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처음부터 심각할 필요는 없다
힘을 빼야 물에 뜬다. 그래야 힘들지 않다. 빨리 가겠다는 생각도,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욕심도 없이 그저 한 단계씩 차근차근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돌고래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수영을 시작했다.
나이 마흔아홉에 운동을 배우는 건 난생 처음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운동이 너무 싫다. 대체 왜 공을 따라다니며 헉헉대며 뛰는 걸까? 왜 죽을 것 같은 고통이라고 하소연하며 두 시간을 넘게 악착같이 달리냐는 말이다. 가장 압권은 헬스클럽에서 무거운 걸 들었다 놨다 하든지 제자리에서 한 시간 넘게 뛰는 것이다. 경악할만한 이질감이다.
그런 내가 수영을 시작한 것은 세월에 따라 몸이 급격히 약해지는 현상을 뼛속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진짜 뼈가 아프다. 무릎 뼈가. 지인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나이 때문이란다. 뒷말은 다들 똑같다. 그러기에 진즉 운동을 하라니까. 그게 다 몸에 대한 보험이고 투자이며...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는데, 듣기 싫은 잔소리를 내가 뭐 크게 잘못한 양 매번 듣자니 이 또한 고역이다.
그래서 영양제나 보약을 먹는 것보다 딱 오만 배라는 운동의 효과를 믿어보기로 한다. 등 떠밀리듯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일 강습반이다. 일단 시작하면 제대로 하든지 안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객기를 여기서조차 부렸다. 매일 하지 뭐. 뜸벙뜸벙 하면 그게 운동이 되나? 할 수 있을 때 바짝 해야... 후회 하는 데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대충 할 걸, 남자들이 군대 가면 이런 기분일까. 수영장물도 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생초보인 나는 음파음파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부터 시작한다. 그 다음엔 물에 뜨기. 사람이 물에 뜬다는 걸 내 몸으로 증명해 보다니. 놀랍군.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은 킥보드를 의지해 어쨌든 발차기로 레인 저쪽까지 갔다 와야 하는 일이다. 수없이 물을 먹고 머리를 더 집어넣어라 어깨를 내리라는 강사의 지적에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 혼자 지옥훈련이라 이름 지은 수영이 점차 호기심과 친밀감까지 느끼게 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수영을 배우는 과정이 살아가는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최근 깨닫는다. 고급반에서 거의 선수 아닐까 싶게 수영을 하는 그들은 참 근사하다. 나는 초급반이니 저기까지 가기에는 대체 얼마가 걸릴지....그러나 쉬지 않는다면 반드시 저 레인에서 저런 폼으로 수영을 할 수 있겠지. 지금이야 물에 떠 있는 건지 앞으로 나가는 건지 구분조차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 과정을 생략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처음에는 온몸이 아팠다. 물에 잘 뜨지도 않고 특히 발이 자꾸 가라앉는다. 온몸에 힘을 줘서 그렇단다. 일부러 힘주는 게 아닌데, 분명히 힘을 뺐다고 생각했는데도 그게 생각뿐이지, 사실 힘을 바짝 주고 있으니 몸은 몸대로 아프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절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뭘 잘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너무 힘들어 물에 그냥 떠 있었더니 오히려 더 쉽게 앞으로 나아간다. 별로 힘들지도 않다. 이거네!
20년 넘는 직장생활을 온몸에 힘을 꽉 준 채 해냈던 건 아닌가 싶다. 뭐든지 참 잘하고 싶었다. 남들보다 속도를 냈다. 그게 나다운 거라 생각했다. 두 군데 기업에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 ‘여성 최초’ 아니면 최소한 ‘여성으로는 아주 드문’이라는 타이틀이라도 붙여야 직성이 풀렸다. 첫 아이를 낳을 때, 근무 중 산통이 시작되는 기색을 느끼고 일일이 팀원들을 불러 업무 인수인계 내용을 다시 확인한 후 병원에 가서 애기를 낳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 스스로 왜 그렇게까지 무례했을까 싶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게 아주 당연하고 잘하는 일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매사에 그렇게 살았다. 아주 잘 산다고 확신하며.
