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몹시 짜증이 났다.
2. 그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어떤 문장이 더 나은가요? 2번 문장이 더 선명하죠. 1번은 닫힌 표현이에요. 저자의 판단에 독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거든요. 그래, 짜증났나 보다, 그러면 끝나요. 2번은 열린 표현이에요. 저자가 미리 판단하지 않고 독자의 몫으로 열어둡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 독자도 미간을 한번 일그러뜨려볼 겁니다.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없던 짜증도 생길 걸요. 그러면 문장 속 인물과 공감하게 되는 거지요.
닫힌 표현과 열린 표현은 반대말이 아니라 용도가 다른 말입니다. 각기 다른 목적을 지향합니다. 속보기사, 브리핑, 도로 표지판 같은 단순한 의사소통에는 열린 표현보다 닫힌 표현이 효과적입니다. 열린 표현은 정보전달 속도만 놓고 보면 닫힌 표현에 뒤지지만,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므로 독자 가슴속에 더 오래 살아남습니다. 공감을 얻기 위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열린 표현과 친해져야 합니다.---p.18
“사랑합니다, 고객님~.”
114에 전화하면 상담원이 다짜고짜 사랑한대요. 누구냐 너. 단순한 정보마저 담지 않은 닫힌 표현은 속을 느글거리게 합니다. 독자의 감정에 참견하기 때문이에요. 좋은 표현들은 독자의 희로애락에 직접 개입하지 않아요. “서비스센터를 면 단위까지 확충했고, 통화요금을 10% 낮췄습니다, 고객님.” 그러면 고객은 알아서 그 회사를 연모합니다. ARS 고객센터의 천편일률적인 안내 멘트, “저희 서비스를 사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객 감동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저희 회사는 앞으로도 정성스럽게 고객님을 섬길 것을 약속드립니다.” 됐거덩. 그럼 어떻게 해야 독자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서도 그의 심리를 파고들 수 있을까요? 사실만 전달하고자 애쓰면 됩니다.---p.30
중학생 샘, 제 조카가 세 살인데요. 벌써 뽀르노를 봐요. 교육상 너무 빠른 거 아녜요?
나 (교육상? 어랍쇼?) 혹…시 너도 보니?
중학생 에이, 제 나이가 몇인데 그런 걸 봐요, 유치하게.
나 (헉, 이 자식이……) 으응, 그렇구나. 그런데 네 조카는 너무 심하다.
중학생 심한 건 아니죠. 요즘 애들 다 그래요.
나 (보자보자 하니 이놈이……) 음, 그렇군…….
나중에 다시 물어보고서야 오해가 풀렸습니다. 중학생이 이야기했던 것은 ‘뽀로로’였습니다. 제 귀에는 그게 뽀르노로 들렸던 거고요. 쪽팔렸습니다. 정확히 들었다손 치더라도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 언어 표현이 지닌 당연한 속성입니다. 뱃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의 똥배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참치뱃살을 떠올리는 미식가도 있을 겁니다. 맥락이 빠진 표현은 독자에게 혼란을 주거나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된 판단을 부추깁니다.---p.66
장지훈 과장이 동료들과 회사 앞에서 서성입니다. 점심 메뉴를 못 골랐기 때문이에요. 추워서 뒈질 것 같은데 장 과장은 “뭐 먹으러 갈까요? 의견 좀 내보세요.” 이따구 얘기만 하고 자빠졌습니다. 장 과장, 참 가지가지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요. 옆에 있던 옥수현 씨가 이 틈을 비집고 필살기를 날립니다. “4월 말에 미친 진눈깨비도 날리고 기분도 꿀꿀하니 생태찌개 먹으며 간단하게 반주 한 잔?” 사실 정보와 정황 제시, 그리고 적절한 제안까지, 맥락을 잘 전달하는 좋은 표현의 요소를 두루 갖추었습니다. 그러면 착착 다음 단계로 나갑니다. 생태찌개 말고 더 나은 의견이 나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더 나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그 의견을 따르면 됩니다. 닥치고 생태찌개나 드셈,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공감을 얻기 위한 열린 태도요, 좋은 표현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장 과장이 바랐던 결과도 이런 건데 말이죠. 아까비. 결론만 비워둔다고 상상력이 열리는 게 아녜요. 그러면 뚜껑만 열립니다. 정황을 보여주며 제안해야 다양한 반론도 나와요. 그래야 뚜껑 대신 마음이 열립니다.---pp.79-80
'다큐멘터리 3일'(“서민들의 인생분기점 구로역”, 2008. 7. 19.)에 출연한 취업준비생 신경식 씨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면 굽이굽이져 있는데 타고 갈 때는 직진이라고밖에 생각 안 하잖아요. 저도 반듯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면 굽이져 있고 그게 인생인 거 같죠.”
