가보니 남겨둔 사람들은 벌써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다. 그는 훌륭한 총독도, 탐험가도 되지 못했고 결국 죄수의 신분으로 귀국했다. 1502년 한 차례 더 항해의 기회를 얻어 아메리카 본토의 온두라스와 코스타리카를 발견한 뒤 1506년에 죽었다. --- 20장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지적 배경」 중에서

“과학혁명은 그리스도교의 발흥 이래로 모든 것을 능가한다. 그것에 비하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도 중세 그리스도교권의 체계 내에서 일어난 내적인 변동에 불과하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가 1949년에 펴낸 『근대 과학의 기원, 1300~1800년The Origins of Modern Science, 1300~1800』에서 밝힌 과학혁명에 관한 전형적인 평가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계에 관한 저서를 발표한 1543년부터 144년 뒤 아이작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펴낸 1687년까지 전개된 과학혁명은 자연의 이해를 근본적이고 항구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결과가 바로 근대 과학의 탄생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은 폐기되고 뉴턴적 세계관이 채택되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뉴턴이 무지개의 낭만과 천사의 필요성을 없애버렸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이제 엄격하고 누적적이고 수학적인 합리성이 모호하고 우연적이고 초자연적인 중세의 사색을 대체했다. 버터필드가 말하듯이 이것은 도덕적 일신교가 발흥한 이래 가장 중대한 사고의 변화였다.
하지만 이 주장은 20여 년 전에 비판을 받았다. 그 비판은 뉴턴의 글 몇 편이 발견된 것과 큰 관계가 있는데, 이 책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그 글들을 보면 뉴턴은 물리학과 수학에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연금술과 신학, 특히 성서 연대기에 크게 매료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베티 조 티터 도브스Betty Jo Teeter Dobbs나 I. 버너드 코언Bernard Cohen 같은 학자들은 뉴턴과 그 시대 사람들이 진정으로 근대적 정신을 가졌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도브스와 코언에 따르면 뉴턴은 ‘신의 존재와 섭리’를 보여주기 위해 자연에서 ‘신적 행위’의 법칙을 증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사고의 전환이 과연 진정으로 심원한 것인지를 회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근대 화학의 변화는 뉴턴보다 이후인 18세기에 일어났으므로 그들은 뉴턴의 사고를 ‘갑작스럽고 근본적이고 완전한 변화’라는 의미에서의 과학 ‘혁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그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사생활에서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소심하고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1600년경에는 세계적으로 ‘태양중심론자’가 열 명밖에 안 되었으며, 케플러는 ‘고민하는 신비주의자’였다고 지적한다. 그 ‘영웅들’은 결코 냉철한 합리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뒤의 사태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장의 끝부분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 23장 「실험의 재능」 중에서

볼테르가 한 일은 기본적으로 데카르트의 전통을 뉴턴과 로크로 대표되는 영국의 새로운 사고에 접합시킨 것이었다. 합리주의자인 데카르트는 비교적 전통적인 입장에서, 직관으로 파악하는 선험적인 ‘사물의 본질’로 시작했다가 여기에 강력한 회의의 개념을 추가했다. 볼테르는 우선 객관적인 관찰에서 끌어낸 경험을 중시하는 뉴턴 체계를 채택하고 그 다음에 원리를 추론했다.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을 인간 심리에 적용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로크의 사상이 필요했다. 볼테르는 로크에 관해 이렇게 썼다. “그동안 수많은 사색적인 신사들이 영혼의 이야기를 지었으나 이제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 등장했다. 이 매우 겸손한 사람은 우리에게 참된 역사를 말해준다. 로크 선생은 인간에게 마치 신체를 해부하는 것처럼 영혼을 해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과학은 우주가 모든 사람에게 두루 적용되는 ‘자연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국가의 지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를 근거로 볼테르는 인간에게 ‘자연권’이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 견해가 나중에 혁명적 학설을 낳게 된다. 뉴턴의 과학적 성과에 감명을 받은 볼테르는 장차 종교적 관념이 과학적 관념으로 대체되리라고 확신했다. 인간은 이제 원죄를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살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현세에서 자신의 존재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제도, 교회, 교육 등의 개혁이 필요하다. “노력과 활동이 금욕적 체념을 대신했다.” 적어도 프랑스에 관한 한 볼테르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그가 권한 사고의 변화는 앙시앵 레짐을 철폐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과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새로운 사상은 그 바람의 상징이 되었다. 볼테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프랑스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의지의 자유와 은총의 본질―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더 현실적인 문제가 시급하다고 보았다.