수영으로 따지자면 나는 초급 과정에 있으면서 중급으로 어떻게 최대한 빨리 가느냐에 안달복달하며 지냈다. 어떻게 과정을 효과적으로 생략하며 줄여볼까 하는데 골몰했다. 이제 막 물에 뜨면서 돌고래처럼 물살을 가르는 다른 이들을 보며 부러웠다. 처음에는 물도 먹고, 가라앉을까 힘주다 몸살도 걸리고, 힘들면 잠시 서서 쉬기도 해야 하는 걸 모르는 채 지냈다.
그 덕분이었을까. 남들보다 비교적 빨리 효과적으로 성공하고 기업의 임원이 되었다. 질주하던 존재는 사고가 나면 대형이다. 과정을 너무 생략하고 힘을 빼지 않은 까닭이다.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나에게 떨어졌다. 사랑하는 아들이 아프면서 나의 인생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자진한 일은 아니었으나 인생의 하프타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전력으로 달리던 그 길에서 비켜섰다. 콩나물 꼬리 하나 다듬어 보지 않았던 내가 어설픈 전업주부 흉내를 내며 된장찌개를 끓이고, 아이가 깜박 잊고 놔두고 간 체육복을 들고 뛰고, 음식쓰레기를 효과적으로 줄이기에 골몰했다. 20년 동안 일만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을 돌보고, 아들의 치유를 온몸으로 기도하며, 또한 그동안 채찍질만 했던 나 자신을 사랑하기에 꼬박 500일을 보냈다.
평소에는 무심히 스친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고 작은 인연들에 귀함을 느끼고 인생에 대해 하나씩 깨달아가는 건 이제야 나라는 존재의 힘을 빼고 자연스러워졌기 때문 아닐까. 급브레이크를 걸어 준 나의 아이가 완전히 치유된 지금, 나는 인생이 너무 아름답다고 외치고 싶다. 그리고 이제 내 인생의 2막을 다시 시작한다.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내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나의 치열한 직장생활과 슈퍼맘을 자처한 세월들을 사람들에게 얘기하며 이렇게 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기도 어정쩡했다.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도 안하기로 한다. 그저 그 젊은 날은 그대로 열심히 살았고, 예기치 않았던 인생의 폭풍 앞에서는 울며불며 엎드려 있지 않고 씩씩하게 헤쳐 나온 내가 있을 뿐이다.
젊은 날이나 그 이후나 일관되게 나의 관심은 나답게 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마다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겸손하고 노련하게 나다운 인생을 새롭게 설계해 보고자 하는 설렘이 이 책의 여기저기 숨어 있다. 내 인생의 전반전이 책을 읽는 그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된다면 그 또한 내게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임을 고백한다.
힘을 빼야 물에 뜬다. 그래야 힘들지 않다. 빨리 가겠다는 생각도, 멋지게 보여야 한다는 욕심도 없이 그저 한 단계씩 차근차근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돌고래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미리부터 고개 빼고 저쪽 레인을 자꾸 쳐다볼 일이 아니다. 지금은 짠물을 먹어도, 폼이 엉망이라도 그 단계에 집중하고 성실해야 최선이다. 이왕이면 힘들다고 생각되는 그 과정조차 즐기면 수지맞는 장사이다.
오늘도 직장이라는 격랑 속에 분투하고 있는 샐러리맨들과 슈퍼맘들에게 가장 나답게 살기 위한 용기를 낼 것을 뜨겁게 응원하며. 유 세 미
--- 「프롤로그」중에서
1 아픈 아들이 내 스승입니다
오만방자하게 살던 내 인생에 하루아침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이후 폭풍 같은 고난은 내게 인생을 다시 가르쳤다.
처음에는 천식이라고 했다. 민혁이가 학교에서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다며 조퇴한 날, 동네병원 내과에서 내린 진단이었다. 약을 처방받고 집에 와서 쉬면 괜찮아지려니 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바쁜 업무 때문에 아들의 조퇴 소식을 건성으로 들어 넘긴 것이 사실이다.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를 막 시작하던 때였다. 학교에서 중요한 시기라고 분위기를 몰아가니 긴장해서 그렇겠거니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뒤이어 내 인생을 덮칠 거대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민혁이 담임입니다. 학교에서 아이가 쓰러져서 지금 앰뷸런스로 이송 중입니다. 병원으로 오세요.”
