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욕보이다니
무신의 아들 두남이와 문신의 아들 윤재, 백정의 딸 다녕이는 허물없이 지내는 동네 친구들이다. 하지만 문신은 우대하고 무신은 업신여기는 풍조 탓에 시시때때로 곤란한 입장에 처한다. 어른들의 싸움이 곧잘 아이들의 싸움으로까지 번졌기 때문이다. 특히 윤재의 형 석재는 문신인 아버지의 권력을 믿고 무신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인다.
석재가 다녕이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하고 있는 꼴을 보니 백정의 자식인 듯한데, 윤재 너는 하다 하다 이제 저런 천것들과 어울리는 게냐!”
석재는 벌레 씹은 얼굴로 윤재를 바라보았다.
“쟤들은 내 동무야! 형이 뭔데 그래?”
그 말이 석재의 화를 돋우었다.
“뭐라고? 이 자식이!”
윤재가 씩씩거리며 석재를 노려보았다.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이 나라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 엄격한 나라야. 그런데 그게 무너지면 나라가 어찌 되겠니? ……너희는 철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이 나라가 이토록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도 우리 가문과 같은 문신 관료들이 정치를 잘 펼친 덕분이지. 그런데 무신인 네놈 아비는 뭘 했냐? 폐하의 신하라고 다 같은 관리가 아니야. 무신은 하늘, 무신은 땅이라고!” -18~19쪽에서
석재가 제 동무한테 지껄였다.
“아무래도 이 늙은이는 정중부가 젊은 시절에 수염 자랑을 하다가 김부식의 자제한테 혼쭐이 난 일을 모르나 봐.”
“그러게 말이야. 원래 수염은 우리처럼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의 상징이지. 그런데 칼자루 들고 서 있을 힘도 없는 늙은 장수가 저렇게 수염을 매달고 있으니 말이 돼?”
석재가 뒷짐을 지고 늙은 장수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약이 바짝 오른 장수는 주먹을 높이 쳐들었다.
“이놈들! 아무리 무신이 푸대접받는 세상이 됐다지만, 너희 같은 조무래기한테까지 당할 성싶으냐? 이노옴!”
“에헤, 기운을 아끼시오. 그러다 오늘 황천길이라도 가면 어쩌시려고. 그나저나 가위도 없고 낫도 없으니 이를 어쩐다? 에라, 그냥 손으로 확 뽑아 버리자.”
석재의 손이 순식간에 장수의 수염을 잡아챘다. --- p.47-49
불길한 예언
무신에 대한 차별 대우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임금은 별궁과 정자, 사찰 등 놀이터를 짓고는 거의 매일 문신들과 놀이를 즐기고 술판을 벌였다. 그때마다 무신들은 배를 쫄쫄 곯은 채 임금과 문신들의 놀이판에 경비를 서는 호위병 노릇을 해야 했다.
“밖에서 종일 고생하고 들어오셔서는 왜 남은 기운을 애한테 쏟아붓고 그러셔요?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셔요.”
어머니가 급히 마당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흐험! 안 그래도 지금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게 생겼네.”
두남이는 그제야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요즘 들어 아버지는 낯빛도 어둡고 주름살도 늘어 가는 것 같았다.
“아니, 왜요? 궐에 무슨 중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면 이렇게 분하지는 않지. 입으로 들어간다고 다 음식인가? 다 식은 밥덩이에 멀건 장국 한 그릇이 다 뭔가? 내 더러워서 밥상을 확 뒤집어엎어 버렸네.”
아버지는 정말로 밥상을 뒤집어엎는 시늉까지 했다.
“문신들은 하는 일 없이 폐하 옆에서 아양이나 떨며 기름진 고기를 배불리 먹는데, 우리는 개 취급이라니! 복장이 터져서 살 수가 없네. ……문신들의 세상이 천년만년 갈 줄 알고? 헛! 그럴 순 없지. 암, 그렇고말고.”
두남이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 p.28-30
문신의 관모를 쓴 자는 모조리 죽여라
문신들과의 지나친 차별 대우로 분노가 쌓여 가던 무신들은 세상을 뒤집어엎을 기회만 호시탐탐 엿본다. 그러다 마침내 왕이 절로 행차하는 틈을 타 정변을 일으킨다. 그 바람에 문신과 무신은 하루아침에 처지가 뒤바뀐다. 윤재네 가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두남이 아버지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문신의 집을 빼앗아 차지한다.
두남이는 윤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윤재가 느끼는 두려움이 두남이의 손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십자거리에 다다르자 여기저기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집들이 보였다. 문신 귀족들이 살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불길에 힘없이 허물어졌다. 여기저기서 집들이 불타고 부서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불길에 휩싸인 집 주변에서는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이놈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두남이는 윤재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어머니, 흑흑. 혀엉, 흑흑.”
윤재의 입에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집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어머니와 형을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아, 아버지. 제발, 제발 무사하셔야 해요.’
아침에 붉은 관복을 입고 관모를 반듯하게 쓰고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기 문신의 관모를 쓴 자가 도망간다! 죽여라!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라1”
말을 탄 장수들이 가리키는 곳마다 칼과 창이 내리꽂혔다. --- p.73-76
--- p.7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