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한 권을 다시 냅니다. 이 에세이의 핵심은 ‘화해’입니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저는 이 화해라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작은 힘이지만 전력을 기울이며 전국을 다녔습니다. 화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 힘을 천 배로 늘리는 인간의 기적입니다. 우리 서로 그런 마음의 각오를 표현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고, 바로 앞분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면 어떨까요?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고 말입니다.
가족이야말로 우리가 받은 최고의 선물 아닐까요. 가족을 사랑할 때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았던 힘까지 솟아오르는 것을 우리는 뜨겁게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공동체에는 함께하는 미덕을 갖추지 않고 동행할 순 없을 것입니다. 화해는 동행의 또 다른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감사하는 분량이 곧 행복 분량’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사용하지 않는 힘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급할 때 하나가 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그 새로운 힘을 이끌어 주는 동력을 우리 사회의 에너지로 재발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어쩌면 우린 몸이 가지고 있는 위장의 배고픔이 아니라 마음이 고픈 것인지 모릅니다. 후배들과 잘도 먹고, 웃고, 소리치며 돌아가는 그 시간에 저는 왜 포장마차의 우동을 바라보았을까요?
제게 사진을 건네주러 왔던 그 남자는 왜 큰일도 없는데 쓸쓸함에 대해 이야기했을까요. 왜 K는 잔뜩 부른 배 속에 우동을 붓고, 후배 미옥이는 왜 우리 동네 포장마차를 그리워하는 걸까요. 아마도 그것은 생리적 허기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어서일 겁니다. 그 마음의 허기를 알지 못한 채 위장 채우는 것만으로 해결하려 한 얄팍한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유령 위장이라는 것이 있어, 늘 ‘고프다’는 뇌의 지령을 내리게 해 우리를 고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감정적 모순은 존재하는데, 이것을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박사는 ‘정서적 허기’라고 명명합니다. (중략)
그렇다면 이 정서적 허기를 내쫓는 방법은 없을까요? 배고픔의 허방에 끌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중략)
사는 일은 다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재미라는 것을 ‘아침 우유’처럼 배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신문을 펼쳐 관심 있는 기사나 좋은 기사를 스크랩하거나 다시 읽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관심사를 모으다 보면 그것이 좋은 스승이 되기도,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돈만이 유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빠의 관심사가 자녀들에겐 중요한 유산이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배불리 먹고도 괜스레 포장마차 우동을 넘보지 않아도 되고, 야식으로 라면을 끓이지 않아도 됩니다. 쓸쓸하다 말하지 않아도 되고 인생이 왜 이렇게 허전한 거냐며 하늘에 대고 따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중략)
그래도 허전하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 허기를 서로가 이해합시다. 생명에는 일정 정도 그런 허기가 필요합니다. 그 허기는 우리와 함께 사는 식구일 뿐입니다. 그 감정적 불청객 하나 때문에 우리가 망가져서야 되겠습니까. 함께 사는 것입니다. 가정이야말로 이런 크고 작은 노력에 의해 성숙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 이해가 뒷받침됐을 때, 남성들의 광산 같은 에너지도 분출되지 않을까요? --- 〈정서적 허기를 아십니까?〉 중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제 나이 마흔에 가까웠을 때에야 어머니가 새벽녘 마루에 걸터앉아 하늘을 보던 그때가 바로 어머니의 마흔 시절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남편이 그립고 남자가 그립고 혼자인 것이 뼈아프게 외로웠던 여자였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누구보다 딸이 많았던 어머니였지만 누구도 어머니가 여자라는 사실을 기억한 딸들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밥하고 빨래하고, 우리 딸들을 향해 지독한 욕설을 퍼 붓는 그런 분이 어머니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며 자식을 사랑하는 그런 평범한 어머니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머니도 여자로서 항의하고 싶고, 여자로서 위로받고 싶고,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중략)
어머니란 존재는 늘 그렇게 외로워야만 하는 숙명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것이 딸이라 할지라도 너무 내면적인 이야기는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숙명이 아니라 인간이므로 누구나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이 설사 자식이라도 내부에 있는 속마음까지 전부 꺼내 말하는 것은 금해야 할지 모릅니다.
제가 제 어머쾴의 마음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처럼, 자식들에게도 마음 안의 일을 도와 달라고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사납게 후려치듯 말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픕니다. 두꺼운 얼음 땅에 엎드려 이마를 부딪고 싶을 만큼 괴롭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어도 제 눈물은 마르지 않는지 모릅니다.
“엄마 정말 미안해요.”
어머니 계신 곳이 어딘지 몰라도 지금은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넋 잃고 앉아 계시지 마세요, 어머니.
우리 모두는 이렇게 너무 늦게 어머니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어머니라는 존재는 너무 풍경 같아서 자신 또한 잘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막 숨을 거두셨다고 누군가 외쳤을 때, 이제 ‘나를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이 세상에 어머니처럼 해 줄 사람은 없으니까요.