청천벽력같이 앰뷸런스라니.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지 자세한 얘기도 없이 선생님의 당황한 목소리는 끊겼다. 회의를 중단하고 분당 서울대병원으로 내달렸다. 팔다리가 후들거려 운전을 못하겠다. 팀 직원이 대신 차를 몰았다. 응급실은 대낮부터 북새통이다. 허둥지둥 눈으로 아이를 찾으니 산소마스크를 한 채 응급실 한쪽 구석에 누워 있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쓰러져서 호흡곤란이 왔어요. 앰뷸런스 이송 중에도 숨을 제대로 못 쉽니다.”
아들은 양말만 신은 채 실려 왔다. 옆에 있는 친구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풀죽어 아들 운동화를 들고 서 있다. 의식은 돌아왔는지 민혁이가 나를 돌아다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그 와중에도 어디를 크게 다쳐서 온 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천식이 심해서 호흡곤란인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아들은 학교에 도저히 못 가겠다고 했다. 숨쉬기가 거북하고 힘들다고 했다. 일단 좀 쉬라고 말하고 출근하면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지만 애써 불안한 마음을 떨쳤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집에서 쉬던 아이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호흡이 곤란한 것은 물론이고 심한 경련을 동반한 것이다. 누가 보면 간질이라고 할 만한 발작은 30분 이상 계속되었고, 아이는 마치 죽을 것처럼 눈을 뒤집고 괴로워했다.
119를 부르고 병원으로 이송하고 검사는 시작되었다. 발작이 심해지자 뇌 신경계부터 시작한 체크는 며칠이 계속되었다. MRI(자기공명영상진단)를 비롯해 온갖 검사란 검사는 다했다. 한 가지 검사가 끝나고 결과가 나올 때마다 ‘이상 없음’ 소견. 다행이긴 한데 그럼 뭐란 말인가?
검사를 위한 입원과 퇴원을 포함해 일주일 이상 병명 미상으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 사이에도 아들은 하루 몇 번씩 발작을 일으켜 내 심장을 졸아붙게 만들었다. 24시간 뇌파검사는 1인 병실에서 거의 온몸에 모니터를 주렁주렁 달고 진행한다. 최후로 진행한 이 검사의 목적은 아이의 발작이 페이크(fake)인지, 뇌 쪽의 문제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아들은 온몸에 모니터용 검사기를 달고 신기한지 셀카를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재미있냐? 넌. 난 이렇게 애간장이 타는데….
결과는 공황장애. 난 이때까지 그런 병명은 들어본 일도 없었다. 가수 김장훈이 겪는다는 그거? 연예인병? 근데 내 아들이 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것도 공황장애 환자 중 상위 1%안에 들만큼 심한 상태란다. 그러니까 뜬금없이 왜 그런 병에 내 아들이 걸리느냔 말이다. 증상이 워낙 심하니 병원에 일주일 정도 입원하라고 했다. 퇴원해서는 심리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 내 생애에 정신과를 와 보다니. 기가 찼다. 최근에는 정신과라는 어감이 좋지 않아서인지 정신건강의학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 일단 마음이 놓이긴 했다. 발작을 하더라도 병원 안이라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
공황장애는 쉽게 말해 몸에 울리는 잘못된 경보이다. 환자에 따라 질식할 것 같은 공포, 과호흡(過呼吸), 맥박이 빨리 뛰고, 오한, 어지러움과 구토 증세를 동반할 수 있다. 미칠 것 같은 불안감과 환청, 자살충동, 자기비하, 목을 밧줄로 조르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공황발작이 언제 재발할지 항상 불안하기 때문에 외출을 할 수도 없고 광장공포증도 온다. 처음에는 발작 자체가 무섭지만 다시 발작이 일어날까 긴장하는 예기(豫期)불안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운 것이 이 병의 무서움이라고 한다.
