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왜 ‘용기’가 필요할까요? 선입견을 따르면 즉,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편한데 굳이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요? 그것만으로 ‘용기’라는 단어까지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세력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자기 생각대로 조정하려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권력이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 p.12, 들어가는 말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하여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 외의 다양한 ‘좋음’은 가치가 없는 걸까요? 예를 들어 ‘시험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서 성공하려는 것’, ‘착실히 일하고 돈을 벌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을 꾸리는 것’ 등은 모두 가치 없는 일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의 ‘좋음’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사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것’,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선과 함께 다양한 ‘좋은 것’이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이 아닐까요? 칸트는 이러한 완전한 선을 최상선과 구별해서 ‘최고선(最高善)’이라고 불렀습니다.
--- p.41, 제2장 ‘자유’ 없이는 선악도 없다
철학자들이 선악에 대해 어떻게 논했는지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이미 선과 악을 알고 있습니다. 쓸쓸해 보이는 친구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다른 친구를 보면 착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반대로 누군가를 따돌리는 친구를 봤을 때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누군가는 친구에게 가식적으로 대한 것을 반성하며 사실은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하지요.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이미 선과 악에 관한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악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다 보면 ‘선악에 보편성이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존재하는가’, 또는 ‘도덕적인 선이 보편적이라면 왜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에 사로잡힙니다. 칸트 또한 이러한 물음에 대해 깊이 고민한 철학자였습니다.
--- p.75, 제3장 ‘선하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선하게 사는 사람이 행복으로부터 멀리 있고, 선하게 사는 것에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 세계에 던져져 그 인과관계를 모두 이해하지도 못한 채 즉,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선 자유와 자연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략)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실현 가능한 것이지만 ‘행복해지는 것’은 자기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앞선 고민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을 향해 마음을 모을 수는 있습니다.
--- p.98, 제3장 ‘선하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대우주를 마주하고 그 속에서 자신은 먼지처럼 작게 느껴지면서 감동할 때 우리는 무엇에 감동하는 걸까요?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망망대해를 보고 그 강인함에 압도되면서 감동할 때는 어떤가요? 숭고한 것은 자연 세계가 아니라 여러분 마음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같이 직접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경외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칸트는 그 정체를 『실천이성비판』의 맺음말에서 ‘밤하늘의 빛나는 별’과 함께 ‘내 안의 도덕법칙’을 꼽았습니다. (중략) 우리는 작은 존재이지만 인류가 함께 노력함으로써 대우주의 법칙을 조금씩 밝혀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약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선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 p.119, 제4장 자연세계에서 자유롭게 산다?
‘자기 완전성’과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사회를 그려 봅시다. (중략) 이런 사회에서는 여러분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게 됩니다. 물론 그들 또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원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행복을 추구할 때 그들의 행복과 부딪치지 않도록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면 우리의 행복이 실현되지 않을까요? 이것이야말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삶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인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는, 최고선은 가장 선한 것보다 더 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는 일은 영원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멀리 있는 영원한 평화를 바라보며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구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최고선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기 완전성’과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p.155, 제5장 최고선을 지향하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