남편도 자식도 어떤 의미에선 서로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다만 어머니만이 일방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바로 그런 분 아닙니까? 어머니는 이미 세상에 없고 저는 못다 한 사랑을 안고 웁니다. --- 〈어머니는 여자였다〉 중에서
평균 수명 90을 바라보는 오늘날, 부부의 대화는 생존에 다다랐다고 생각됩니다. 부부간의 소통이야말로 노년 생활의 가장 바람직한 적금통장입니다.
요즘은 부부 동반 모임도 많아지고 가족 모임도 늘어나 옛날보다는 훨씬 대화라는 것이, 소통이라는 것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부부들의 속내를 털어놓는 진정한 소통의 시간은 아직까지도 미개척지입니다.
저는 대화와 소통이야말로 인간이 누리는 가장 높은 지위의 생활이라 생각하지만 실천은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우리들이 자랄 때는 남성 우월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여자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남성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대화라는 소통의 카드가 완전히 무시되었던 세월이었습니다.
모든 마음의 갈등과 터트리고 싶은 애타는 마음은, 마음 저 아래쪽에 묻어 버리는 것이 생활 습관이 되면서 대화라는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산 것입니다.
남자들은 명령만 하고 여자들은 그것을 묵묵히 따르면서……. 그러나 명령한 쪽도 듣는 쪽도 모두 말에 대한 갈증을 느끼며 답답한 세월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세대들은 이제 말하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말하는 것을 배워야 사랑하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대화라고 하면 뭐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는지 피하려고만 하는데, 대화라는 것도 곧 말 아닙니까.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대화입니다.
그렇습니다. 명령과 요구와 눈짓만이 아니라 말을 이어가며 서로가 교감하는 것입니다.
그런 대화를 통해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사람 사이의 관계의 폭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옹색하지도, 비겁하지도 않으며, 서로가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침묵은 금이 아닙니다. ‘결혼 40주년 여행’을 갈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대화입니다. 대화가 없으면 금방 지루해지고 짜증이 나며, 곧바로 신경질로 이어집니다. (중략)
두 사람이 천천히 낯선 거리를 걷는 일도 여행의 즐거움입니다.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낯선 풍경 속에 자신들을 두는 일입니다. 여행이 물건을 사거나 잠자리의 흥분을 위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미 결혼 40주년에는 떠나 버렸습니다.
그것보다 더 귀중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40년의 세월을 더 값지게 만드는 것은 지금 주어진 생활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함께한다는 사실을 귀하게 생각하십시오. 지겹다고 말하지 말고, 심심하다고 말하지 맙시다.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새로운 연인으로 거듭나는 프로젝트를 마련하는 길이 바로 노년의 삶을 즐기는 일입니다.
연인은 뜨겁진 않아도 미지근한 온도로 오히려 더 오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조용한 흥분’이라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 〈결혼 40주년 여행〉 중에서
지난 2007년 8월 도쿄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주쿠의 어느 공원에서 ‘전국남편협회’ 회원 100여 명이 집회를 열고 ‘사랑의 3원칙’을 외쳤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그들은 큰 소리로 두 팔을 뻗어 가며 아내들을 향해 외쳤다고 합니다.
‘미안해’란 말을 두려움 없이 말한다. ‘고마워’란 말을 주저 없이 말한다. ‘사랑해’란 말을 부끄럼 없이 말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남편들이 새벽에 공원에 모여 이런 단합대회를 가졌을까요. 정말 남 이야기 같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1960~1980년 고도성장 시대를 산 단카이 세대는 사회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을 내팽개치듯 아내에게 일임한 세대입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정?퇴임을 앞두고 불현듯 두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잘 보이기 위함 몸부림, 즉 ‘단카이’의 ‘반카이(挽回?만회)’ 노력이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중략)
결혼은 서로가 모든 것을 이해하며 살아도, 증오심이 생길 일이 너무 많습니다. 보기 싫을 때도 많습니다. 제 친구는 자주 처녀 시절 꿈을 꾼다고 합니다. 그것은 현실의 억압이 자유로웠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증거 아닐까요.
남편들은 이제라도 아내의 마음을 잡아야지요. 아내 혼자 전담하던 집안일을 분담하고 여행이나 취미 생활을 함께 즐기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합니다.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서로의 거리감을 좁히는 묘안을 집중적으로 모색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남편을 좀 불쌍하게 생각하면 안 될까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것을 아내가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일본에선 남자들을 위한 요리 교실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노후의 부부 관계를 재구축(restructuring)한다는 뜻에서 처음 프러포즈할 때의 긴장감으로, 서로서로 식은 애정을 데우는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를 위한 요리 한 접시’ 오늘 저녁 한번 준비해 보심 어떨까요? 포도주 한 잔의 센스도 잊지 않길 기대하면서……. --- 〈“여보, 미안해… 고마워…사랑해〉 중에서
누구나 옛날 생각을 하면 얼굴 붉어지는 사연이 많습니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애교 수준이고, 당장에라도 굵은 눈물이 쏟아지며 통곡하고 싶은 사연도 있습니다.
제게도 그런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결혼 후 아이들을 연년생으로 낳고 시어머니와 대가족이 함께 살 때의 일입니다. 당시 만 원 한 장은 제게 큰돈이었습니다. 그 시절 만 원이면 하루 찬거리는 물론, 아이 운동화도 하나 사고…… 그러고도 잔돈을 조금은 남긴 채 시장에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오물오물 커 가던 그 시절, 만 원 한 장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으므로 언제나 돈의 쓰임은 아이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누가 나를 그렇게 옹졸하게 만들었을까요.