…… 자연의 조화가 신의 박애에서 비롯되었다는 관념은 18세기에 한층 더 중요해졌다. 그 무렵의 관심은 인간에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뉴턴, 라이프니츠, 라부아지에, 린네 같은 학자들이 관찰한 대로 우주가 (비교적) 단순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면, 인간의 본성도 단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법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계몽주의의 뚜렷한 측면이었다. 바로 그 무렵에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학문들―언어학, 법학, 역사, 도덕, 자연철학, 심리학, 사회학―이 생겨났다. 그 중 일부는 당시에 이미 학문의 골격을 갖추었고 일부는 19세기에 다른 학문들과 융합되었다(예를 들어 ‘심리학’이라는 말은 영어의 경우 1830년대에야 널리 퍼졌으나 라틴어와 독일어에서는 그 전부터 사용되었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뉴턴과 로크에 의해 근대 세계가 형성되었다. 뉴턴은 근본적인 진리를 확립했고, 로크는 형이상학을 심리학으로 대체해 “경험을 통해 진리를 얻는 정신적 메커니즘을 밝혔다.” 그는 이 새로운 관점과 분석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머지 그것을 명명하는 용어까지 만들었다. 이제 영혼에 관한 담론은 덫에 빠졌고 더 세속적인 정신의 관념이 부각되었다. 또한 로크는 (본래적인 지식과 대립되는) 경험을 중시하게 됨에 따라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믿음과 경험은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견해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그는 신의 관념을 가지지 않은 사람(민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본래적인 지식의 관념을 비판했다. 이것은 심리학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아직 심리학이라는 말도 널리 사용되지 않았지만). 로크는 행위의 동기가 영혼에 작용하는 초월적인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정신을 형성하는 경험―본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는 행위가 감각에 수반되는 쾌락이나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행위의 동기를 결정론적/기계론적으로 해석하는 가능성을 열었다. 그 결과 신이 도덕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18세기의 지배적인 견해다. 도덕은 본래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크는 ‘의지’를 영혼에 속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정신이 받아들인 감각을 충분히 성찰한 뒤 결정하는 단순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자아, 즉 ‘나’는 영혼과 관련된 신비로운 실체가 아니라 “경험을 구성하는 감각과 열정의 집합”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심리학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되는 데 시간이 걸린 것처럼 심리학과 철학이 구분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누구보다 애를 쓴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다. 그는 우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비판적 사고)을 구분하고, 또 (엄밀한 의미의) 과학과 실용? 지식도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자아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자아가 사물을 어떻게 아는지를 연구했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모든 지식이 과학은 아니며, 비판적 사고는 우리가 세계 자체를 알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신의 지식은 18세기 일부 학자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역학과 비슷한 게 아니다. “심리학의 ‘과학’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정신 속에서 관찰하는 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알 수 있는 대상처럼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는 인류학과 관상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그 학문들이 “인간의 가시적 형태와 외관을 감각하거나 사고하는 방식으로 그 내면에 있는 것을 판단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했다.
……스미스의 이론이 특히 신랄했던 이유는 당시 프랑스에는 경쟁적인 이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중농주의 이론은 스미스의 이론과 크게 달랐는데, 나중에 드러나지만 유익하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았다. 중농주의자들도 스미스처럼 18세기에 상업 사회로 이행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며, 상업과 거래가 인간 본성의 법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보다 훨씬 농촌이 많고 농업의 의존도가 높았다. 바로 이 점이 프랑수아 케네Franois Quesnay(1694~1774)와 미라보 후작(1719~1789) 같은 주요 중농주의자들의 이론을 결정했다. 그들의 견해는 모든 부의 원천이 토지에 있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문명이 존속하려면 기본적으로 식량의 생산량이 식량의 소비량을 넘는 농업 생산성이 필요하다. 그 잉여의 확대와 그로 인한 소비가 인구 성장을 유발하고 그 결과 더 많은 토지가 필요해진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케네는 사회를 독특하게 구분했다. 우선 농업에 종사하는 생산계층이 있다. 그 다음에 십일조, 조세, 지대의 형태로 농업 생산량을 수취하는 왕, 교회, 지주 같은 소유계층이 있다. 마지막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잉여를 생산하지 못하는 제조업자 같은 ‘불모계층’이 있다.
애덤 스미스의 견해는 정반대였다. 그는 인간이 농업 사회를 넘어 새로운 문명의 단계인 상업 사회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경제적 가치의 토대, 부의 원천은 노동이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특정한 직업을 부의 근원이라고 규정하지 않고, 교환과 생산성, 거래를 통해 부가되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접근은 나중에 ‘고전 경제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서 거듭 강조할 것은 스미스가 경제학을 도덕 관계, 문명사, 영국을 통치하는 방법에 관한 정치적 문제와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정치경제학을 ‘정치가가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규정했다.” 스미스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의 견해와 다를 바 없을 만큼 현대적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자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기업가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기업가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자본을 축적해 다른 사람들이 생산적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스미스는 흔히 자유시장 경제학의 아버지로 간주되지만 실은 공정함과 개방성을 유지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그 자신도 법학을 강의했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같은 시대의 고트프리트 헤르더(1744~1803)와 마찬가지로, 역사에는 우주적 목적이 있으며, 인간은 자연법에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목적의 인도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칸트 자신의 생활수칙은 철저했다. 이웃들은 그가 매일 산책하는 것을 보고 시각을 맞추었다.) 철학자의 과제는 그 우주적 계획을 밝히는 일이다. 칸트는 뉴턴이 행성들의 법칙을 밝힌 것처럼 역사와 진보의 자연법도 원칙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역사철학의 결론으로 인간의 진보를 개괄하는 아홉 가지 명제를 제시했다. 인간의 내부에는 언제나 이웃의 이익을 돌보는 사회적 존재와 자기 자신만을 돌보고 성공과 독립을 실현하려는 이기적 존재의 갈등이 있다. 이 항구적인 갈등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사회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에서 모두 진보를 이끌어낸다. 이 창조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려면 강력한 국가로 사회생활을 규제하면서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허용해 개성이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칸트는 진보의 도덕적 개념을 명확히 규정했다. 그 목적은 최대 다수가 자유로이 자신의 개성을 구현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데 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도 진보란 기본적으로 자유에 관한 문제라고 보았다. 헤겔은 역사적 진보를 자유가 확장되는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 오리엔트 체제에서는 전제군주 단 한 사람만 자유롭다. 그 다음에 오는 그리스 체제와 로마 체제에서는 소수만이 자유롭다. 마지막 프로이센 체제에서는 모두가 자유롭다. 이런 간략한 설명은 헤겔의 견해를 다소 왜곡시키지만 헤겔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 즉 19세기 프로이센이 실현 가능한 최고의 세계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증거를 상당히 왜곡해야 했으니까.
