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국민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부산 시장 선거에 나갔던 김정길, 짧게는 20년에서 길게는 40년을 넘는 세월, 지역주의와 맞서 싸운 김정길은 부산의 당감동 독거노인 한 사람의 눈물도 제대로 닦아주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노인을 위해 울어주는 일 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나는 그를 위해 눈물 흘리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아프게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를 위해 흘리는 수백만의 눈물 속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내일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이 노인을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은 지상에 단 한 사람, 나 한 사람뿐이었다. 지금은 나라도 이 노인을 위해 울어주어야 했다. ---p.19
민주당에 남은 의원은 결국 노무현과 나 김정길, 둘 뿐이었다. 무소속인 이철, 박찬종 의원과 장기욱 전 의원만이 우리와 함께 했다.
모두가 떠난 한겨울 허허벌판에 노무현과 나 두 사람만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는 버팀목이었다. 만일 노무현마저도 없었다면 3당 합당 이후의 그 모진 세월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가장 힘든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동지였다.
노 의원이 농담처럼 말했다.
“저야 국회의원 안 해도 변호사 해서 먹고 살 수야 있습니다만, 김 의원님은 앞으로 뭐해서 먹고 살려고 안 따라갔습니까?”
창밖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p.131
사람과 사람이 모여 숲이 되고 있었다. 슬픈 누군가에게 다른 누군가는 그늘이 되고, 지친 누군가에겐 그 곁의 누군가는 언덕이 되고 있었다.
나는 슬픔과 분노가 흘러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다. 예전엔 분노했으나 무기력했던 사람들, 그 전엔 좌절하고 포기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기대어 희망을 찾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의 가슴마다 매단 검은 리본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 서울시청 광장을 가득 메운 노란 풍선들 속에서 나는 수많은 ‘노무현들’을 보았다.
사람들 속에 그가 있었다.
그래, 우리가 노무현이다. 노무현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을 가슴에 품은 우리가 바로 희망이다. 사람이 희망이다. 나는 생각하였다.---p.282
친구여, 당신은 그래도 참 행복한 사람이오. 누군가 말하기를 “세상에 올 때는 홀로 울고 오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사람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는데, 당신을 위해 울어주는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참 행복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소.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였던 평민, 거듭된 실패를 통해 가장 큰 성공을 이루었던 비주류였던 당신, 가장 높은 곳에 올랐지만 늘 가장 낮은 곳으로 눈높이를 맞추었던 친구 같은 대통령이었던 당신. 당신이 꿈꾸었던 그 꿈들이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환한 웃음과 함께, 촛불과 함께 피어나는 것을 요 며칠 사이 나는 지켜보았소. 그래서 비로소 나도 내 오랜 친구를 편히 보내주기로 마음먹게 되었소.
편히 가시오, 내 친구여. 이제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훌훌 털고 떠나소서, 내 평생의 동지여.
당신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 원칙이 반칙보다 우선하는 세상,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당신의 오랜 친구들, 그리고 이제 막 당신의 새로운 친구가 되기 시작한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몫일 터이니….---p.285
‘정치’란 원래,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다.
당선이라는 결과보다는, 낙선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추구했던 것이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얻는 것이 더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버림과 희생을 통해 노무현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고 이룬 것이 없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러나 20년 세월을 부산을 포기하지 않고 여섯 번이나 떨어지면서 온 몸으로 지역주의에 부딪쳐온 결과, 드디어 44.57%라는 의미 있는 균열을 만들었다. 기적의 시작을 만들었다. 이제는 할 수 있겠구나, 이제는 넘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부산 시민들과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그것이 지난 선거에서 내게 맡겨진 역할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노무현이 부엉이바위 위에서 남겨진 동지들에게 바랐던 마지막 바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20년을 지역주의와 맞서 싸워온 나는 절대로 민주당 간판을 포기할 수가 없다.
지금 다시 선택을 하라고 해도 나는 민주당 간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김정길의 길이다.---p.318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더 이상 눈물이 없는 대한민국이다. 부자에게는 명예가 돌아가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존엄이 지켜지는 그런 나라다. 병든 노인이 병원비가 무서워 병원에 가지 못하고, 아이들이 가난한 부모를 만난 죄로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나라. 애 키울 돈이 없어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한는 일이 없도록, 애를 봐줄 데가 없어 출산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아기를 낳고 키우는 문제는 국가에서 책임져 주는 나라. 부자에게는 명예를, 빈자에게는 존엄을 지켜주는 나라.---p.340
나는 우리 국민이 그런 신명과 그런 열정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제1항의 당연한 권리를 제대로 누렸으면 좋겠다.
더 이상 대한민국의 권력이 검찰이나 언론, 대기업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검찰 위에 국민, 언론 위에 국민, 기업 위에 국민, 대통령 위에 국민…. 모든 권력의 가장 꼭대기에는 언제나 국민이 있는 그런 세상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다시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즐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희망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희망을 찾는 일에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p.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