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누구나 서슴없이 잘 안다고 믿는 현상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불확실하고 막연해지는 개념이 행복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취향대로 행복해지는 거라면, 행복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어떤 것이다. 반면 중세의 행복은 객관적이고 하늘의 은총을 받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행복학을 기초한 철학자들은 행복이란 오직 일차적으로 개인의 판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각자가 행복의 심판관이다.
“저에게 행복이란 아내와 함께 벽난로 옆에 앉아서 좋은 적포도주를 마시는 거예요.”
“두말할 것도 없이 야마하 오토바이를 타고 쌩쌩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거죠.”
우리는 예기치 않은 우연이 가져다준 선물로서의 행복과 강한 내적 만족 그리고 기쁨의 상태로서의 행복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실제로 행복보다는 만족을 자주 느낀다. 그러므로 행복과 만족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더 강렬하고 풍부하다. 안락감은 때때로 행복과 동일시되는 또 하나의 개념이다. 행복 연구가 베른트 호능은 이렇게 썼다. “행복은 주관적 안락감이고, 주관적 안락감은 행복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반대는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것은 행복 연구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질문이다. 칸트는 도덕적 의무의 이행이, 프로이트는 쌓인 욕구들의 충족이, 쾌락주의자들은 많은 쾌락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태도 변화를 통해 더 행복해진다. 더 아름답고 더 부자이고 더 유명한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의 깊게 순간에 충실하라. 여기의 지금을 살고자 하고, 거기의 당시에 대해 곱씹지 마라. “있는 그대로 좋아!” 사랑뿐만 아니라 행복도 그렇게 말한다.
2장 긍정적 정서들, 기쁨과 행복의 발달
1960년대에 정서심리학자 폴 에크만은 인간의 정서 표현은 학습되는 것이고 문화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세계 절반을 여행했다. 그는 감정들이 선천적이라고 주장하는 찰스 다윈에 반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윈에 반박하기 위해 출발했던 그는 결국 신다윈주의자로 돌아왔다.
선천적인 기본 정서가 있다는 결정적 증거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이 행복감을 느낄 때 웃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행복, 놀람, 분노, 공포, 슬픔, 혐오가 상대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나는 얼굴 사진을 보여주면서 실험한 연구들은 아이들이 정서를 일찌감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이들은 일찍이 정서적 감정의 개념들을 이해한다
아이들은 전통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정서 개념들도 더 일찍 이해한다. 체험이 이해에 선행하고, 이해는 말로 표현하는 능력에 선행한다. 아이들은 그들이 ‘행복한’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휠씬 전부터 행복하고, 더욱이 이를 말로 표현할 수 있기 이전부터 행복하다.
건강한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새로운 공간으로 달려가고,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지칠 줄 모르고 질문하고, 모든 것을 탐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한다. 이러한 아이들은 장차 다음과 같이 확신한다. “난 내 운명을 내 손안에 가지고 있어. 나는 미래를 위한 놀랄 만한 계획들을 세우고 있어.”
3장 아이들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다
“외동은 덜 행복할까?”
“용돈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할까?”
“엄마가 늘 옆에 있으면 아이들이 더 행복할까?”
“도시보다 시골에 사는 아이들이 더 행복할까?”
3장에서는 자녀의 행복을 두고 흔히 던지게 되는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동시에, 아이들의 입으로 그들의 행복을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이들 스스로 묘사할 때, 아이들의 행복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진다.
“여섯 살 때 여동생이 생겼는데 무척 행복했어요. 같이 놀 누군가가 생겼으니까요.”
“제 강아지요. 강아지는 정말 사랑스러워요. 또, 우리 수영장이요. 수영장은 너무 기분 좋고 상쾌하게 해주어요. 또 우리가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제가 그 집에서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제가 실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처음으로 수학에서 90점을 받았을 때요.”
“운동하는 것, 컴퓨터로 게임하는 거요.”
이 보고들은 아주 다양하다. 수많은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 많은 행복의 길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의 행복을 위한 길도 그만큼 많이 존재한다. 모든 아이는 각기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4장 행복을 위한 교육은 가능한가?
우리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는 우리의 아동상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들이 아직 이성이 없으므로 행복할 수 없는 작은 야생동물이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이들을 본성상 악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낭만주의자들은 아이들을 신성시하고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간주했다. 아이들은 아직 순진무구하고 우리보다 신에게 더 가까이 있으며 시간을 잊은 채 실컷 놀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아동상이 아이들의 행복을 증진하는 교육에 적합할까?
또 하나, 부모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것이 오늘날에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기 쉽다. 얼마나 많은 아이가 억지로 피아노를 배워야 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최근 발달심리학은 ‘소질’들을 재발견했다. 어떤 아이는 운동에 소질이 있다. 인라인스케이트, 산악자전거, 스노보드보다 그 아이를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또 어떤 아이는 음악에 소질이 있고, 쇼팽 연습곡을 연주하면서 몰입을 체험한다. 또는 붓을 쥐면 시간을 잊을 정도로 미술에 소질이 있는 아이도 있다. 또, 여전히《해리포터》를 다른 무엇보다 탐독하고 내적으로 마술적 세계들을 만들어내며 그 세계 속에서 깊은 행복을 느끼는 독서 기질도 있다.
아이들을 행복한 세계로 이끌어주는 교육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지 질문받지 않고 이 세상에 온 아이들은 무조건 받아들여질 권리가 있다. 그리고 사랑을 느끼는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더 훌륭하게 잘 행동한다.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더욱 자유와 책임을 인정해줌으로써 교육이 필요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