……마지막으로 프랑스로 돌아가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Claude Henri de Saint-Simon 백작(1760~1825)과 오귀스트 콩트(1798~1857)의 진보에 관한 이론을 보자. 두 사람은 초기 사회학자로 간주될 수 있다. 당시 신흥 사회과학이었던 사회학에서는 진보의 개념이 주요한 초점이었다. 두 사람은 또한 진보를 단지 이론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학의 탄생은 그 자체로 진보의 일환이었다.) 다음은 잘 알려진 생시몽의 글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황금시대를 인류의 요람에서 찾았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찾은 것은 철의 시대였다. 황금시대는 우리의 과거에 있지 않고 우리의 미래에 있다. 사회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 곧 황금시대다.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고 장차 우리 후손들은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그 길을 닦는 게 우리의 임무다.” 생시몽은 튀르고가 제시한 진보의 세 단계를 수용하고, 여기에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발전을 추가했다. 프랑스 혁명의 폭력과 비합리성에 환멸을 느낀 그는 산업화만이 유일한 전진의 길이라는 믿음에서 기계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생시몽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은 의회에 몇 가지 새로운 기관을 설치하자는 주장이다. ‘발명의 의회’는 기술자, 시인, 화가, 건축가, ‘조사의 의회’는 의사와 수학자, ‘집행의 의회’는 산업체의 책임자들로 구성한다. 첫째 의회는 법을 제정하는 일, 둘째 의회는 법을 조사하고 통과시키는 일, 셋째 의회는 결정된 법을 집행하는 일을 맡는다.
콩트는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에서 역사를 신학, 형이상학, 과학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생시몽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는 산업과 기술의 진보를 이끄는 사람들을 사회학자라고 규정했다(‘사회학자-사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성은 도덕적 지침을 수호해야 하며, 산업체의 책임자는 사회를 실제로 경영해야 한다. 그는 정치에서 ‘상상력’보다 관찰을 우선시했다. 콩트는 1857년에 죽었다. 그 2년 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해 진화론으로 진보의 관념을 송두리째 바꾸고 단순화시켰다. --- 26장 「영혼에서 정신으로: 인간 본성의 법칙에 관한 연구」 중에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영국 노동계급은 기본권을 상실하고, 토지를 잃고, 더욱 빈곤해졌다. 더구나 그 배후에는 “그들의 처지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고용의 조작”이 있었다. 1790년까지 영국 노동계급은 구성이 다양했다. 억압이 지속되고 점차적으로 권리를 상실하면서 그들은 처음에 힘이 약해졌으나 나중에는 통합력을 되찾고 현대 정치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이렇게 분열이 심화되는 이면에서는 산업혁명이 (인간을 희생하는 대신) 물질적 성공을 거둔 데 힘입어 공장주들이 무역과 재정을 바탕으로 역사상 최초로 지주 귀족을 물리치고 정부의 정책을 배후에서 결정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그 이유는 물론 도시의 공장들이 중요해졌기 때문도 있지만, 전통적인 토지 소유관계(아울러 봉건적 특권과 자치권)가 토지를 구획별로 나누어 무제한으로 소유하는 제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농촌 생활을 전면적으로 변화시켰다. 두 가지 사태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한편으로 노동계급은 토지에서 쫓겨나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도시로 모여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간층이 확대되어 화이트칼라 노동자, 기술자, 교육자 등 현대 사회에 낯익은 직업군을 형성했다. 또한 ‘서비스업’이라는 새로운 분야도 등장했다. 호텔과 식당, 철도와 기선이 발달하면서 생겨난 여행과 관련된 업종들이었다. 이 신흥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에 못지않게 자의식이 강했다. 그들 대다수는 스스로 노동계급과 다르다고 자처했다. 이것 역시 새로운 현상이었다.