고속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선으로 끝도 없이 이어진 것 같지만 지도를 보면 고속도로 역시 완만한 곡선입니다. 직선 같은 인생은 없어요. 다들 굴곡 있는 삶을 살아가죠. 직선에 가까운 완만한 삶도 있고, 박달재 옛길처럼 우여곡절 많은 삶도 있고요. 어떤 인생을 살아가든 본질은 같아요. 자기 혼자 유별난 삶을 사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처한 구체적 상황에서 추상적 개념을 잘 포착하고 그것을 글로 잘 표현하면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어요. 삶의 본질은 보편적이니까요.---pp.142-143
참으로 무모하게 전업작가 선언을 해버리고 원고료만으로 먹고 살던 이강룡 작가는, 2007년 무렵 1, 2금융권에서 대출이 더 이상 불가한 신용등급에 진입합니다. 갈 데까지 간 상태라 카드 돌려막기는 이미 한계용량을 초과한 상태였지요.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이강룡 작가는 이쯤 되면 막가자는 심산으로 러시앤캐시에서 418만 원을 빌립니다. 연이율 66%에 빛나는 이 대출금 덕분에, 그 후 이강룡 작가는 귀뚜라미 뒷다리만 한 원고료를 쪼개 이자 내랴 원금 갚으랴 몇 번이나 훅- 갈 뻔합니다. 이자를 늦게 내면 이런 대화가 펼쳐집니다.
연체 1일차 상냥한 아가씨 목소리,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이자 연체되셨네요.”
(아, 눈물겨운 열린 표현)
연체 2일차 여전히 상냥한 아가씨, “고객님(안녕하세요 생략), 오늘도 납부가 안 되셨네요.”
연체 3일차 더 이상 안 상냥한 아가씨, “오늘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연체 4일차 안 상냥한 아저씨, “집에 계시죠?” (무지막지하게 쩌는 열린 표현)
연체 5일차 연체 이자 완납.
험난했던 대출금 상환 프로젝트를 마감하고, 돌려막기에도 드디어 돌려차기를 날리던 날, 이강룡 씨는 자축하는 뜻으로 체크카드를 신청합니다. 카드를 발급받고서 22인치 평면모니터를 자신에게 선물합니다. 계산하려고 체크카드를 건네자 점원이 묻습니다. 몇 개월로 해드릴까요? 통장잔고를 기준으로 결제되는 체크카드는 원래 할부가 안 되고 무조건 일시불인데도 이강룡 씨는 크게 외칩니다. 일.시.불.이.요. 계산원은 이런 표정을 짓습니다. ‘이, 뭐, 병…….’ 계산을 마치고 매장을 나서는데 이강룡 씨 두 눈에 짠물이 핑 돕니다. 지긋지긋한 외상 인생이 일시불 인생으로 바뀌는 순간이니까요. 그때 깨닫습니다. 글쓰기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나쁜 게 바로 외상 글쓰기라는 걸요.
---pp.173-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