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의 진보
형이상학은...그 자체로 순수 이성 비판이 완성된 이후에야 건설될 수 있으며 건설되어야 하는 체계로서의 학문의 이념일 뿐인데, 이제 이 체계를 위한 건축 재료가 설계도와 함께 존재한다. 즉 이것은 순수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증가할 수도 증가할 필요도 없는 전체로서, 만일 여기서 자리를 찾는 데 결코 부족한 것이 없을 거미와 숲의 정령이 이곳에 둥지를 틀어 이성이 거주할 수 없게 만들지 않는다면, 계속 거주되며 수리가 되어 보존될 것이 틀림없다.
이 건물은 그다지 광대하지는 않지만, 명료함을 손상시키지 않는 정밀함에서 생겨나는 우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영원불변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기술자들의 결합된 노력들과 판단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진보들을 단지 열거할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이 거쳐 온 단계를 측정하라는 왕립 학술원의 과제는 최근의 비판의 시대에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 p.78
형이상학은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제시될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라는 점에서 모든 학문들 중에서 매우 특출한 것이어서, 더 이상 덧붙이거나 내용적으로 확장해야 할 어떤 것도 후손들에게 남아 있지 않으며, 게다가 이 학문의 이념으로부터 동시에 절대적 전체가 체계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면, 이 학문의 개념이 올바르게 파악되지 않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 이유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은 순수 이성 능력 전체의 비판을 전제하는데, 이 비판에서 이성 능력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관계하여 선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나, 또는 (결과로 드러나게 될 것처럼) 똑같은 것이지만, 이 능력이 경험 전반의 가능성의 선천적 원리들에 관계하여, 따라서 감성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위해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지만, 그러나 형이상학이 순전히 순수 이성의 본성에 의해 강제되어 초감성적인 것에 관하여 무엇을 구하는지 혹은 무엇을 또한 인식할 수 있는지는 바로 이 순수한 인식 능력의 성질과 통일에 의해서만 정확하게 제시될 수 있으며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에 놓여 있다. --- p.90
발견
≪비판≫의 진정한 의미를 그가 완전히 곡해했으며, 그 자리에 더 나은 체계를 위해 세울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것이 무근거하다는 것에 관해 단지 몇 가지 증거들만이 여기서 제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에버하르트의 매우 단호한 동지조차도 그의 반박들과 반대 주장들의 요인들이 서로서로 들어맞도록 연관성을 부여하는 작업에 지쳐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 p.176
우리는 이 장의 논의 전체로부터 에버하르트가 선천적 종합판단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게 더 그럴듯한데, 독자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의심하도록 이 개념을 고의로 헷갈리게 만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 살펴보면 분석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꺼이 종합적인 것처럼 슬그머니 넘어가게 만들고 싶어 했던 두 개의 유일한 형이상학적 실례들은 “필연적으로 참인 것들은 모두 영원하며(여기에 그는 마찬가지로 ‘불변하는’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인 존재자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비판≫이 그에게 진정으로 종합적인 많은 실례들을 제시해 주었음에 비해 이런 실례들이 매우 형편없는 것이라는 점은 매우 잘 설명될 수 있다. --- p.206
형이상학의 방대한 요구들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른바 다시 재건된, 이전의 ≪순수 이성 비판≫에 대한 이런 해명만으로도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충분할 것이다. 이런 비판이 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에버하르트에게는 이런 비판을 보고 이해하거나 비록 간접적으로라도 철학의 이런 요구들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명백하게 밝혀졌다. - 지금까지 자신들의 반박들에 의해 비판적 작업을 계속 진행시키려고 노력해 왔던 다른 용감한 사람들은 (어떤 형식적인 논쟁에도 결코 끼어들지 않으려는) 나의 결단의 유일한 이번의 예외를 그들의 논증들이나 그들의 철학적 명성이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 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