……1845년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맨체스터에서 일하고 있었다(오언과도 알고 지냈다). 거기서 그는 면화 무역에 종사하면서도 주변의 정세에 늘 민감했다. 직접 목격한 사태에 혼란을 느낀 그는 신흥 공업국가 영국에 관한 실태 보고서를 책으로 펴냈다. 그 해에 발간된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한 ‘재앙에 가까운 비참한 상태’를 상세히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물꼬를 튼 것에 불과했다. 세계를 폭풍으로 몰아간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카를 마르크스였다.
J. K. 갤브레이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책에 감동을 받기도 했으나 그 자신이 ‘타고난 혁명가’였다. 평생토록 자유를 추구한 마르크스의 가장 큰 업적은 “인간의 본래적인 자유가 어떻게 박탈되는가”를 연구하고 폭로한 데 있다. 그는 독일의 트리어에서 고등법원에 재직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지역 엘리트로 성장했다. 지역 귀족의 딸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과 결혼했다는 사실도 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준다. 마르크스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계기는 베를린으로 가서 게오르크 헤겔에게 사사하면서부터였다. 헤겔 사상의 핵심은 경제, 사회, 정치 생활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정립, 반정립, 종합의 이론이다. 하나의 상태가 진화하면 그것에 반발하는 또 다른 상태가 생겨난다. 이 논리는 지금보다 당시에 더 큰 반향을 불렀다. 마르크스가 헤겔 밑에서 공부할 무렵에는 새로운 산업가들이 생겨나 앙시앵 레짐, 옛 지배층인 지주계급의 권력에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화의 개념이다. 리카도를 비롯한 고전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목표가 평형이라고 보았지만, 산업사회에 접어들었어도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 토지, 자본, 노동의 관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헤겔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아 마르크스는 전통적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이론적 근거는 헤겔과 베를린에만 있지 않았다. 리카도처럼 그 자신의 경험도 큰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는 프로이센의 수도를 떠나 쾰른으로 가서 《라인 신문Rheinische Zeitung》의 주필이 되었다. 이것은 원래 루르 강 일대에서 활동하는 신흥 산업가들의 기관지였다. 처음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으나 점차 조금씩 그의 신문은 독자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정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그는 인근 삼림에서 죽은 나무를 가져다 사용하는 주민들의 권리를 지지했다. 유럽 대다수 나라에서 그것은 전통적인 권리였으나 얼마 전 공장에 나무가 필요해지자 폐지된 바 있었다. 그에 따라 숲에 들어가는 주민은 침입죄로 고발을 당했다. 마르크스는 또한 교회의 역할을 줄이는 방향으로 이혼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급진적 사설이 연이어 쏟아지자 쾰른의 지역 당국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르크스를 해임했다. 이때부터 기나긴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는 파리로 가서 그곳의 독일계 추방자들을 위한 독일어 신문을 발행했다. 그러나 검열 당국에게 첫 호를 압수당했고, 프로이센은 “마르크스를 숨겨주는 것은 비우호적인 행위”라며 프랑스를 규탄하고 나섰다. 할 수 없이 그는 벨기에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프로이센의 간섭이 심했다. 여러 차례의 모험과 추방을 거쳐 그는 마침내 영국에 도착했다.
그 무렵 마르크스는 점점 혁명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영국에서 그는 엥겔스와 공동으로 J. K. 갤브레이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 책자’이라고 부른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발표했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하의 국가를 “부르주아지 전체에 공통된 일을 관리하는 위원회”라고 비난하면서 “물질적 생산수단을 장악한 계급이 정신적 생산수단도 통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산업사회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라는 ‘두 개의 적대적인 대규모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세 권짜리 역작 『자본론Das Kapital』의 집필에 착수했다. 엥겔스는 첫 권을 편집했고, 1883년 마르크스의 사후 그가 남긴 원고를 정리해 나머지 두 권을 출판했다.
마르크스를 단순히 경제학자로만 분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람들은 그를 오귀스트 콩트와 더불어 사회학의 창시자로 간주한다. 그의 관심은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매우 폭이 넓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를 얻으려면 자유를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늘 역사의 물질적 결과가 그 이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가 보기에는 그 자유의 이해야말로 정치의 핵심 주제였다.
마르크스는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그는 역사를 정신의 변증법으로, 정립이 반정립을 낳는 과정으로 보는 헤겔의 관념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과정은 인간이 처한 물질적 조건의 소산이다. 특히 그는 인간이 노동과 기술을 통해 자기실현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그는 헤겔의 소외라는 한 가지 관념은 받아들였으나 의미는 달랐다. 그가 생각하는 소외란 주로 노동과 관련되며,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실은 예속된 상태를 가리키는 뜻이었다. --- 27장 「공장의 관념과 그 결과」 중에서

낭만주의는 관념의 대규모 혁명이었다.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 미국 혁명과 크게 다르지만 근본적인 혁명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이사야 벌린은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그가 말하는 ‘정치’란 매우 포괄적인 의미다). “세 가지 주요 전환점이 있었다. 여기서 전환점이란 문제를 제기하는 개념적 틀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새 관념, 새 어휘, 새 관계가 생겨나면 낡은 문제들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생뚱맞고 케케묵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과거의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이 괴상한 사고방식처럼, 지난 세계에 있었던 혼란처럼 여겨진다.”