내 아들의 경우 이런 모든 증상을 남김없이 동시다발적으로 겪게 되었다. 병명을 알고 나서 아들이 받은 쇼크가 가장 컸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점에 병원 신세라니. 스스로 어이없었을 것이다. 일주일 만에 퇴원하고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병명만 확인했다는 것뿐이지, 이제부터 원인을 밝히고 치료를 병행하는 지루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퇴원 이후 집에서 한발자국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 학교를 갈 수도, 집 앞 편의점에 나갈 수조차 없었다. 일단 병원 통원치료와 심리치료를 병행하기로 계획을 세우면서도 나는 공황장애에 대해 그때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발병하면 기본 일 년은 앓고요, 보통 삼 년 정도 걸려요. 어릴수록 더 심하죠. 꾸준히 치료하며 기다리는 수밖에요.”
심리치료사의 이야기에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한 달 정도면 낫겠거니, 일주일 병원치료면 되겠거니 막연하게 예상했다. 일 년? 삼 년? 내 아들이 지금 수험생이거든요?
“이 병은 무엇보다 가족들이나 보호자의 이해가 절대 필요해요. 증세가 업 다운은 있지만 장기간 지속되니 가족들을 굉장히 지치게 하는 병입니다.”
뭐든 일이 터지면 자료부터 찾는 습관에 발동이 걸렸다. 그때부터 밤새도록 공황장애라는 병에 대한 자료를 뒤졌다. 환자가 이렇게 많다니. 대한민국에 공황장애 환자가 2015년을 기준으로 10만 명이 훨씬 넘는다. 공식적인 통계가 이러니 수치에 잡히지 않은 환자들까지 하면 매년 급속도로 늘어나는 병이라고 봐야 옳다. 실제 동네마다 청소년을 위한 심리치료센터가 들어서 있는 걸 보면 이런 심각한 추세가 증명된다. 청소년 우울증, 불안, 강박, 공황장애로 센터를 찾는 아이들과 부모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그래도 3개월 아니, 많이 양보해서 6개월이면 될 줄 알았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심리치료가 시작되고 나 역시 심문당하는 것처럼 병원에서 장시간 의사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아이의 성장과정 중의 문제점, 직장생활로 인한 엄마의 부재 등. 나는 자신 있었다. 나는 성실하게 살았으니 아이에게 모범이 되는 엄마였다. 직장생활을 하느라 직접 아이들을 양육하지는 못했으나 전직 초등학교 교사 부부인 부모님이 누구보다 완벽하게 아이들을 키워주셨다. 그 정성에 부응하듯 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대회의 수상 경력은 물론, 성적 우수자로 모범학생의 샘플과도 같은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
아들 때문에 속 썩어 본 적이 그동안 거의 없었다. 학년이 바뀔 때 마다 담임선생님들의 아들 사랑은 유난했다. 더할 수 없이 스마트하고 착한 아들. 그러나 그 아들의 심리치료 상담결과는 나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우리 엄마가 회사에서 임원 하려는 데 미쳐서 나를 그냥 방치했어요.” 아주 시니컬하게 웃으며 내 아들이 직접 한 얘기라고 결과지에 적혀 있는 것을 읽으면서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민혁이가? 확실해요? 얘는 ‘미쳐서’ 같은 단어는 쓰지 않는데요?
“그건 부모님 착각입니다. 환자는 엄마에 대해 적대감이 있어요.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거죠. 아마 오래 전부터였을 겁니다.”
“그런 불만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아주 착하거든요. 조부모님이 남 부럽지 않게 키우고 계시고…” 나는 점점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변명이라도 해 봐야 했다.
“그럼 아예 지들이 밥해먹고 다니는 애들은 다 공황장애 걸리겠네요. 얘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케어하며 키웠다니까요.”
“다른 애들이랑 비교하지 마세요. 걔들은 걔들이고 얘는 얘입니다. 다 다르거든요. 결과가 그렇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셔야 회복할 방법이 나옵니다.”
엄마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 거라 믿었던 내 아들은 무의식적으로 내게 적대감과 혼자 방치되었다는 외로움이 마음속으로 병이 되고 있었단다. 그 깊은 병 속으로 도피해 버린 아들과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결국 오만방자하게 살던 내 인생에 하루아침에 브레이크가 걸린 셈이다. 이후 폭풍 같은 고난은 내게 인생을 다시 가르쳤다. 결국 아픈 아들이 내 스승이 되어 버렸다고 해야 할까.
--- 「Part 1 가끔은 욕심 내려놓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