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처럼 어둡고 아주 무더운 6월 밤이었는데 서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 ‘루’는 바싹 마른 나무들을 흔들어 대면서 비가 곧 뒤따라 올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가끔 뜨거운 물 같은 한 줄기 빗방울이 먼지 위로 떨어져 개구리처럼 팔짝 뛰어오르기는 했지만, 그 지겨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것이 한갓 시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무실보다는 인쇄실이 약간 시원해서 나는 그 방에 앉아 있었다. 그동안 조판용 활자들은 계속 덜그럭거렸고, 쏙독새는 창문에서 울어 댔고, 거의 알몸인 조판공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면서 물을 달라고 했다. 우리의 최종 조판 작업을 미루게 만들고 있던 그 소식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루’는 그치고 조판 작업 은 거의 다 끝났는데도 말이다. 온 세상이 무더위 속에서 정지한 채 그 입술에 손을 갖다 대고 사건의 발생을 기다렸다.
---「왕이 되려 한 남자」중에서
“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카네한이 말했다. “드래벗이 왕이었지요. 황금 왕관을 머리에 쓴 그는 잘생긴 남자였습니다. 그와 카네한은 그 마을에 머물렀고 매일 아침 드래벗은 오래된 임브라 우상 옆에 앉았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경배했습니다. 그것은 드래벗의 명령이었습니다. (…) 두 마을 족장의 팔을 붙잡고 계곡으로 내려가 창으로 계곡에다 선을 긋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 다음 그 선의 양쪽 땅에서 나온 흙덩어리를 족장에게 각각 하나씩 주었어요. 그러자 모든 주민이 계곡 아래로 내려와 악마처럼 소리를 질렀어요. 이어 드래벗이 말했어요. ‘가서 땅을 파고 열매를 맺고 번성하라.’ 그들은 그 말뜻을 알지 못했으나 그렇게 했어요. 이어 우리는 그들에게 빵, 물, 불, 우상 등을 가리키는 그들의 단어를 물었고, 드래벗은 각 마을의 사제를 우상 앞으로 데려가서, 그가 거기 앉아 주민들을 재판하라고 하면서 만약 일이 잘못되면 사제는 총살당한다고 말했어요.”
---「왕이 되려 한 남자」중에서
“전에는 이렇게 나쁘지 않았잖아.” 주디는 검은 양의 비행 리스트를 듣고서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나쁘게 된 거야?”
“모르겠어.” 검은 양이 대답했다. “나는 나쁘지 않아. 단지 내가 정신 나갈 정도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내가 한 것을 알아. 그래서 그걸 말하려고 했을 뿐이야. 그런데 해리는 언제나 그걸 약간 다르게 말하고 앤티 로사는 내가 하는 말은 전혀 믿지 않아. 오, 주! 너까지 나를 나쁘다고 말하지 마.”
---「매애, 매애, 검은 양」중에서
아미라는 토타가 태어난 방에 누워 있었다. 홀든이 들어가도 아미라는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은 아주 외로운 것이어서, 아주 멀리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에는 안개 같은 경계지에 그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그곳까지 따라갈 수가 없다. 검은 콜레라는 그 일을 조용히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해치웠다. 죽음의 천사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은 것처럼, 아미라는 생명으로부터 밀려 나가고 있었다. 가쁜 호흡은 그녀가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눈과 입은 홀든의 키스에 반응하지 않았다. 말해 줄 수도 뭔가 해 줄 수도 없었다. 홀든은 기다리면서 고통받을 뿐이었다. 장마의 첫 빗방울이 지붕 위에 떨어졌고 그는 건조한 도시에서 내지르는 기쁨의 외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교회의 승인 없이」중에서
남아 있던 양심을 나는 모두 잃었다. 내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나는 내 펜으로 모든 것을 기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내가 방금 써 놓은 것이 즉각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청년의 인생에서는 어떤 특정한 순간이 있다. 가령 아주 큰 슬픔과 죄악으로 인해 그의 내부에 있는 모든 소년의 정신이 불태워져 사라져 버리고 그리하여 그는 한 단계 승진하여 좀 더 슬픔이 많은 성인 남자의 상태로 격상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도의 대낮이 양극단을 조절해 주는 회색빛 황혼도 없이 어두운 밤으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고통이 여느 남자들의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에서 찾아오는 고통보다 열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고 한다면, 나의 상태를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덩컨 패러니스의 꿈」중에서
“당신은 아이들을 좋아하나요?”