첫째 전환점은 기원전 4세기 말, 즉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가 죽은 뒤부터 스토아학파가 생겨날 때까지의 짧은 기간이다. “이 시기에 아테네의 철학 학교들은 개인을 사회생활의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아카데메이아와 리케이온이 몰두했던 공적?정치적 생활과 연관시켜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았다. 마치 그 문제들이 이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듯, 심지어 의미도 없다는 듯 도외시하고 갑자기 인간을 내적 경험과 개인적 구원의 견지에서만 바라보았다.” 이 가치관의 대전환―“공에서 사로, 밖에서 안으로, 정치에서 윤리로, 도시에서 개인으로, 사회 질서에서 탈정치적 무정부주의로”―이 워낙 폭넓게 일어난 탓에 이후에는 모든 게 달라졌다. 이 전환에 관해서는 제6장에서 살펴본 바 있다.
둘째 전환점은 마키아벨리(1469~1527)로 시작된다. “그는 자연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를 구분하고, 정치적 가치가 그리스도교 윤리와 다를 뿐 아니라 원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결과 공리주의적인 종교관이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장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완전한 불신을 받았다. 그것 역시 새롭고 놀라운 변화였다. “그 전까지 인간은 의도가 배제된 세계에서 화해 불가능한 사적, 공적 가치관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노골적인 상황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궁극적이고 객관적인 선택의 기준이 원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명백한 상태였다.” 마키아벨리의 정치 이념은 제24장에서 다룬 바 있다.
셋째 전환점―벌린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은 18세기 말 독일이 선봉에서 이끌었다. “낭만주의의 극히 단순한 관념 앞에서 윤리와 정치의 진리와 타당성이 파괴되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말할 것도 없고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도 마찬가지 운명을 겪었다.” 벌린은 이것이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결과를 빚었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서양 사상에 내재하는 전제 자체에서 일어났다. 과거에는 모든 일반적 문제들이 당연히 동일한 논리적 유형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즉 모든 것은 사실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삶의 중요한 문제는 관련 정보만 수집된다면 궁극적으로 답이 가능했다. 바꿔 말하면 도덕과 정치의 문제, 예컨대 “인간에게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인가?”, “권리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인가?” 같은 문제들은 원리적으로 “물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언제 죽었나?” 같은 문제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답이 가능했다. 벌린은 그 답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전제는 바뀌지 않았다.” 언제나 다양한 종교적 차이가 존재했음에도 하나의 근본적인 관념이 사람들을 통합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자연적인 것이든 초자연적인 것이든 해당 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이라는 실체가 있다. 둘째, 특정한 본성은 신 또는 비인격적 사물의 본성에 의해 부여되거나 내재된 특정한 목적을 추구한다. 이 목적의 추구가 곧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셋째, 이 목적과 그에 상응하는 관심과 가치(이것을 발견하고 구성하는 것이 신학, 철학, 과학의 과제다)는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화로운 전체를 형성한다.”
이런 기본 관념이 자연법의 개념과 조화의 추구를 낳았다. 물론 불일치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타오르는 불은 아테네에서나 페르시아에서나 똑같지만 도덕과 사회적 규칙은 다르다. 그래도 18세기까지 사람들은 여전히 자료만 충분히 수집한다면 세계의 모든 경험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벌린은 두 가지 질문으로 이 논점을 강조한다.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와 “자비를 베풀 것인가?”다. 이 두 질문에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면 모순이 된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한 명제가 참일 경우 다른 명제와 논리적으로 모순을 빚지 않는다. 낭만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해 행위와 선택의 문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견해 자체를 부정하고, 답을 아예 찾을 수 없는 문제도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원리적으로 가치들이 서로 상충할 수 없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것을 부정하면 ‘일종의 자기기만’이며, 논란을 낳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낭만주의자들은 낡은 가치관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냈다. --- 30장 「가치관의 대반전-낭만주의」 중에서

1789년 사태의 가장 충격적인 후유증은 단연 총재정부와 집정정부를 낳은 공포정치였다. 사람들은 옛 억압이 새 억압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라고 여겼다. 또한 인간의 참된 본성이 야만적이고 사악하며 복수심으로 가득하다는 견해가 더욱 힘을 얻었다. 그에 따라 세속에서나 종교에서나 절대권력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정당화되었다. 또한 혁명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이유를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도 있었다. 질서보다 자유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유보다 질서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자유를 극대화하는 최선의 질서는 어떤 것인가? 바로 여기서 사회학의 관념이 등장했다.
로저 스미스는 프랑스 혁명가들이 변화를 사회적 예술l'art social로 보았다고 말한다. 아베 시예스abb Sieys는 프랑스에서 군주, 귀족, 교회와 구분되는 ‘평민’의 정체를 정확히 밝히기 위해 펴낸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 Tiers Etat』?라는 책자에서 사회과학la science social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시예스가 보기에 사회과학은 생각의 새로운 단계였고 세속적 세계의 관념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정치적 집단을 이루지 않고도 사회 조직, 사회 질서를 고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과학 아카데미의 상임 비서였던 콩도르세(기요틴의 위협으로 숨어 살아야 했다)는 시예스가 말한 사회과학의 개념을 받아들여 ‘1789년 협회’를 창립하고, 도덕과 정치 과학을 이용해 프랑스 사회를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협회는 얼마 가지 못하고 콩도르세가 감옥에 있는 동안 해체되었으나 사회과학의 이념은 살아남았다. 1795년 대학과 그랑드에콜이 개혁된 데 이어 새 국립대학에 도덕과 정치 과학 학부에 사회과학과 입법이라는 학과가 설치되었다.
