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번 제주에 가본 일이 있다. 그저 무심코 연수단에 어울려 둘러보게 된 98년 5월의 제주. 여느 관광객들처럼 동굴과 식물원을 둘러보게 될 줄 알았다. '프레스'라는 옷감 절단기에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손가락을 잃었다는 한 제주사람은 그 손가락을 들어 멀리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가 4. 3때 불을 놓았던 민간인 마을이다'라고. 제주에 연고자 하나 없는 나는 그날이 부끄럽게도 제주를 알게 된 처음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엔 세미나 실에서 제주 근대사 강의를 들었다. 오전답사에 지친 많은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만 육지와 멀리 떨어진 이 먼 섬까지 잔인한 권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제주에서 돌아오자마자 '현기영'의 '순이삼촌'이라는 책을 찾았다.
광주출신 만큼 많은 수의 작가가 배출되지 않아서일까,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제주를 말한 작가는 거의 없다. 이제 모두들 광주를 알고, 그때를 공공연히 말한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제주는 서민층의 신혼여행지 이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
그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 현기영의 어릴 적 이야기를 담은 책이 <지상에 숟가락 하나>이다. 소설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사실적이라 그저, 성장수필이라고 해야함이 정확한 표현인 듯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 시절 그 때는 누구나 가난했었다. 특히 난리를 겪고 나자 먹을 것은 더욱 귀하기만 했다. 아무리 철없던 그 시절일지라도 그래서 감히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몰랐다. 친구의 도시락을 얻어먹어도, 밑창이 구멍난 신발을 신고 다녀도 그것으로 주눅이 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철마다 들과 산, 혹은 바다로 뛰어나가 놀았지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가난은 어린아이들의 노동을 필요로 했다. 밭일을 하기 위해선 학교를 빠질 수도 있었고, 아무도 그걸 가지고 무어라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군에 보내고 아이들 셋을 홀로 길러낸 어머니의 고생은 말해 무엇하랴? 그곳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 대신 가장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에 그가 믿는 건 학교공부밖에 없었다.
다양한 문화꺼리가 없던 시절이라 오직 소설책밖에는 소일거리가 없었고,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주인공의 우울을 무턱대고 따라하던 사춘기의 객기와 치기가 있었다. 그리고 너무도 대담하고 솔직하게 고백한 말(馬)위에서의 처음 마스터베이션과 사정등.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버지 때문에 더욱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를 끔찍이 생각하는 효심과, 철없던 시절에 맛없는 밥투정을 죄송하게 생각하는 고백에서는 가슴 뭉클함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나, 이제 작가도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 보다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그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증오의 대상이 아니다.
살아야한다는 것의 처절함. 모든 것을 잃었던 4. 3 이후에도 사람들은 아이를 낳고 다시 그 땅 위에 싹을 틔웠다. 불모지의 땅에 새 삶을 내리려는 사람들 속에 그의 어린 시절이 녹아 있다. 그는 말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동심은 즐겁다, 라고.
위대한 아침, 시련을 이겨낸 장하고 거룩한 신생의 빛, 아마도 나는 그러한 아침으로부터 진정한기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진정한 기쁨은 시련에서 온다는 것을. 신생의 찬란한 햇빛속에서 종횡무진 환희에 찬 군무를 벌이던 제비떼 그 눈부신 생명의 약동! 실의에 빠지기 쉬운 변덕스러운 성격의 내가 신통찮은 삶일 망정 그런대로 꾸려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아침의 기억들 덕분이 아니었을까. 삶이란 궁극적으로 그러한 아침에 의해 격려받고 그러한 아침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 p.180
'난 그런 밥 안 먹어! 그게 무슨 밥이라? 감저(고구마) 꽁댕이지. 맨날 그런 것만 맥이구…….'
내 말에 나 스스로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는데, 아닌게아니라 그 말이 어머니의 아픈 데를 정통으로 찌른 모양이었다. 보통 성난 것이 아니어서 눈에 불이 철철 넘치는 듯했다. '요새끼, 말하는 것 좀 보라! 그게 무슨 밥이라? 아이고 요것이 먹는 음식을 나무래는구나. 고생허는 에미 불쌍토 안해서 날 나무래여?'
그렇게 해서, 나는 기둥을 꽉 껴안은 채 징징 울면서 네댓 대 매를 견뎌낸 다음, 밥상머리로 끌려갔는데, 한판 난리굿을 피운 뒤라 밥맛이 각별히 좋았다. 물론 밥이 아니라, 고구마 세 자루에 김치 세 가닥이었지만, 역시 목구멍은 포도청이었나 보다. 아직도 울음이 남아 연방 쿨쩍거리면서 고구마를 씹는 나를 넌지시 바라보던 어머니는, 숟갈이 필요없는 식사인데도 자못 엄숙하게 예의 숟갈론을 들먹였다.
'그것 보라.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가지 않앰시냐.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일로 중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