나는 아이들을 아예 미워하지는 못하는 이유 한두 가지를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물론, 물론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이해하겠군요. 내가 당신에게 저 차를 정원으로 한두 번 천천히 왔다 갔다 해 달라고 요청해도 어리석다고 하지 않으시겠지요. 아이들은 차를 보는 걸 좋아할 거예요. 애들은 보는 게 별로 없어요, 불쌍한 것들. 우린 아이들의 삶을 즐겁게 만들려고 애를 써요. 하지만?” 그녀는 양손을 숲 쪽으로 내뻗었다. “우린 여기서 세상과 너무 떨어져 있어요.”
---「‘그들’」중에서
“이제 알아냈다!” 톰이 무릎을 찰싹 치면서 말했다. “휘트기프트의 피가 지속되는 한, 그녀의 종자가 영원히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약속했지. 재난이 이 땅에 생기지 않고, 딸이 한숨을 짓지 않고, 밤이 무서움을 안겨 주지 않고, 공포가 피해를 입히지 않고, 피해가 죄악을 만들어 내지 않고, 그 어떤 여자도 바보를 낳지 않게 해 주는 그런 종자.”
“그게 바로 나 아니에요?” 비보이가 말했다. 그는 건조실 문을 응시하는 9월의 보름달이 만들어 내는 은빛 네모 그늘에 앉아 있었다.
“우리 애가 다른 애들과 같지 않다는 걸 발견했을 때, 아내는 그와 똑같은 말을 내게 해 주었어. 하지만 자네가 그런 종자를 어떻게 알아보는지 난 이해가 안 돼.”
---「‘딤처치 야반도주’」중에서
마이클은 그 비밀을 아주 충성스럽게 지켰으나, 헬렌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설명했다. 마이클은 그 얘기를 듣고 불같이 화를 냈다.
“왜 말했어? 왜 말했어?” 그가 화를 벌컥 낸 끝에 물었다.
“왜냐하면 진실을 말하는 게 언제나 가장 좋기 때문이야.” 헬렌이 침대에서 몸을 뒤흔드는 아이의 어깨를 팔로 감싸면서 대답했다.
“좋아. 하지만 진실이 미우면 난 그게 멋지다고 생각 안 해. 이제 그렇게 말해 버렸으니 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잠잘 때 침대에서도.”
“그건 좀 너무하지 않니?” 헬렌이 부드럽게 말했다.
“싫어! 싫어! 내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이제 나도 복수할 거야. 내가 살아 있는 한 기분 나쁘게 할 거야!” (…)
헬렌은 숨을 잘 쉬지 못하면서 문 쪽으로 걸어갔으나 “엄마! 엄마!” 하는 슬픈 소리에 이끌려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둘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정원사」중에서
비록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은 있었지만. 해리는 또 다른 평온한 밤을 보냈어. 그게 나를 힘내게 했지. 주말이 되자 해리는 거의 회복이 된 듯했어. 그의 외부든 내부든 아프지 않았어. 베 시가 길 위쪽으로 갔을 때 나는 세탁장에서 무릎을 꿇고 거의 쓰러질 뻔했어. ‘내가 해냈어요. 나의 남자여. 당신은 그걸 알지도 못한 채 나로부터 좋은 힘을 얻게 될 거야.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오 하느님, 제가 해리를 위해 오래 살게 해 주세요!’ 내가 말했어. 하지만 그게 나의 고통을 진정시켜 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