사회과학이 프랑스에서 성행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혁명 이후 프랑스의 골간은 ‘신민’이 아니라 ‘국민’이 되었다. 이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야 한다는 이야기다. 좌익과 우익(원래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좌석의 배치 때문에 생겨난 용어들이다)을 가리지 않고 온 국민이 새로운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 문제는 더욱 시급해졌다. --- 32장 「인간 질서에 관한 새로운 관념」 중에서

홈스가 자주 말했고 제임스가 중요하게 활용했고 메넌드가 강조한 전형적인 실용주의의 사례가 있다. 한 친구가 당신에게 절대 비밀이라며 뭔가를 말했다고 가정하자. 나중에 당신은 다른 친구와 이야기할 때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그는 당신이 가진 비밀을 알지 못한다. 둘째, 그는 만약 당신이 아는 비밀을 안다면 회피할 수 있는 큰 실수를 저지를 위기에 처해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친구와의 신의를 생각해 비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비밀을 깨고 다른 친구를 도와줄 것인가? 제임스는 당신이 어느 친구를 더 좋아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참된’ 자아를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제임스는 그 사례처럼 단순한 상황이라 해도 내면에는 몇 가지 자아가 있거나 자아가 아예 없다고 본다. 사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구체적인 행동 방침을 선택하기 전까지, 즉 행동에 나서기 전까지는 자신의 자아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당신은 옳다고 믿는 행동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옳음’이란 결과적으로 당신의 의도가 일구어낸 성과를 치하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임스는 사유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사유와 행동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스토랑에서 바다가재를 주문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곧 바다가재를 좋아한다는 결정인 셈이다. 법정에서 피고가 유죄라고 판결하는 것은 곧 그 사안에 적용되는 정의의 기준을 수립한 셈이다. 비밀을 지키겠다는 결심은 곧 정직의 원칙을 지키는 셈이고, 비밀을 털어놓겠다는 결심은 곧 우정에 더 가치를 둔다는 결정인 셈이다.” 자아는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고는 낭만주의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이 책의 맥락을 감안할 때 가장 주목할 만한 발명은 전신이다. 전기를 이용해 신호를 보낸다는 발상은 1750년경에 있었지만, 최초의 전신은 1816년 프랜시스 로널즈Francis Ronalds가 런던의 해머스미스에 있는 자기 집 정원에서 시험에 성공했다. 런던 킹스칼리지의 실험철학 교수로, (비록 틀렸지만) 전기의 속도를 처음으로 측정한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은 저항의 단위인 옴이 전신에서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을 깨닫고, 동료인 포더길 쿡Fothergill Cooke과 함께 1837년 최초의 특허를 냈다. 전신의 기술적 측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설된 철로를 따라 전선을 배치하자는 휘트스톤과 쿡의 발상이었다. 그 덕분에 전신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하지만 슬라우의 살인 현장에서 도망쳤다가 런던에서 체포된 당시 유명한 범죄 사건의 주인공 존 타웰John Tawell은 전신 덕분에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물론 새뮤얼 모스Samuel Morse의 부호도 한몫 했다. 모스는 대서양 횡단 케이블 계획을 추진한 몇 명의 미국인 중 한 사람이다. 이 케이블의 설치는 이 책의 범위를 넘는 웅장한 모험이었다. 케이블이 깔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신속한 통신망을 이용해 정치가들이 서로 긴밀하게 접촉하게 되면 장차 세계 평화가 크게 진전되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그것은 결국 헛된 꿈이었으나 1866년에 완성된 대서양 횡단 케이블은 상업적 견지에서 큰 몫을 했다. 길런 쿡슨Gillan Cookson은 『케이블: 세계를 변화시킨 전선The Cable: The Wire that Changed the World』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순간부터 영어권 국가들 간에는 많은 경험이 공유되고 여러 문화가 수렴하게 될 것이다.” --- 34장 「미국적 정신과 현대의 대학」 중에서

모더니즘이 탄생한 곳은 바로 19세기의 도시였다. 19세기 후반에는 내연기관과 증기 터빈이 발명되었고, 전기가 사용되었고, 전화, 타자기, 녹음기가 등장했다. 신문과 영화도 발명되었다. 최초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었다. 1900년 무렵에는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대도시가 런던, 파리, 베를린, 뉴욕 등 열한 곳으로 늘었다. 도시의 팽창은 앞 장에서 다룬 대학의 발달과 더불어 해럴드 퍼킨이 전문직 사회의 성장이라고 말한 성과를 이루었다. 얼추 1880년경부터 의사, 변호사, 교사와 교수, 공무원, 건축가, 과학자들이 민주주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했으며, 전문가의 의견을 지침으로 삼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퍼킨에 따르면 1880년부터 1911년까지 영국에서 그런 전문직의 수는 두 배 이상으로 늘었고 네 배까지 증가한 부문도 있었다. 샤를 보들레르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마네와 그의 ‘일당gang’(비평가들의 용어)이 회화로 포착하려 한 것을 글로 표현했다. 그것은 바로 짧고 격렬하고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도시의 무상한 경험이었다. 인상주의는 변화하는 빛만이 아니라 특이한 장면도 포착했다. 