제가 그렇게 사는 일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던 친정어머니가 모처럼 제 집에 오셨습니다. 마음껏 식사 대접도 못하고 편히 모시지도 못했는데, 어머니가 가시겠다고 벌떡 일어나신 것입니다. 마음이 진구렁이 된 채 무너져 내리는 것을 참고 돌아가시는 어머니께, 대문 밖에서 만 원 한 장을 손에 쥐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현장을 정면으로 목격하신 어머니는 한사코 받지 않으셨습니다.
“너나 써라. 제발 너나 맛있는 거 얘들 몰래 좀 먹어라.”
어머니는 강력하게 손을 저으며 뒤돌아서셨고 저는 따라가 주머니를 찾았습니다. 그 만 원이 딸의 입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어머니는 절대로 받지 못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만 원짜리 수십 장을 활짝 웃으며 쥐어 드리고 싶었는데, 딱 한 장을 그것도 마음이 오그라들며 겨우 드린 만 원짜리 한 장은 몇 번이나 어머니 손에서 내 주머니로, 내 주머니에서 어머니 손으로 오고갔습니다. 결국 길바닥에 떨어트린 채 집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조금 후 대문을 살짝 밀고 거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도, 만 원도 없었습니다. 저 없는 거리에서 허리를 굽혀 그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웠을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 내장을 토할 만큼 울고 또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늘 두 눈에 통증이 올 만큼 꽃이 터지고 마음이 아립니다.
누가 눈물이 마른다고 했던가요? 30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과 흐느낌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만 원짜리 한 장도 서서 받지 못하고 허리를 굽혀 가져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제가 누구 앞에선들 허리를 굽히지 못하겠습니까. 제 지극한 꿈이었던 만 원짜리 수십 장을, 덥석 어머니께 안겨 드리는 것을 이루지 못한 채, 어머니는 제가 어려운 시절에 돌아가셨습니다. --- 〈만 원 한 장〉 중에서
그야말로 젊은 날에는 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마치 싸우기 위해 결혼한 것처럼 사흘이 멀다 하고 큰소리가 나곤 했는데, 저는 늘 당한다는 느낌이 들어 남편이 집을 나가면 혼자 넋 나간 듯 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결혼할 때 부부싸움에 대해 가르쳐 주는 과외 선생도 없고, 결혼할 때는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 같았으니, 싸움이란 아예 생각도 못했는지 모릅니다.
뒤늦게야 결혼 생활에는 밥하는 요령만큼이나 싸움하는 기술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무릎을 치며 깨달은 일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부부싸움은 정말 중요한 과목입니다. 저는 일찌감치 이 과목에서 낙제 점수를 면치 못할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만 물도 자주 베면 맛이 없어집니다. 무조건 ‘내가 지겠다’라고 생각하면 부부싸움은 ?념 정도로 끝나는 것입니다.
아니 부부싸움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제가 돌아온 것이 다행이다 싶고, 예뻐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악을 품고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면 우리 두 사람 다 불행했을 것이고, 아이들도 꼴사납게 되어 버렸겠지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요즘은 만사가 다 귀찮고 힘도 없어 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저 안돼 보인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한국식 ‘부부의 정’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부부싸움을 위해서는 원칙을 세운 후, 철저히 지켜 나가는 기본 예의가 필요합니다. 싸움의 시작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이상은 나가지 않는다든가, 지난일은 들추지 않는다든가, 24시간 경과한 사안은 공소 시효가 지난 것으로 치고 패스해 버리는 지혜 등…… 말씀드렸다시피 상대의 약점이나 지역적인 문제(여기는 국회가 아니니까요)를 찌르지 말아야 하며, 두 사람 외의 존재들을 들먹이지 말고, 절대로 아이들 앞에선 큰소리 내지 않는다, 식사 시간이나 출근 시간에는 서로 참을 것, 물론 물건을 던지거나 폭력은 금물이고 지나간 실수를 계속 꺼내 피를 흘리게 하지 않는다는 등등…… 부부싸움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일 것입니다.
순간의 싸움으로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만드는 것, 그것만은 피해야 합니다. 제 친구는 큰소리가 나고 서로 증오심이 일어날 때쯤이면, 얼른 커피 한 잔을 타서 남편 앞에 놓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버린다고 합니다. 한 숨을 고르고 나서 일어나 보니 남편이 식탁 위에 ‘커피 맛있었어’라고 써 놓고 사라졌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진전시키는 것은 서로의 힘만 빼고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아는 고수들입니다. 좀 어렵겠지만 ‘당신 힘들다는 것 다 알아’ 라는 식으로 싸움의 마무리하면 어떨까요? 싸움도 이제 애교 있게 합시다.
