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에는 허다한 만남이 있고, 그때그때 중요한 담판이 있다. 그런 담판에서 독자 개인이 더 나은 결과를 얻는 일에 이 책의 내용이 작은 힌트가 될 수 있다면 좋으리라. 그리고 더 큰 안목에서, 어떤 감언이설에도 현혹되지 않고 냉정하게 스스로의 본분과 역사적 사명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최고지도자가 어느 때보다 아쉬운 지금, 그런 지도자감을 선택하는 일에도 힌트가 될 수만 있다면 필자로서는 무한한 행복이 되리라. --- p.9
(…) 결국 이집트 쪽이 멋대로 조문에 손을 대고(자신들끼리 보는 경우에만 이었으나), 심지어 핵심 조항 하나를 끝내 지키지 않았음에도 히타이트-이집트 평화조약은 끝까지 뒤집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확실했다. 이후 70년 동안 오리엔트 세계는 기본적으로 평화로웠으며, 람세스는 국내에서 신과 같은 영도자라는 추앙을 죽을 때까지 누리고, 하투실리스는 왕권의 불안을 해소하고 무사히 자식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 조약은 기록이 남아 있는 가운데서는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다. 다시 말하면 힘이 곧 정의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던 시절, 무기가 아니라 말을 통해, 전장 아닌 담판장에서 중요한 국제관계를 이루고 또 그것을 놀랄 만큼 오랫동안 지켜나갔던 최초이자 실로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p.28
람세스는 하투실리스의 후계 구도를 보장하는 한편 그 경쟁자인 무르실리스의 신병을 확보해 둠으로써 두 가지를 모두 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차라리 상대방과의 타협을 포기하고 힘이 있을 때 짓밟아 버려야 한다. 어정쩡한 타협으로 상대에게 큰 불만을 남기면서 상대가 담판 결과를 깨지 않을 담보도 두지 않은 담판, 그것이 홍문의 연회에서 항우가 유방에게 강요한 담판이었다. (…) 홍문에서 그의 눈에 비친 유방은 적인지 동지인지 참으로 어정쩡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준비해 둔 수단을 사용하지 못한 채 유방을 살려 보냈고, 어정쩡한 타협에 만족하면서 스스로 주도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오히려 상대에게 끌려다닌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항우는 한 번은 손에 움켜쥐었던 천하를 허무하게 유방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도도한 한漢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 p.59
“어서들 오시게. 아직 로마까지는 한참인데, 벌써부터 항복하려 찾아오셨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전하를 축복하시기를! 송구하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협상을 하러 왔습니다.”
“협상? 협상이라? 협상은 어느 정도 힘이 엇비슷한 자들이 하는 것 아니오? 지금 로마는 무방비로 알고 있소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요?” (…)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하긴 큰 뜻을 품고 여기까지 오셨을 텐데, 제 말 한 마디에 길을 되돌리시기란 어렵겠지요. 하지만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로마에 가지 않으시고도 그 뜻을 대략 이루실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말이오?”
“전하는 왜 로마에 가시렵니까? 순례를 하시려는 것은 아니실 테고. 관광도 아니시겠고. 그곳의 왕이 되시렵니까? 로마 황제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으셔서 통치하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 p.96
배주석병권의 이야기를 돌이켜 음미하다 보면, 조광윤이라는 사람의 그릇과 성품에 대해 되새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같은 결과를 홍문의 연회 방식으로, 처절한 피바람으로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대의 예를 본받아 비정해질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고 사직의 안녕과 천하의 평화를 도모할 것인가, 둘 중에서 선택하십시오!’ 하는 조모의 외침에, 그는 마음속으로 치열한 담판을 벌였다. 그리고 두 가지 선택지 모두를 버리면서도 모두를 버리지 않는 타협안을 이끌어낸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자세는 의외로 그런 제3의 길에 있을지도 모른다. --- p.134
“좋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벼, 병력이요?”
“지금 싸울 수 있는 기사가 몇이냐고요?”
“둘이오.”
“뭐라고요?”
“둘이란 말이오. 지금 예루살렘에는 당신 말고 기사라고는 두 명 밖에 없소. 저 망할 기 드 뤼지냥이 모조리 사막으로 끌고 가 버렸으니!” --- p.144
“가쓰라 님, 제발, 제발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자, 우리는 이미 이번 막부의 조치에 수긍하지 않음을, 그리고 존왕을 위해 힘을 합칠 것을 합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쓰마에서는 반 발짝 앞으로 나와 주셨고, 이제 사쓰마의 사정을 봐서 직접적인 병력 지원을 포기한다면, 조슈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사쓰마에서 반 발짝 더 앞으로 나와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두 번의 동맹은 완벽하게 성사되는 것이지요.” (…)
“또 반 발짝이라. 그게 대체 무엇이오?”
“간단한 일입니다. 막부와 조슈의 싸움이 시작되는 즉시, 사쓰마는 교토에, 그리고 오사카에 병력을 보내 수비하는 것입니다!”
순간 사이고의 큰 눈이 더 크게 떠졌고, 자기도 모르게 ‘호오!’하는 소리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한 수라고 불릴 만한 해법이었다. --- p.234
서로 너무나도 다르고, 너무나도 편견을 가져온 사람끼리 한 차례의 담판에서 길이 의미가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해볼 수 있다. 담판은 끝났다. 그러나 이 담판으로 과연 끝을 내야 할까? 그래서 다시 만나고, 또 만나고, 이야기를 거듭하다 보면 새로운 관계와 이야기의 맥락이 그들을 예상치 못한 결과로 끌고 나간다. 그것은 어찌 보면 몰락과 패배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어느 한 당사자에게만 의미 있는 수준을 넘어, 역사에 자국을 남길 만큼의 큰 의미가 있는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