철도처럼 놀라우면서도 두려운 새 기계, 여행의 희망을 주면서도 질식할 듯한 매연으로 뒤덮인 거대한 철도 역사, 보기 흉하지만 꼭 필요한 다리들로 구획된 아름다운 도시 풍경, 부자연스러운 발밑 조명을 받는 카바레의 스타들, 커다랗게 빛나는 벽면의 거울에 비친 여급의 앞모습과 뒷모습. 이것들은 ‘새로움’의 시각적 상징이었으나 모더니즘에는 그런 것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모더니즘의 의미는 모더니즘이 현대적인 것, 세계적인 것―과학, 실증주의, 합리주의―의 찬미인 동시에 경멸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더니즘은 막대한 부와 황폐하고 비천한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공존하는 대도시를 낳았다. 모더니즘의 도시는 모든 게 분주하게 오가고 우발과 우연으로 가득 찬 어지러운 분위기였다. 과학은 이 의미의 세계를 밝혀냈다. 이제 이런 상태를 설명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고, 가능하다면 복구하는 것은 예술의 과제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견해의 풍토가 조성되자 모더니즘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고 그 반대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놀라운 점은 이 당혹스럽고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많은 재능이 만발했다는 사실이다. “창의성의 견지에서 보면 모더니즘의 시대는 낭만주의 시대의 충격, 심지어 르네상스와 비교될 수 있다.” 해럴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가 말하는 ‘새 것의 전통’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가히 부르주아 문화의 전성기였다. 이 비옥하고 풍부한 세계에서 낭만주의 관념의 정화인 아방가르드의 개념이 싹텄다. 심미안과 상상력에서 예술가들은 부르주아지를 선도했으나 그들의 역할은 발명인 동시에 파괴였다.
한편에 합리주의자와 사실주의자, 다른 한편에 합리성의 비평가, 무의식의 사도, 문화적 비관주의자로 분리된 모더니스트들을 통합시키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열렬한 참여였다. 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회화, 문학, 음악 등 예술의 정점이었다. 도시가 바로 격화시키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도시는 본성상 사람들을 어울리게 만들었다. 소통과 교통의 수단이 발달하면서 모든 만남이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거래와 교환이 더 첨예해지고, 요란해지고, 아울러 모질어졌다. 지금 우리는 당연시하지만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증가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창의력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더니즘이 흔히 반과학적인 이유는 바로 그 과학에서 비관주의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다윈, 맥스웰, J. J. 톰슨의 발견은 혼란스러웠다. 일체의 도덕, 방향, 안정을 없애고 현실의 관념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모더니즘의 근저에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상당하는 심미적 요소가 있다. 모더니즘도 내적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더니즘은 현대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를 결합하려 했으며, 과학, 합리주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것들의 결함과 단점을 부각시켰다. 모더니즘은 사물의 외양을 넘어서려는 미학적 시도였다. 그 비非구상주의는 대단히 자의식적이고 직관적이며, 모더니즘의 작품은 고도한 자기서명self-signature이고 개성의 또 다른 정점이다. 모더니즘에 속하는 수많은 ‘유파들’―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표현주의,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상징주의, 이미지즘, 디비조니슴, 클루아조니슴, 소용돌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은 아방가르드의 여러 측면이며, 미래의 의식에 대한 혁명적 실험으로 간주된다. 모더니즘은 또한 낡은 문화 양식이 사라지고 새 문화 양식이 탄생한 것을 찬양했다. 예술이 과학과 더불어 새로운 정신적?정서적 의미와 관념을 가져다줄 것이며, 그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실험적 형태가 ‘형태 없는 우연성의 세계’를 복원해주리라고 기대했다. 변화에 대한 갈급증도 있었다. 혁명이 필연적이라고 본 마르크스주의(당시에는 새로운 ‘신앙’이었다)가 그 예다. 허무주의는 그다지 깊이를 가지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으로 진리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 새로운 대도시에서 자아의 정체가 어느 때보다도 모호해졌다는 것을 우려했다. 빈 같은 대도시에서는 신체와 사회의 질병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할 수 없다는 ‘치료적 허무주의’ 학설이 팽배했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이다. 겉보기에는 영혼의 역할을 하는 초상화를 둘러싼 판타지이지만 실은 주요 인물의 ‘실제’ 자아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현재, 또 과거의 상당 기간을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서양이라고 부르는 지역, 전통적으로 서유럽과 북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고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변방을 포함하는 지역이 가장 성공적이고 번영하는 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 편의에서도 그렇고 거기서 비롯되는 도덕적 자유에서도 그렇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흐름의 한복판에 있다.) 물질적 진보에 관한 한 그런 편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얽혀 이루어진 결과다. 다시 말해 의료 혁신, 인쇄술과 기타 매체, 이동 수단, 산업화, 아울러 사회?정치적 자유와 전반적인 민주화 과정이 진행된 결과다. 