〈부부싸움 도와주는 과외 선생님 없나요?〉 중에서
‘남성 폐경기’가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것은 미국의 심리치료사 제드 다이아몬드 ‘남성에게도 갱년기가 있어 고통스럽다’는 연구를 발표해 명명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남자의 아름다운 폐경기》라는 저서를 통해 ‘남성에겐 주기적인 생리현상은 없지만 단순히 신체적 위기 이상의 것을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폐경이란 말을 붙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40~55세 정도에 나타나는 폐경기는 중년 남성들에게 있어 ‘삶의 전환기’라는 것입니다.
폐경기를 맞으면 제일 먼저 남성 호르몬이 감소해 성욕이 떨어지고 피로감을 호소하며, 건망증이 심해진다고 합니다. 심리적으로도 매사에 짜증이 늘고 결단력이 흐려지고 우울증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또 친밀한 우정을 원하면서도 고립감을 만끽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젊은 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잔혹하게 자신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가족이 생기면서는 정신적 압박감과 책임감으로 단 하루도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 억눌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거운 돌을 가슴에 얹고 자는 것처럼 육체적 정신적 부담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미래는 또 얼마나 불투명하고 불안했겠습니까. 가족들한테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죄인처럼 고개 숙인 채 살지는 않았을까요. 남성들이 겪는 그런 심리적 고충을 생각한다면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남성 폐경기에 대해 본인은 물론 아내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한국 남성들은 대체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폐경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우리나라 남성들은 대부분 혼자 울고, 혼자 견디고, 혼자 우울해 하며, 혼자 불안해하는데 ‘나도 약하다’라고 아내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남성 아닐까요?
약한 사람끼리 서로 도우며 기대고 사는 기본적 상식선에서 인생을 생각하면, 정신 혹은 육체적 폐경기 따위는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므로 그런 약함도 보이는 것이지요. 남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면서, 밖에서 그 연약한 마음을 이해하는 대상을 구하고자 하는 심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선 남성들 스스로 폐경을 거스를 수 없는 과정으로 여기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운동과 휴식 등을 통해 체력을 다지는 것도 증상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합니다. 김 박사는 또 ‘다른 사람과의 수다를 통해 문제를 드러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병은 자랑하라’는 옛말도 이런 경우 필요하다고 봅니다. 좀 모자란 듯 이야기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가는 일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겠지요. 여기서도 부부 간의 대화가 쓸모 있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는데요. 서로 감정 소통이 되게 하는 일은 이렇게 남편의 폐경기를 무마시키는 소중한 도구가 됩니다. --- 〈‘남편에게도 폐경기가 있다는 걸 아시나요?〉 중에서
남편은 월요일이면 약간의 돈을 주고 ‘일주일을 살아라’고 했습니다. 별 ‘땅강아지 같은 인간을 다 보겠네’ 하고 생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난 그 돈으로 콩나물도 사고 두부도 사며 밥을 끓여 먹었습니다. 근데 남편은 그것도 모자라 토요일이면 어디에 돈을 썼는지 계산서를 써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돈 모두를 합쳐 봐야 구두 하나도 못 살 돈을 가지고 내역을 써내라는 것입니다. 미쳐 버리고 싶었지만 그 시절 갓난아기를 두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하는 수 없이 가계부 비슷한 것을 써내면 꼼꼼히 살피다가 결국은 30원쯤 틀리는 것을 찾아내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돈 계산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여자이고, 거스름돈도 제대로 계산할 줄 모르는 여자입니다. 그러면 남편은 이 작은 돈도 쓸 줄 모르는 사람한테 무슨 돈을 맡기겠냐며 큰소리를 쳤습니다. 정말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더 요절복통할 일은 일요일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저더러 반성문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을 조르고 싶었지만 참았고, 제가 제 목을 누르고도 싶었으나 꾹 참았습니다. 이미 인생을 절반 정도는 포기해 버렸을 때니까요.
정말 창피한 일이지만 두 번 정도 반성문을 썼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냐고요? 빤하지요. 다시는 틀리지 않게 돈을 잘 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언니가 그 사람 성격에 평생 쓰라고 할지 모르니 아예 싸움을 하더라도 쓰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그럭저럭 쓰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중략)
그렇게 돈을 아끼고 남의 자존심을 야박하게 허물던 그 남자는, 자신에게는 더더욱 인색했던 사람입니다. 직장까지 걸어 다녔고, 목이 마르면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맥주 한잔의 유혹을 견디던 남자였습니다. 한 가지 목적을 정하면 죽어도 가는 남자, 그 남자가 바로 제 남편이었습니다.
포장마차에서 마시는 소주 값도 아끼던 그 남자, 때로는 논둑길에서 유행가를 부르며 내 어깨에 손을 얹곤 하던 그 남자를 그래도 저는 믿었습니다. 여차하면 가족을 위해 리어카라도 끌 수 있는 남자였습니다.
어떤 권력 앞에서도 아부하지 않는, 자신의 신념이 아니면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런 면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생활과 아무 관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에게까지 구두쇠 노릇을 한 그는 5년 안에 약속한 대로 논 200평의 값을 모두 치렀습니다. 그 집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들었고, 나중엔 그 집을 팔아 조금 더 큰집으로 이사까지 했습니다.
