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의 다른 아이들은 정말 키가 많이 자랐다. 강태는 일 년 만에 무려 5센티미터나 자랐지만 재구만 그대로였다. 단 1밀리미터도 자라지 않은 것이다. 관장님은 열심히, 꾸준히 운동하면 그동안 못 자란 키가 후딱 자란다고 했다. 관장님 외에도 곧 자란다, 금방 자란다 하는 말들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키가 제대로 자라려면 영양소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이것도 상식이다. 키가 크기 위해 바다의 멸치란 멸치는 재구가 다 먹은 것만같다. 끈적끈적한 다시마도 코를 막고 삼켰다. 당근, 브로콜리, 호박 등 야채는 물론 각종 과일이 식탁에 빠진 적이 없다. 청과물 가게를 차릴 정도로 먹었다.
키를 크게 한다는 약은 한약이든 양약이든 가리지 않았다. 총명탕, 육골즙, 멀티-비타민 캡슐, 오메가-3, 종합 영양제 등등. 이름을 눈 감고 달달 외울 정도다. 종합 병원에서 다리 관절 성장판 검사도 했고, 키를 키운다는 맞춤 물리 치료도 받았다. 또 버스를 네 시간이나 타고 강원도의 작은 산골 마을을 찾아간 적도 있다. 키를 크게 해 준다고 소문난 한의사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에서 끔찍하게 싫어하는 침을 양쪽 무릎에 스무 대나 맞았다. 벌에 쏘인 것처럼 아팠지만 꾹 참았다.
얼마 전에는 비싼 호르몬 주사를 두 번이나 맞았다. 엄마는 주사 맞는 값이 엄마 월급 만큼이나 비싸 다고 했다. 재구는 엄마의 월급이 얼마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작은 봉제 공장에서 일하시는 엄마 월급만큼이라면 정말 비싼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아파트 거실에는 키 재는 기구가 놓여 있다. 컴퓨터 게임의 악당 몬스터처럼 우뚝 버티고 섰다.
'자, 가방 내려놓기 전에 키부터 재 봐야지, 윤재구! 흐흐흐~.'
재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키 재는 게 야채 반찬 먹는 것보다 더 싫었다. 하지만 호르몬 주사를 맞은 이후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키를 쟀다. 엄마를 실망시키기 싫었으니까. 그러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또 일주일
에 한 번…….
병원에서 호르몬 주사를 맞은 지 한 달 지난 즈음, 재구는 더 이상 키를 재 보지 않았다. 키 재는 기계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호르몬 주사까지 효과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pp.18-21
무안해진 규빈이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읽는 척했다. 다른 아이들도 대본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교실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콩이니까 잘 구를 것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재구가 중얼거렸다.
"뭐가 구른다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나은이 재구를 쳐다보았다.
"아니, 내 말은……, 콩은 동글동글하니까 잘 구를 거 아냐. 그러니까 콩처럼 만든 의상을 입고, 잭 뒤에서 굴러서 따라가게 하면 되지 않을까?"
"어,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재구의 설명에 태현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콩이 데굴데굴 굴러 가면 보기에도 정말 재미있겠다!"
다들 재구의 아이디어가 좋다며 입을 모았다. 의외의 아이들 반응에 재구는 얼떨떨했다. 막상 말해 놓고도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나않을까 가슴 졸였던 것이다.
"짜아식, 배역이 맘에 안 든다고 혼자 연구 많이 했나보네?"
규빈이 비아냥거렸다.
"나도 동감이야.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애니메이션 보는 내내 고민했었는데, 재구 너 때문에 문제가 쉽게 해결됐어."
초롱까지 칭찬을 하자 재구는 어쩔 줄 몰랐다. 전날의 안 좋은 기억도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가슴 한쪽에서 불끈하는 게 느껴졌다. 이런 걸 자신감이라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콩 배역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 pp.89-90
"너희들처럼, 처음엔 나도 연극에서 좋은 배역을 맡고 싶었어.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거인이나 암소 같은 역할은 얼마든지 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키가 작다고 콩 배역을 맡게 되었을 땐 정말 화가 났어. 그러다가 혼자 곰곰히 생각해 봤어. 그리고 알게 됐지. 내 키가
작아서 거기에 딱 맞는 콩 역할을 맡았다는 걸……."
재구가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말했다. 이상하게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모두들 조용히 재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러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콩 배역이라도 나한테 꼭 맞는 배역이라면, 주인공만큼 멋있겠다는 생각도 들
었어. 어차피 주인공 역할은 나보다 규빈이가 훨씬 잘 어울리니까."
느닷없는 칭찬에 규빈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 안 하고 내 콩 역할만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어. 적어도 너희들은 나보다 다 좋은 배역을 맡은 거잖아. 대사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보다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생각해. 만약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맡은 역할들만 잘 연습한다면, 우리 연극 공연은
아무 문제없이 정말 잘 될 거라고 믿어."
말을 마친 재구가 침을 꼴딱 삼켰다. 무슨 말이 나올까 하고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재구도 초조한 얼굴로 아이들 표정만 살폈다. 잠시 후, 엄마 역할을 맡은 미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방에서 앞치마 의상을 꺼내 허리에 둘렀다. 태현도 책상 위에 던져놓았던 얼룩덜룩한 암소 의상을 집어 들었다.
"너희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나 연습 빨리 끝내고 미술 학원 가야 된단 말이야."
그제야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책상을 교실 뒤편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지혜와 나은이 책상을 마주 들며 속삭였다.
"재구 콩 의상 귀엽지 않니?"
"그래. 진짜 잘 만들었어."
"초롱이가 그러는데, 의상은 엄마가 만들었지만 장식은 재구가 직접 붙였대."
"어머? 윤재구한테 그런 숨겨진 재능이 있었단 말이야?"
둘의 대화를 엿들은 재구가 수줍게 웃었다.
아이들은 복도 창 밖에서 선생님과 초롱이 보고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조금 전까지 교실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지켜보았던 거다.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초롱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초롱도 가만히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얼굴에 방긋 웃음도 피었다.
--- pp.12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