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학'
이 핵 제목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제목이 아니다. 사실 이것을 책 제목으로 정한 내게도 여전히 낯선 제목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마치'학교에 대한 새로운 학문'처럼 오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새로운 학문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학교의 의미와 그 역할, 학교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사, 그리고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들을 약간 다른 시각에서 이해해 보자는 의도에서 쓴책이다. 이런 의도에서 학교, 교사, 학생을 자연스럽게 늘어놓았고 그게 좀 길다 싶어 첫 자만 따서 만들다 보니 지금처럼 '학·교·학'이 된것이다.
교육(敎育)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 이루어 진다. 중국 문헌에서 '교육'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맹자』(孟子)의 진심장(盡心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천하의 영재를 불러놓고 가르치는 기쁨(得天下英材而敎育之 三樂也)이 가르치는 사람의 즐거움이라면, 배우는 사람의 행운은 최고의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석사과정에 있을 때 고(故) 이귀윤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은 무엇이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이 질문을 두고 학생들끼리 수군거리자 교수님께서는 맨 앞에 앉아 있던 나를 지적하시며 대답을 해 보라고 하셨다. 그때나는 서습없이 "지도교수님을 만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교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한참 나를 보셨다. 내 지도교수가 누구신지, 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교 계셨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석·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그렇겠지만, 내 지도교수님 역시 네게 특별한 분이시다. 지혜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인 삶의 과정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로소 드러남을 나는 그분의 삶을 통해서 배웠다. 혼내고 다그치시는 대신'교육은 삶의 과정 그 자체이며 나중의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다'.'안일한 공부는 안일함을 익히는 것보다 조금도 낫지 않다'라는 경구를 들려주시며 하실 말씀을 대신하셨다. 간혹 내가 곤혹스러운 일을 당하거나 어떤 어려운 문제 앞에서 쩔쩔맬 때, 그부은 짧은 한 마디 말씀과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농축시킨 듯한 한 편의 시(詩)를 보내 주시며 나의 어리석음을 깨쳐 주시면서 또한 용기도 북돋아 주셨다. 깊이 있고 신중한 말씀, 학자다운 일관된 행동, 그리고 지도교수로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나 역시 통합적 삶을 목표로 내가 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좋은 모델을 갖는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좋은 선생님'(good teacher)을 만난 행운아라 할 수 있다. 또한 나 역시 그 분이 내게 보여 주신 모습을 거울로 삼아 어떻게 하면 잘 가르칠 것인가, 어떤 역할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의 공부와 삶에 도움을 줄것인가를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접한 하나의 문구가 있었다.
'學爲人師 行爲世範'
'학위인사 행위세범'(學爲人師 行爲世範).'사람의 스승이 되기 위하여 배우고, 세상의 모범이 되도록 행한다'곧 '사범'(師範)을 풀이해 놓은 말이다. 이는 매 학기 첫 수업시간에 내가 학생들에게 늘 소개하는 문구다. 나는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시간을 내어서 그 지역의 교육기관, 특히 대학은 꼭 방문한다. 몇 년 전, 중국 북경에 갔을 때도 어김없이 북경대학교을 찾아갔었다. 사범대학(師範大學)에 재직하다 보니 자연히 관심이 가는 그곳 사범대학에 들었는데, 그 입구 현판에 쓰여있는 글귀가 바로 이것이었다. 뜻을 음미해 가며 읽는 순간, 나는 '아하!'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사범대학의 정체성은 물론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의 중요성을 이렇게 잘 압축해 놓다니!' 하고 말이다.