50평의 정원이 있던 은평구 신사동 그 집…… 돌탑을 세우고 목련나무와 모란을 심고, 햇살 같은 꽃을 활짝 피워 올리던 능소화는 물론, 붉은 장미와 흰 장미가 흐드러지던 그 집…… 이태리 봉선화가 여름 내내 피었던 그 집…… 결국 그 남자는 그 집에서 인생의 호사 한번 누려 보지 못하고 쓰러졌고,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강변 삼성동 빌라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누구보다 딸들을 사랑한 남자였고 어설픈 나를 믿지 못한 남편이었습니다. 변변치 못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걱정했지만, 저는 그의 투병을 24년간 도왔고, 제 손으로 돈을 벌며 살았고, 제 품에서 남편은 눈을 감았습니다.
제 일생에 가장 황홀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널 두고 어떻게 가냐, 나 죽거든 결혼하지 마라.”
그렇게 웃기는 말도 남기고 죽었습니다. 저에게는 혹독했지만 자신의 전공에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고 확실한 주관을 펼쳤던 그 사람이 이 세상 누구보다 가정적인 남자였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저를 가장 사랑한 남자였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 〈내 남편은 날 울게 하는 코미디언〉 중에서
행복은 결코 그렇게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리고 행복은 절대 어떤 환경이나 여건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다른 사람 눈에 제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은 결코 되지 못합니다.
행복은, 불행해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절대 가치로서의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행복은 이렇듯 스스로 동의해야 합니다. ‘네,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스스로 수긍하고 동의할 때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소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소하거나 조촐한 것에 대해 애정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스스로 가진 것에 대해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목록으로 작성해 보면 놀랍게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가진 것에 대해 냉정하고, 즐기지 못하며, 안 가진 것에 대해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늘 가난하고, 행복은 남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가령 바람이 시원하게 불거나 꽃 하나를 본다거나 우연히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슴 사람은 행복합니다.
행복은 아주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무엇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고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중략)
여러분도 살아오면서 많은 인생의 고비와 격랑이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연애로 왔든, 돈으로 왔든, 가정 문제로 왔든, 격랑을 거쳤을 거예요. 그런 격랑을 거치며 인간은 조금씩 상처를 받고 상처를 보듬을 줄 알게 됩니다. 그런 다음 어디로 돌아갈까요. 바로 자기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한 생에서 끝나지 않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윤회 사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국화를 통해 중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하고,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다시 한 번 이 시 〈국화 옆에서>를 낭송해 보면 어떨까요. ---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문학이 왜 탄생했는가’ 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통로를, 입을 가진 인간에 대해 좀 더 따뜻하게…… 마음속에 있는 언어를 끄집어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가교를 이어 주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가교를 잇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종적으론 다르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과 분노와 그들의 소망들, 갈등을 그들의 언어,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인간의 최선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고고학자가 말한 ‘여자와 대화하는 것’…… 굉장히 뉘앙스가 재미있는데요, 그럼 왜 남자와 대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여자와 대화하는 것은 어려울까요? 그것은 남성들은 단순하게 지나가고, 여성들은 단추가 몇 개고, 단추 색깔이 어떤 색이었다고 세심하게 보고 지나가기 때문에 남성들은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어쨌든 여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사람과의 대화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시는 시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희곡은 희곡대로 말하고자 하는 바겠지요.
저희들이 대학 다닐 때, 문인이나 시인들에게 문학을 왜 하느냐? 시인들에게 시를 왜 쓰느냐고 물었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자기 구원을 위해 쓰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쓰는 일만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제가 글을 쓰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면서 현재의 나이가 되도록 생각한 것은 ‘글 쓰는 일은 자기 구원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자기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면 ‘써서 서랍에 넣고, 또 써서 서랍에 넣고, 또 서랍에 넣어서 가득가득하게 서랍을 채웠을 때 과연 우리에게 구원이 올 것인가’ 하는 겁니다.
