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자마자 나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소리야, 어디 가는 거야? 숙제는 다 한 거니?"
엄마의 목소리가 소프라노처럼 올라갔다.
"쟤는 왜 저런지 몰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멍하니 딴 생각만 하고."
"쉿, 조용히 해요. 애가 듣겠어요."
"아니, 뭐 들으면 대수예요. 들으라고 하는 소린데. 내가 낳았지만 정말 속을 알 수 없어. 고집은 또 왜 저렇게 센지. 다니라는 학원도 안 다니고."
엄마의 잔소리가 계속 내 등 뒤를 따라온다.
"내일은 놀 생각하지 말고 밀린 학습지나 다 풀어놔!"
정말 엄마가 나를 낳기는 한 걸까? 엄마도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나도 의심이 간다. 난 아무리 봐도 엄마랑 닮은 게 하나도 없다.
옥상에 올라오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치, 공부 못하는 게 뭐 죈가?"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난 공부만 못하는 게 아니다. 마리 언니처럼 말도 조리 있게 하지 못하고, 주리처럼 옷도 세련되게 입지도 못한다. 엉뚱한 말만 하고, 공상에 빠져 허우적대기나 하고-이건 마리 언니가 나에게 한 말이다. 둘째 언니는 정말 돌연변이인가 봐-이건 주리가 한 말이다. 우리랑 똑같은 옷을 입어도 어쩜 저렇게 촌스럽냐-이건 마리 언니와 주리가 속닥거리는 말을 내가 어쩌다 들은 것이다.
"딸딸이네 청국장 집 손녀들은 어쩜 그렇게 인물이 좋은지."
"옛날부터 그래서 딸부자 집 딸들은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말도 있잖아."
시장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 제일 듣기 싫다. 그 말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난 잘하는 거 하나도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가운데 낀 그럭저럭 둘째 딸이다. --- pp.18~20
"미안하지만 이왕 꺼내준 김에 말이야, 오늘 배울 곳까지 펴 주면 더 고마울 것 같은데."
그때 환희 옆자리에 앉은 건이가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펴 주지 마, 펴 주지마. 꼭 그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 배울 진도에 맞춰 수학책과 수학 익힘책을 환희 책상에 펼쳐놓았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미리미리 수업할 준비를 하는 것을 학생이 갖춰야할 예의라고 늘 말씀하신다. 책을 펴주고 나서 자리에 돌아오면서, 나는 흘깃 환희네 아이들-짱클럽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웃고 있었다. 늘 환희를 에워싸고 다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꼭 왕비나 공주를 쫓아다니는 시녀 같다. 이름하여 짱조아 클럽-장환희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반 아이들 중에서 그 클럽에 끼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꽤 많다. 하지만 짱조아 클럽에 들고나는 것은 모두 환희 마음대로이다. 환희가 '너 우리
클럽에 들어올래?'하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들어간다. 환희가 '너, 정말 재수 없어.'하면 그 날로 짱조아 클럽에서 퇴출당하는 것이다.
그 아이들이 손바닥을 치며 프라이팬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기는 놀면서 나보고 책을 펴 달라고?'
난 조금, 아주 조금 화가 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환희랑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런데 환희가 나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마치 '넌 내 친구야, 그러니까 그 정도는 뭐~'하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내 맘이 말랑말랑 부드러워졌다. 환희가 어떤 일을 시켜도 다 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꼭 최면에 걸린 것 같았다. 내 맘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상태. 그렇게 몽롱한 상태로 있는 동안 수업 시작종이 울렸다.
"박소리, 오늘도 공부할 준비가 안 됐네. 책도 안 꺼내 놓고 말이야."
아참! 그러고 보니 내 책을 안 꺼낸 것이다. 나는 또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환희가 나를 인정해 줬으니까. 환희가 날 보고 방긋 웃어줬으니까. 수학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구름에 올라 둥둥 떠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생일선물로 한 달 동안 내 책 좀 꺼내줄래?"
수학 시간이 끝나자, 환희가 내게 말했다. 생일선물? 속으로 나는 이렇게 말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환희가 또 윙크를 하며 웃었다.
"너 나한테 아직까지 생일선물 안 줬잖아. 네가 책 꺼내주니까 공부가 더 잘 되더라."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환희가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짱조아 클럽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교실을 나갔다. --- pp.64~66
나중에 알고 보니, 옥상에 올라가 날마다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토마토를 가꾼 것은 건이와 건이 할아버지였다.
어느 날, 나에게 욕심이 생겼다. 이 하늘정원을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
"하늘정원에 오면 온갖 스트레스가 다 풀려."
"이곳에 누워서 하늘까지 보면 좋겠다."
학교 친구들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는데, 얼마 후 기적처럼 아이들이 편하게 누울 수 있는 커다란 나무 마루가 생겼다.
"이곳에서 숙제하면 정말 좋겠다"
누군가 또 이런 말을 했더니 얼마 후, 여러 명이 둘러앉아 공부할 수 있는 예쁜 책상과 의자가 생겼다. 하늘정원의 기적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하늘정원은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다. 누구나 와서 쉬었다 갈 수 있는 휴식처이다.
〈하늘정원 가는 길〉
마리 언니가 멋지게 팻말을 만들어 주었다. 역시 마리 언니의 솜씨는 뛰어나다.
자유 시장 사람들도 장사를 하다 지치고 힘들면 올라와 쉬곤 한다. 그때마다 시장 사람들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이제 하늘정원은 시장 안의 명소가 되었다.
"소리야, 내려와 봐."
엄마가 1층 가게에서 옥상에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휴, 또 심부름할 일이 생겼나 보군. 예, 알았어요. 내려가요."
가게에 들어서자 난 깜짝 놀랐다. 환희, 환희가 와 있었다. 환희 옆에는 환희 엄마랑 그리고 새 아빠가 될 그 멋진 신사분이 서 계셨다.
"여기가 그 유명한 딸딸이네 청국장집입니까? 제가 살고 있는 서울에까지도 소문이 퍼져서 제가 그것 먹으려고 왔다는 것 아닙니까?"
"아, 그러십니까. 여기가 바로 그 청국장집이 맞습니다. 어서 들어오시라요."
할머니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 청국장 먹을 줄 알아?"
속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 단추 찾으러 왔어."
환희가 하얀 원피스 앞섶을 가리켰다. 단추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아, 그 은빛 단추. 나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 없다. 아, 이 옷이 아니었나? 그때 입었던 옷이 뭐였지?
내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으니까 환희가 웃으며 말했다.
"내 단추 찾을 때까지 매일 올 거야. 알았지?"
환희의 말에 내 마음이 환해졌다. 시원한 박하사탕을 입에 문 것처럼…….
--- pp.113~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