그때부터 나는 매 학기 첫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이 문구를 읽고 그 의미에 대해서 말해 보게 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대다수 학생들은 이 문구를 잘 읽지 못하거나 설사 읽었다 하더라도 그 의미까지는 알지 못했다. 한국의 한자교육 실정과 별도로, 나는 그럴 때마다 적잖이 놀란다. 최소한 교사가 되려는 학생들이라면 '사법대학'이 어떤 곳인지 날고 있어야 하고, '교직'(敎職)이라는 직업이 어떠한 지식과 자질을 요구하는지, 훌륭한 '교사'(敎師)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문구를 하나하나 설명하면 그들의 입에서 '아!'하는 탄성이 흘러나온다. 그제야 '사범'의 의미를 알았다는 듯 말이다. 그런 일들이 매 학기 반복되면서, 나에게는 해야할 일이 더불어 생겼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사범'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일이다. 학생의 소속 단과대학이 어디인지, 전공이 무엇이든 간에 교직과목을 수강하고 교사가 되려는 학생들은 교직과 교사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교직과 교사의 역할은 사회가 그에 대한 그대와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다른 직업 및 역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교사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선택에 몰입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미국의 심리학자 칙센미하이(Mihaly Caikszentmihalyi)는 그의 몰입이론을 통하여 "자기가 하는 일(활동) 자체에 완전히 빠져드는 몰입의 상태에 들어가면 만족을 얻고 이를 통해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설령, 몰입이 때로 극도의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고 훌륭하게 가꾸게 하여 통합된 삶을 살도록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 시기가 언제였든 간에 교직을 선택했다면 몰입해야만 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인데, 그 행복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 바로'교직'이기 때문이다. 내가 담당하는 교직과목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이 좀 더 큰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고고 이해하기를 기대하고, 그들이 장차 자신들이 가르칠 학생들을 좀 더 애정 어린 관심으로 대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좋은 선생님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삶의 모델이기를 바란다.
한국사회에서 '교직' 하면 흔히 두 번의 긴 방학과 고정적인 월급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업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교직은 절대 만만한 직업이 아니다. 그러기에 교생실습까지 다녀온 학생들 중에 간혹 교직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준비하려는 학생도 있다. 교직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기대라는 무게감,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현장에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나름대로 힘든 직업이다. 더구나 한 번 교편을 잡은 사람에게는 평생 '교육자'(敎育者)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어 일상생활과 행동의 제약을 받기도 한다. 가르치는 직업을 위해 전문지식을 쌓는 것(學爲人師)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통합적 삶을 살도록 몸소 모범을 보이는 것(行爲世範)은 생각보다 어려운일이다. 그래서 교직은 다른 직업에서는 볼 수 없는, 가르치는 사람 스스로 타인의 삶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과 더불어 바로 그 때문에 사회에서 권위나 존경도 가지는 특별한 직업이다.
교직을 선택했다면 혹은 교사가 되려고 한다면, 그 일에 몰입해야 하고 더불어 그 일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행복을 너무 멀리서 찾는다. 최소한 행복은 교직을 선택하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교생실습을 나가고, 임용시험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교사가 된 후에도 그 언제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매학기 첫 시간 강의실 문을 열 때의 그 설렘을 나는 기억한다. 매 시간 수업을 진행할 때의 긴장감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오래 남는다. 그런 즐거운 기억과 느낌을 나는 교직을 선택한 학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내게 훌륭한 선생님이 계시는 것처럼, 나 또한 학생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들 역시 좋은 교사가 되기를 기대한다. 내 지도교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을 통해서 얻은 나의 경험이 곧 그들의 경험이고, 또한 그들이 장차 누군가와 나누게 될 의미 있는 경험이기를 바란다.
이 책은 흔히 얘기하는 지루하고 딱딱한 교직과목을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대하며 나아가 그들의 교직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나의 고뇌에서 시작하였다. 이 책은 어려운 이론과 수업내용을 더 쉽게 접근해 가도록 때로는 문학작품과 영화를 소개하여, 그 속에 나타난 학교 이야기, 특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러 유형의 교사들을 통행 사범의 의미, 구체적으로 교직과 교사 역할에 대해 교육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각해 보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좋은 교사로 성장해 나가기를 바라는 나의 애정 어린 마음으로 쓰여졌다.
나는 이 책에서 단 하나의 '좋은 교사' 상(像)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에 '좋은 교사'의 모습은 그가 만나는 '학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고, 학교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학교에서 만나면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학교교육을 통해 교사와 학생이 다 같이 성장하고 성숙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다만, 본문에 나오는 교육과 학교교육의 역사, 학자들이 분류한 여러 유형의 교사들, 부록에서 소개한 영화 속 교사들의 모습 등을 통해서 이 책을 읽는 독자 스스로가 '나는 어떤 교사인가' 혹은 '나는 어떤 교사가 되고 싶은가'를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길 바란다. 이 책의 전반에 걸쳐 교사에서 비중을 둔 것도, 결국 학교와 학교교육에서 학생들을 이끌어 주는 리더 혹은 멘토로서 학생들에게 지식과 더불어 지혜를 나누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이 교직을 선택하려는 학생들은 물론, 자녀가 교사가 되?를 바라는 학부모들, 그리고 교육현장에서 때로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교사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2010년 여름의 끝에서 이경희
---저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