구원은 어디로부터 오냐 하면 내가 쓴 글을 여러분들이 읽고, 여러분들이 읽은 글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때, 비로소 어느 한 시인이 쓴 글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열 명에서 스무 명, 스무 명에서 백 명, 백 명에서 천명, 이런 식으로 번져 나가면서 그것은 문학으로서 새로운 생명을 얻어 나갈 것이고, 그것이 바로 ‘문학의 구원’일 것입니다. (중략)
저는 문학 강연의 제목을 ‘삶이 문학을 부른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제목을 좋아하는데요, 대학생들에게 가서 문학 강의를 할 때에는 대개 이 제목으로 해 왔습니다. 삶이 문학을 부른다는 것은 문학이 먼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지요.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 틈새를 비집고 문학, 시 이렇게 하고자 했던 것이지 애초부터 내가 태어나서 문학을 택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더 안이한 길이 있고 더 평탄한 길의 평화스러운 곳에 있었다면, 아마 저는 문학을 시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 삶은 시를 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가 대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몇천 배의 불덩이 속에서 달구어지다가 결국은 한마디 한마디 뱉어 놓는 것으로써 제 시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청어 장수 이야기
다음은 청어 장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청어 장수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같은 집, 같은 시간에 청어를 떼어 와서 각자 자기 항아리에 넣고 팝니다. 그러면 잘 아시겠지만 청어는 싱싱히 살아 있어야만 제 값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죽으면 값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같은 집, 같은 시각에 가져온 청어를 각자의 항아리에 넣고 파는데 이상하게도 A와 B는 정오가 되면 팔다 남은 청어가 죽어 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오늘도 장사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C 청어 장수는 앞선 두 사람보다 세 시간 정도 더 청어가 살아 있어 계속 장사를 합니다. 그러니까 돈을 제일 많이 벌게 되겠지요. 그러던 어느 날 A와 B가 ‘어떻게 네 청어는 오래 사느냐? 비법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C 청어 장수가 자신의 항아리를 보라 했습니다. 다급히 항아리 덮개를 들추어 보았더니 항아리 속에는 청어 말고 큰 가물치가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친절하게 해 주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가물치를 해독해야 하는데, 가물치가 있는 항아리의 청어가 왜 오래 살았느냐는 것이지요. 가물치는 청어보다 몇 배 덩치도 크고 사나워서 옆의 청어를 마음대로 헤집어 놓을 수 있는 물고기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물치와 함께 있는 C 장수의 청어는 자신보다 몇 배는 더 덩치가 큰 생명체로 인해 긴장하면서 자기를 보호하고 그러면서 살집도 떨어져 나가고, 피도 나고, 여러 가지 곤경에 처하는 순간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 청어가 다른 항아리의 청어들보다 오래 살았느냐?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이 가물치는 청어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생명력을 증폭시키는 대상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하자면 나를 해하려 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체가 있는 사람은 훨씬 더 민첩합니다. 흉터와 상처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그 생명력의 증폭은 말할 수 없이 커질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가물치를 여러 마리 거느리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가물치가 여러 마리 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어머니, 아버지도 가물치였고, 부모를 비롯해 남편, 자식까지도 가물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존재들에게 부대끼면서 저는 좀 더 긴장하고, 좀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제 몸의 최선을 이끌어 내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껍질이 단단해졌겠죠.(중략)
그 당시 저는 ‘지금까지는 사랑, 그리움이 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처음 사회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뭔가 세상에는 파고들어야 할 것이 있고, 잘못 돌아가는 것에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있구나, 반드시 발자국을 찍어야 할 곳이 생기는 곳이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회에 대한 분노였지요.
얼굴이 예뻐야 취직이 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취직이 어떤 때는 될 듯하다가 안 되고, 계속 그러니까 내가 ‘오드리 될뻔’이라는 별명을 얻었더니 인생조차도 될 듯하다가 안 되는구나, 인생도 될 뻔하다가 안 되고, 될 뻔하다가 안 되는구나, 그래서 의식 속에 자기가 쓰는 어떤 것을 갖는 것을 내 나름으로 가지면 안 되는구나, 말도 막 써서는 안 되는구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운명을 바라보고, 제 삶을 바라보았던 것들이 허약했던 제 문학의 뿌리를 튼튼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인생에 많았던 가물치들, 이것들이 제 문학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중략)
그때 저는 명예를 얻는 길이었다면 철대문을 건너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를 얻는 길이었다면 저는 그 철대문을 혀를 물고서라도 건너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내 영혼을 살려야만 했기 때문에 그 서러운 박대를 당하면서 그 집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박목월 선생님의 ‘그동안 잘했어’라는 말을 기억하며 ‘이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왔는데 왜 내가 걸어가지 못하겠는가’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시인에 대한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고, 뭔가 시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할 때인 1973년에 첫 시집을 냈습니다. 박목월 선생님이 서문을 써주시고 출판기념회도 열어 주시면서 그 당시 우리나라의 좋은 시인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연애를 해보았지요. 연애도 저에게 격렬한 것을 주었어요. 그래도 그것은 그냥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돈도 마찬가집니다. 돈도 한때 벌어 봤지만, 물론 그것도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를 긴장시키고, 지금도 저를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은 문학이고 시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아직도 저를 무릎 꿇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첫사랑에 빠져 애원하듯이 시에 매달려 몇 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알겠더군요. 겨우 시가 조금씩 발등을 보여 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다 보진 못했습니다.
시는 그런 것 같아요. 이 사람 저 사람하고 놀다가 오면 안 받아 주는 것 같아요. 수필도 잘 쓰고, 소설도 잘 써서, 책도 나왔어, TV에도 나왔어, 뭐 이런 식으로 하면 시는 받아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가 많은 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겨우 자기를 조금 보여 주는 그런 애인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제 생활에 시가 있다는 것이, 저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야말로 저를 가장 겸허하게 만들고, 제대로 인생을 살게 하고, 공부하게 하고, 남의 인생에 대해 깊이 느끼고, 따뜻한 물줄기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하고, 그리고 내 산야, 내 한국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삶이 문학을 부른다〉 중에서
신세타령…… 그것은 행복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희망과 반대되는 일입니다.
30대는 결코 누리는 시대는 아닙니다. 직장에서도 돌계단을 놓는 시기이며, 가정에서도 탑을 쌓는 시기입니다.