또한 이것은 관찰, 실험, 추론에 입각한 과학적 혁신의 결실이다. 여기서 실험은 대단히 중요한 독립적이고 합리적인(따라서 민주적인) 권위의 형태다. 바로 이 실험의 권위, 과학적 방법의 권위―이 권위는 과학자 개개인의 지위나 신앙심, 왕에 대한 충성 따위와는 무관하다―가 수많은 기술들을 통해 드러나고 강화되어 현대 세계의 근저에 깔리게 되었고, 또한 우리가 공유하게 되었다. 과학은 누적적인 성질이 있어 한층 강력한 지식 형태가 될 수 있었다. 실험이 그렇듯 중요한 관념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과학적 방법의 가장 큰 매력은 가장 순수한 민주주의의 형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즉각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실험은 왜 서양에서 먼저, 더 생산적으로 일어났을까? 그 답을 알면 유럽의 관념, 대략 기원후 1050~1250년에 일어난 변화가 중요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변화에 관해서는 제15장에서 다룬 바 있지만 여기서 주요 논점을 정리해보자. 유럽은 운 좋게도 아시아에 비해 전염병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다른 대륙보다 일찍 인구밀도가 높아진 덕분에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효율성의 관념이 중요한 가치로 떠올랐다. 여기서 개성이 탄생했다. 그리스도교가 발달해 통합적 문화가 탄생했으며, 그 여파로 대학이 성장하면서 독자적인 사고가 만개했고, 거기서 세속적 사고와 실험의 관념이 생겨났다. 생각의 역사에서 가장 유해한 시기는 11세기 중반이었다. 1065년 혹은 1067년에 바그다드에 신학대학 니자미야가 설립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0~300년간 활발했던 아랍/이슬람 학문의 지적 개방성은 종말을 고했다. 그로부터 불과 20년이 지난 1087년 이르네리우스가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유럽 학문 운동이 출범했다. 하나의 문화가 무너지면 다른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유럽의 형성은 생각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서양 사상의 역사가 플라톤의 주석으로 구성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이제 화이트헤드의 말이―수사인지 풍자인지 모르지만―절반만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각의 영역에서 역사는 두 가지 흐름으로 구성되었다(과도한 단순화지만 이것이 결론이다). 우선 ‘저기 바깥’의 역사가 있다. 인간의 외부에 속한 세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관찰의 세계, 탐험, 여행, 발견, 측량, 실험, 환경 조작, 요컨대 흔히 과학이라고 부르는 물질적 세계다. 이 모험은 직선이 아니었고, 진보는 조금씩 이루어졌다. 때로는 근본주의적 종교로 인해 수세기 동안 지연되거나 차단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험은 전반적으로 성공이었다. 세계의 물질적 진보를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진보는 20세기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생각의 역사에서 또 다른 흐름은 내면의 탐험이다. 영혼, 또 다른 자아,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아리스토텔레스와 대조되는 플라톤적 관심이다. 이 흐름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인간의 도덕, 사회, 정치,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의 발전인데, 성공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성과이며 누가 보아도 긍정적인 결과다. 세속군주든 교황이든 지배자가 전제하는 군주제에서 봉건제를 거쳐 민주주의로, 신정 체제에서 세속적 상황으로 이행한 역사는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자유를 허용하고 실현의 만족을 주었다(물론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고 예외는 있다). 이 전개 과정의 여러 단계들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나라마다 정치와 법의 제도는 달라도 어느 민족이나 정치와 법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 어느 민족이나 정글의 법칙을 넘어 관철되는 법적 정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경쟁적인 시험 제도의 경우 법적 정의의 개념은 범죄적/법적 영역을 넘어 교육에도 관철된다. 제32장에서 보았듯이 수학의 한 형태인 통계의 발달도 때로는 법적 정의의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된다. 지금까지 사회과학의 성과는 물리학, 천문학, 화학, 의학 등의 성과에 비해 미약했지만, 그래도 사회과학의 발전은 그 자체로 정치의 당파적 성격에 대한 올바른 개선을 지향했다. 이 모든 것은 성공이라고 간주하기에 마땅하다.
마지막 주제인 인간의 자기이해, 내면의 성찰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예술과 창작의 역사는 주로 내면의 역사가 아니냐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 말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옳지만, 예술은 자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대개의 경우 자아를 기술하려는 시도는 정확히 말해 무수히 많은 상황에서 무수히 많은 자아를 기술하려는 것과 같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 주로 ‘내적 자아’와 자존을 다루는 프로이트주의를 비롯한 ‘심층’심리학이 큰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술이 진정으로 성공했다면 그런 심리학, 새롭게 안을 들여다보려는 방식이 필요가 있을까?
--- 36장 「모더니즘과 무의식의 발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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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1, 2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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