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것에 대한 동경
--- 김미정(sbbonzi@yes24.com)
계속되는 열대야 탓이었을까? 책장에 꽂힌 이 시원스런 빛깔의 표지는 주저없이 책을 펼치게 했다. 한여름에 읽는 『눈의 여왕』은 계절과 제목의 상반된 이질성이 주는 간격만큼이나 서늘함을 건네주었다.
소년보다는 소녀가 더 좋아할 것 같고 실제로는 그런 기울기가 가능한 이 책은 여자들이 갖는 일종의 허영심을 단박에 짚어내기도 한다. 여자들에게 있어 ‘차가움’ 은 현실과는 거리를 둔 일종의 동경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예로, 어릴 적에 좋아하는 이상향으로 꼽는 사람 중에는 반드시 ‘말 없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조건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고 나면 그런 이상향을 가진 소녀들은 대부분은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사람이 좋다고 자신의 이상향을 수정하게 된다. 이 양상은 펑펑 내리는 차갑고 아름다워보이는 눈이 오후 햇살이 나고 나면, 사르르 녹아 보기 흉하게 되는 것처럼 소녀의 이상향도 현실 앞에서는 그것은 역시 동경이라는 사실 앞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 동화에서 말하는 차가움역시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것에 분류가 되며, 소녀가 자신의 이상을 수정했던 것처럼 차가움을 녹이기 위해선, 눈을 바라보던 감탄의 시선이 아니라 질컥거리는 눈을 치우는 희생과 용기, 사랑이 필요한 하다는 것을 안데르센은 말하고 있다.
이야기는 아주 고대로 흘러 옛날에 살던 트롤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흉하게 보이는 거울을 만든 것에서 시작한다. 착한 생각을 할 때마다 흉측한 모습이 보이도록 만들어진 이 거울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보여준다고 소문이 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거울 앞에서는 흉하게만 보였다. 이것을 재미있게 가지고 놀던 괴물들은 하늘에서도 이 놀이가 재미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하늘 가까이로 가는 도중,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 작은 파편은 사람들의 눈에, 심장에 박혔다.
착한 것을, 아름다운 것을 흉하게 만드는 파편은 사람들에게 박혀 그들의 심장을 얼게 만들고 고집 세고 못된 성미를 갖게 했다. 안데르센은 여기서, 우리에게 원래부터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거울의 파편만 뽑으면 원래의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악’을 말함으로 그는 사람에 대한, 아이들에 대한 근본적인 선함을 믿게 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큰 마을에 살던 가난한 소년 케이. 그에게도 그 파편은 박혀 원래의 선하고 다정했던 케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심술궂고 못된 아이가 되어 썰매를 타고 눈의 여왕을 따라가 버린다. 가슴에 박힌 차가운 파편은 온전히 케이의 것이 되지 못해서 그 추위에 오돌오돌 떨고 있을 때 눈의 여왕은 소년에게 입맞춤을 해 주고 그 순간 죽을 것 같은 케이의 추위는 사라진다. 그렇게 케이는 차가운 눈의 나라 사람이 된다.
한편, 게르다는 케이를 찾아 헤매며 여러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 때마다 까마귀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둑의 딸, 순록 등의 도움을 받으며 케이가 잡혀있던 눈의 여왕이 살던 궁전까지 가게 된다. 그 즈음 눈의 여왕은 따뜻한 나라에 다녀오겠다며 케이에게 ‘영원’이라는 과제를 내주고 이 단어를 짜맞추면 “너는 진정한 네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케이는 그 단어를 맞추지 못하고 또한 때마침 찾아온 게르다를 알아 보지 못한다. 게르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슬퍼서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 눈물에 케이의 심장에 박혀있던 파편은 떨어져 나가고 그들은 재회를 하게 된다. 물론 영원이라는 단어로 맞추게 되고 말이다.
동화는 케이의 차가운 심장에 반하는 게르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사랑의 힘에 대해 전하고 있다. 차가운 것은 더 차가운 것이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어느 날 불쑥 내게도 찾아올 지 모르는 파편에 대해도 그는 충고한다. 예고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은 주변의 온정으로, 함께 사는 세상에서만 치유가, 구조가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못된 티롤이 만든 그 파편은 사람과 사람이 살면서 빚어내는 ‘상처’일 수도 있고, 어느 날 불쑥 찾아든 ‘불행’일 수도 있고, “늘 이것을 선택할까? 아니면 다른 게 나을까”라며 고민하는 선과 악의 그 대립일 수도 있다. 자신도 잘 모르는 사이에 박힌 삶의 파편들. 이것을 빼낼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지닌 삶의 파편에 대해서 보다 강하게 스스로를 차갑게 무장, 폐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쩜, 그 파편을 빼낼 수 있는 길을 보다 자신을 많이 내어 보이고 또한 보다 오랫동안 참아주고 바라봐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