그 정상까지의 계단을 무시하고 어떻게 높이 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 오르는 과정의 행복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대개 성공한 사람들은 30대의 성공 과정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리지만 30대는 코피를 쏟고 밤을 새우고 청바지 하나로 생의 돌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여왕처럼 아름답게 자신을 가꾸기도 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만들어 놓은 후에 그것을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도 행복이니까요.
그 시간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돌아보십시오. 귀중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집을 지을 때는 욕심보다 의욕이, 욕심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현재 그 순간도 사랑하라.’ 만들어 가는 과정의 시간들이 힘겹고 피로하겠지만, 그 순간이 바로 보석이 박혀 있는 시간들입니다.
힘든 30대들이여!
일어나십시오. 당신들은 지금 생의 벽을 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완성되지 않는 생의 집을 너무 불평하지 말고, 하나씩 올리는 벽돌을 진지하고 즐겁게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독일의 인본심리학자 매슬로(A. M. maslow)는 인간의 성숙 단계에 관한 욕구를 다섯 가지로 보았는데 마지막 단계가 자아실현이었습니다.
자아실현이 ‘여자와 무관했던 시절’이 우리나라에는 길었습니다. 예술가나 성직자에게나 있을 법한 자아실현이 이제 바로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 시기에 시간을 아껴 돌진하십시오.
그래서 자아실현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자기 파악이 확실한 사람이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당기는 것은 뭐든 배워 두는 것이 좋습니다. 성실한 독서도 큰 힘이 됩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외국어 컴퓨터지만 자기만의 재능 하나쯤 키워 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요즘 세상은 다양한 지식이 필요할 때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전문 지식만 있으면 큰소리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예술에 관한 모든 것, 문화?정치?역사도 아는 것이 좋습니다.
대화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은요. 그게 30대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고 싶고, 그려 놓은 생의 지도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아니 자아실현을 통과하기 위한 걷기 행동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결코 자아실현에 규정된 직업이나 나이, 돈을 계산하지 마십시오. 이상과 꿈, 계획이 있다면 그것이 자아실현의 문으로 가는 길입니다. 신념과 소신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다운 길을 걷는 것은 신념과 소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30대는 자아실현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는 당신의 30대를 자신감 있게 박차고 나가길 바랍니다.
당신을 믿으세요. 이 세상의 태양은 당신 자신을 비추고 있습니다. --- 〈자아실현의 중심에 서 있는 30대를 위하여〉 중에서
우리가 징그럽게 견디며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하늘은 반드시 우리의 편이 되지 않겠습니까. 회사와 가족 모두에게 저는 ‘실패했다는 생각보다 이제야말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물론 20만 원도 받지 않았으며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라는 제 자전적 에세이 백 권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강의료를 받지 않고 오히려 선물을 준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마음만은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자전 에세이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죽음의 터널을 건너와 새로운 생의 기쁨을 갖게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들에게 힘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우리는 소주 파티를 열었습니다. 귤과 떡, 오징어와 몇 가지 음식이 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사장님이 소주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습니다.
“내 힘들다!”
그러자 직원들이 다 같이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다들 힘내!”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 그렇게 아이디어를 내면 뭘 못하겠는가. 그래, 그렇게 마음을 합하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저는 그들이 반드시 일어서는 모습을 볼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봄날이 올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최근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 회사는 밀린 월급을 모두 주었다고 합니다.
저 또한 방에서 혼자 볼펜을 들고 외쳤습니다.
“다들 힘내!” --- 〈다들 힘내!〉 중에서
우리나라는 실패라는 말을 너무 싫어합니다. 거의 악덕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실패는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염병처럼 생각쿇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실패하고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늘 실패하면서 그 실패를 바탕으로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고, 실패의 원인을 찾아, 실패하지 않는 묘안을 찾아내는 일이 우리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실패라는 종이 한 장’을 받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그 종이 위에 성공으로 가는 색칠을 하는 것, 그것이 삶의 가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실패하는 것은 조금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실패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젊은 청년들의 작은 실패를 인생의 실패처럼 말하는 어른들이야말로 실패를 조종하는 것 아닐까요.
실패는 바로 ‘성공의 시작’이라고 말합시다. (중략)
‘어둠이 꽃을 피운다’는 글은 제 안에서 누룩처럼 발효되어, 어느 명인의 말씀보다 더 저를 위로했고, 제게 힘을 북돋워 주었으며, ‘너도 할 수 있어!’하고 등을 두드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참 많이도 실패를 했었습니다. 밥 먹듯 한 그 실패 앞에서 저는 저를 포기하고, 저를 지우고, 저를 완전 이 세상으로부터 내려놓고 싶은 좌절을 밥 먹듯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남들까지 ‘쟤, 왜 저래’ 하면서 저의 어리석은 도전을 질책했었습니다.
사는 방법은 오직 그 ‘실패의 어둠’을 사랑하는 일이었고, 그 어둠을 피하지 않고 그 정신으로 일어서는 것뿐이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성공도 없습니다. 저는 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전문직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시인, 화가, 운동선수 그 외에도 너무 많을 것입니다. 수백 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난 사람들…… 저는 그들의 ‘딱 죽고 싶었던 한순간’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선 사람들…… ‘무엇무엇 때문에’라고 핑계 대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선 사람들…… 그들의 실패를 사랑합니다.
