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1980년대 이래 한국의 문학과 문화 담론에서 바흐친은 가장 각광받는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다. 독일 고전철학과 고전주의 문학비평으로 중무장한 게오르크 루카치와 나란히, 혹은 그의 ‘대항마’로 내세워져 다방면에 걸쳐 호출되었던 까닭이다. 루카치가 장대하고 강인한 남성적 스타일로 사변적 우주를 펼쳤다면, 바흐친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하지만 끈질기게 형이상학의 고도를 끌어내리는 말투로 자신의 글을 써갔다. 지금도 널리 읽히는 바흐친의 첫번째 한국어 번역서는 『장편소설과 민중언어』라는 ‘가슴 벅찬’ 제목을 달고 있는데, 1980년대의 정서적 분위기와 바흐친 수용의 시대적 맥락을 보여 주는 듯하여 제목을 읽을 때마다 늘 신기한 감상에 잠기곤 했다. 더구나 루카치와 대비되는 바흐친 삶의 궤적은 그 자체로 감동스러운 데가 있었다. 나름의 간난신고에도 불구하고 루카치가 ‘미학의 맑스’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누렸던 데 반해, 청년 시절 ‘때 아닌’ 정치적 죄과를 짊어졌던 바흐친은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연명하는 삶을 택했던 것이다. 사뭇 대조되는 일생을 보냈던 두 사람이 1980년대 한국의 문화 공간에서 나란히 이름을 떨쳤던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p.9~10
하지만 지나치게 반듯한 모범생의 이미지로 바흐친 형제를 포장할 필요는 없다. ‘90년대의 아이들’이 철들 무렵, 그러니까 20세기 초엽의 유럽은 이미 혁명의 거센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던 와중에 있었다. 특히 1905년에 터진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철통 같은 차르의 제국에 생긴 거대한 균열을 온 세계에 폭로하였고, 청년들은 문턱까지 차오른 ‘미래의 혁명’에 대한 기대로 쉽게 들떠 올랐다. 김나지움에서 수학하던 소년 바흐친 역시 친구들과 맑스에 관해 읽고 토론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어설프게나마 비밀 회합 따위를 가지며 몰래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했다고 한다. 물론, 아직 치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어린 형제가 정치 운동으로서 맑스주의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다고 보긴 어렵다. 소년들이 벌인 정치적 논쟁은 자주 니체와 보들레르, 레오나르드 다빈치에 대한 토론과 뒤섞였고, 혁명에 대한 관심은 대개 예술의 본질과 철학적 사변의 현실성, 혹은 미학과 정치의 결합 가능성에 대한 질문들로 옮겨 갔다. 그러나 이런 경향을 ‘소년기의 낭만’이나 ‘지식인의 한계’쯤으로 치부하는 것도 공정하진 않을 듯하다. 왜냐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의 지적 풍토에서 정치적 혁명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바로 예술과 미학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 p.22~23
청년 바흐친이 고민하던 주된 문제는 칸트에서 출발한 위기의식, 곧 삶과 윤리의 분열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에 있었다. 현대성의 근본 문제로서 분열은 윤리의 상실로 표징되었으며, 이때 칸트는 문제의 원천이었고 신칸트주의는 그 해법을 모색하던 중 마주친 협력자이자 경쟁자였다. 그것은 윤리가 초월적 도덕에 속한 것인지 혹은 역사문화적 가치 판단에 속한 것인지에 관한 첨예한 논쟁점을 구성했다. 마침 서클의 일원이던 마트베이 카간이 마르부르크에서 돌아와 유럽 ‘최신’ 철학의 교사가 되어 주었고, 바흐친은 이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 곧 정신과학(딜타이), 문화과학(신칸트주의), 현상학(후설) 등에 관해 면밀하게 검토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몸은 러시아의 벽촌에 머물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은 당대 지성사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이미 뛰어들었던 셈이다. --- p.65
『도스토예프스키론』(1929/1963)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이 책에 관한 지금까지의 평가는 작가의 권위에 맞서 주인공, 즉 타자의 권리를 옹호한 탈근대의 이정표를 보여 주었다는 것이었다. 작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설파하는, 흡사 철학적 설교 같던 소설의 역사는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러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역전되었다. 작가는 좋건 싫건 자신이 창작한 미학적 세계의 주체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고 이제 소설 속 세계의 주도권은 온전히 등장인물들, 주인공에게 이전되고 만다. 저 유명한 ‘대화주의’란 등장인물들의 목소리, 주인공의 말이 세계의 전면에 나섰음을 포고하는 개념틀이다. --- p.137
1934년, 바흐친에게 내려진 5년여의 유형 기간이 끝났다. 하지만 수형 기간이 종료된 후에도 얼마간 유형지에 머무는 것이 제국 시절부터의 관례였고, 바흐친 역시 2년여를 카자흐스탄에서 더 보냈다. 늘어난 체재 기간 중 그가 종사하던 일은 콜호즈(집단농장)의 회계 업무였다. 농업이나 회계가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유형 중에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으며, 종교 문제로 고발되었던 정치범에게 운신의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두드러진 문학 연구자로서의 면모는 이중적으로 읽힐 수 있다. 한편으로 정치적 색채를 띠지 않는 문학 연구는 당국의 의심을 피하면서 학문에 대한 정열을 기울일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문학은 실제로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각별한 관심과 열의로써 파고들었던 진정한 사유의 영역이었다. 이때 문학은 근대적 학제의 여러 분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사유 본연의 힘과 표현이 총체적으로 결합하고 드러나는 장르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209
바흐친은 인류 문화가 생산해 온 수많은 작품들에서 민중이 남긴 흔적, 혹은 민중의 이미지가 새겨진 조각들을 찾아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거기서 민중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고귀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집합체로서 민중의 표정은 통상적인 인지의 차원을 넘어서 식별 불가능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동물과 식물,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을 뒤섞고 연결하여 조성해 낸 그로테스크 이미지가 그것이다. 거기서 민중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상태, 이름 붙이기 어려운 덩어리로 나타난다. 확정된 형태를 갖지 않기에 모호하고 불안스러우며 불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로테스크 이미지의 힘은 그것이 형태에서 형태로의 이행성에 있음을 바흐친은 정확히 간파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 능력이 바로 민중의 본원적 역량이라는 것이다. --- p.281
이에 반해 변형과 변신, 이행을 삶의 본래 면목으로 간주하는 그로테스크의 관점은 외부를 내부화하고 내부를 외부로 밀어내는 양가적 운동을 존재의 본질로 삼는 만큼, 근대 문화에 대립하면서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달리 말해, 그로테스크는 근대를 초과하고 범람하는 규정 불가능한 힘이다. 감산의 과정으로 근대를 정의할 때 그것은 근대의 ‘잔여’이고 ‘외부’지만, 실상 이러한 외부 없이는 내부가 이루어질 수 없고, 잔여가 없다면 내적 구조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로테스크는 밀려난 잔여를 다시 끌어들여 접합하고 바깥을 안으로 흡인하여 더 커다란 덩어리를 만드는 운동이고, 그로써 이전의 문화적 경계를 와해시켜 새로운 경계선을 긋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렇게 구성되는 새로운 문화의 경계, 그 내부성은 또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겠지만, 그 역시 또 다른 그로테스크의 운동에 의해 변형될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문화의 규범, 경계와 내부성을 항상-이미 해체시키는 대항적 문화, 반문화의 힘이 아닐까? 우리가 가시적으로 지칭하는 문화란 이러한 비가시적 운동으로서의 반문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표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 p.386~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