‘실패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소곤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두 손바닥이 뜨거워질 때까지 큰소리로 외치고 싶습니다. --- 〈우리는 실패도 사랑합니다〉 중에서
보다 높은 이상이 없었다면 쉬지 않고 일하는 개미 떼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인간은 늘 좀스러운 것을 마다하고 장애물이 있는 도약의 발걸음을 떼기 좋아합니다. 생의 가장 달콤한 행복은 스스로 자신의 생을 향상시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인생이라는 책장을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공들여 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 한 번밖에 그 책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단 한 번밖에 읽지 못하는 그 책을 위하여 지금보다는 조금 후에,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에게 있어 의미 있는 시간과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생에 있어 ‘퇴보’는 가장 모욕적인 말입니다. 지금처럼 경쟁이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에는 더욱더 ‘도약’이라는 말이 심장처럼 쉬지 않고 뛰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지식이 내일의 쓰레기가 되는 혁명적 속도의 시대에 그 의식과 정신은 우리들 생명의 무게를 웃도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약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뛰어넘읍시다. 타인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 도약입니다.
개구리같이 폴짝 뛰는 일입니다. 남이 보기에 웃음을 사는 것, 걸음이라고 하기에 너무 미약한 것이라 해도 뛰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입니다. 발걸음을 아직 떼지 못했다 하더라도 정신은 언제나 무장돼 있어야 합니다. 뛰어넘읍시다. 우리들 자신의 한계를……. (중략)
그 나무는 바로 나의 나무가 될 것입니다.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 나무가 나의 나무가 되기까지 상처와 아픔을 견디겠다는 의지를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도약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모든 도약에는 후추 냄새가 날 것입니다. 목구멍에 확 불이 붙는 것 같은 매운 후추가 두 손을 꽉 쥐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이보다 더 향기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약! 새해 선물에, 생일 선물에, 혹은 입원한 친구에게, 슬픈 일이 생긴 이웃에게 이 도약만 한 선물이 어디 있겠는지요. 이 선물을 위해 우리 모두, 자신부터 오르지 못할 나무를 향해 뛰어오르고, 오르다 다친 흉터를 우리들 생의 자산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 흉터는, 주머니가 좀 비더라도 중도 포기 유전자를 달아나게 하지 않을까요. 이보다 더 당당하고, 이보다 더 행복하고, 이보다 더 기쁜 축제는 없어서, 우리 국민 모두가 덩실덩실 춤을 추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도약에는 후추 냄새가 난다〉 중에서
저녁 모임에 갈 때 그 코르셋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입는 과정에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화장이 다 지워지는 바람에 다시 화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아니 왜, 누구를 위해 이런 골 아픈 일을 해야 하지?’ 화가 치밀었음에도 그 돈이 아까워 겨우 겨우 입고 외출했습니다.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상쾌한 느낌도 들었어요.
근데 누구도 제게 날씬하다고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효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지요. 저는 화장실에 가서 그 불편한 존재를 벗어 버렸습니다. 아이고, 살 것 같더라고요.
그렇습니다. 코르셋은 신체적 속박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책 저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외침에 물리적 코르셋은 벗었지만 날씬하고 예뻐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에 시달려 다이어트, 주름살과의 전쟁 등 보이지 않는 코르셋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코르셋이 여성을 옭아매는 데 있어 좋은 엄마도 좋은 아내도 아니라’는 사회적 메시지입니다.
맞습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신발을 신다가 발이 까지고 헙니다. 내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소신이 필요한데, 여성들은 그 소신을 안고 사회적 동조 의식으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거기다 예뻐지려고 얼굴을 못살게 굴기도 하고 날씬해지려고 굶기도 합니다. 늙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얼굴에 전 재산을 바쳐 새로운 얼굴을 만드는 데도 서슴없습니다.
스스로 노예가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종 노예, 여성들 스스로 만든 굴레라는 것이지요.
날씬하고(건강에 좋으니까), 주름살 없고(인상이 좋으니까), 늙지 않으려고(아름답게 나이 들기 위해) 애쓰는 것은 시대적 요구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또 하나의 사회적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여자는 여자 자체로 원숙한 인간이라 생각합니다. 여자가 나이 들면 남자와 여성이라는 성을 버립니다. 오직 자신이라는 소우주의 배를 부드럽게 끌어가는 힘으로 청춘의 긴 잠에서 깨어나 나이를 안아 들입니다. 나이를 수용하면서 나이를 극복합니다. 몸은 아플지라도 정신적으로 나이를 이깁니다.
어쩌면 여성에겐 나이는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젊은 날 그토록 할 수 없었던 포기도 스스로 하고 창밖을 바라볼 줄 알고 고요한 대화를 즐기며 깊어집니다. 더없이 편안한데 왜 젊어지려고 하겠습니까.
늙을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젊어지려고 하겠습니까.
코르셋을 버리고 주름살을 사랑하면서, 여성들에게는 살아가는 에너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것이 나이 드는 아름다움 아니겠습니까.
나이를 사랑할 줄 아는 힘, 이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힘입니다.
--- 〈여성! 그대는 진정 신종 노예인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