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순례의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처럼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 화려하고 요란한 세상에는 우리가 찾는 것이 없다. 즐거운 망명자로 살아야 한다. 다르게 사는 것이 영성의 길이다. 육체의 자랑이 가득한 화려한 도시보다 한 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광야가 그리스도인이 머물 곳이다. 우리는 영적 훈련이 필요하다. 세상에 물든 때를 날마다 벗겨내고 성화에 이르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앞으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더이상의 변질과 세속화를 거부하며 성화의 길로 가야 할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
--- 「프롤로그」중에서
봉사든 선교든 육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실히 봉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상태면 종교 생활 이상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은 영의 일이 아닌 육의 일입니다. 열심히 봉사를 해도 자기 열심과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일 뿐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면 영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되면 이 세상과 마귀와 육신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지 않으면 이 세상과 마귀와 육신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세상은 지금 육으로 가득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신은 자신의 배입니다. 삶의 목적이 육신의 만족에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종교 생활과 영의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돈과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봉사했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험에 든다면 그것은 자기 일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에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고, 상응하는 직분을 주지 않아서 상처 받았다고 교회를 옮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분 때문에 시험에 드는 이유는 자기 만족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보기에 아무리 대견해도 그 일은 육의 일이 될 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도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참 불행할 것입니다. 영이 눈을 뜨지 않으면 종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단지 교인일 뿐 영적으로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 pp. 24-25
우리는 모두 영에 속한 자들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잠시뿐인 육을 추구하다가 영원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돈 버는 것, 세상적인 출세를 위한 노력보다 영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영이 회복되어야 세상의 출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적인 명예와 권력과 물질을 가지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쇠약해져 있으면 죽은 시체와도 같습니다. 세상 문화의 힘에 의해서 육체의 정욕대로 살기 때문에 던져지는 대로 살 뿐입니다. 오늘날 화약고 같은 세상을 살면서 기름을 들고 불가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고 확 타고 끝이 날 것입니다. 죄의 밤이 깊어졌습니다. 덫이 사방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의 영을 훈련하지 않으면 세속화된 이 세상에서 살길이 없습니다.
--- pp. 47-48
풍요에 눈이 먼 현대인들은 하나님께 무릎 꿇는 시간보다 나가서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기를 원하고, 번 돈으로 즐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 보면 허무가 몰려옵니다. 허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것, 자기를 편안하게 해 주는 상품을 사야 합니다. 그래서 소비주의가 뒤따르고, 소비주의가 강화될수록 돈이 더 필요해집니다.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일을 하니까 더 피곤하고, 힘들고, 허무와 절망이 찾아옵니다. 또다시 허무를 채우기 위해서 물건을 구입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투자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허무를 해결하기 위해서 더 좋고, 더 나은 상품을 찾습니다. 하지만 초월적인 하늘의 신령한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허무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더 나은 떡, 더 많은 떡으로는 배를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떡을 추구하는 사람은 떡의 배신을 맛보게 됩니다. 팀 켈러의 책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두란노 역간)의 프롤로그 제목은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입니다. 자기가 만든 신이 자신을 만족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 pp. 66-67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라고 말합니다. ‘묵상’이라는 말 앞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가 묵상을 한다는 뜻입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만 성경을 보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성경을 묵상하십시오. 별미를 먹을 때나 돈을 벌 때의 즐거움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말씀을 묵상하는 즐거움’을 맛보아 아십시오.
--- pp. 80-81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다른 점은 그냥 사랑이 아닌 ‘거룩한 사랑’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죄인의 상태로는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걷어 내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친히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빠진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거룩을 이해하지 못하면 십자가를 알 수 없고, 십자가를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는 지점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을 빼고 사랑만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사랑과 거룩은 따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p. 90-91
중요한 것은 죄에 대해 민감한 태도입니다. 내가 죄에 민감한지, 아닌지는 회개 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 민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삶은 바리새적인 삶입니다. 즉 위선의 옷을 입고 자기 만족에 사로잡힌 삶입니다. 속에서는 냄새가 펄펄 풍기는데 겉만 단장한 거룩은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는 삶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고, 자기 행위에 스스로 만족한 채 살아가며, 자기 우월을 증명하기 위해신앙 생활을 하는 거짓된 삶일 뿐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면 위선의 탈을 쓰고 사는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장 정직한 삶은 바로 회개하는 삶입니다. 만약 회개 없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위선의 탈을 쓴 채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아니, 어떤 때는 하루에 열두 번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모아 두었다가 주일에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순간마다 해야 합니다.
--- pp. 107-108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장애인 부서에 가서 연약한 성도들을 섬기고, 연로하신 분들을 돕고, 노숙자들을 위해 봉사하십시오. 이 일들은 생각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몸으로 해야 합니다. 농어촌 봉사를 가거나 여름에 오지로 단기 선교를 가서 봉사하는 일도 모두 몸의 훈련 영역에 포함됩니다. 덥고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과 물질과 많은 헌신을 드려 현실과 부딪혀 몸을 훈련시키는 일입니다.
실제로 섬김과 봉사의 현장에 가는 것과 헌금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물론 물질을 드리는 것도 일종의 몸의 훈련 영역에 포함되지만, 상당한 대가를 치르며 몸으로 봉사하는 일은 예배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그런 경험이 점점 쌓일 때 우리의 육체가 거룩한 제물로 드려지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내 몸을 드린다는 것이 머리에 있는 이론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대가를 지불하고 땀을 흘리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며 더욱더 영적인 삶에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 pp. 141-142
죄의 힘의 지배 아래 육체의 모든 본성이 나를 끌고 가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갈등이 심화됩니다. 영에 속한 삶을 살고 싶은데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놓아 버리게 되고, 나중에는 멋있게 포장한 채 위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중적인 딜레마에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활동을 할 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 어떻게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은 원인데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몸은 길들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마음이 원하면 몸도 따라가는 영성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신성해야 합니다. 죄를 짓고자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까지 우리의 몸을 단련하고 수련해야 합니다.
훈련을 통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떼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일, 용서하는 일, 봉사하는 일, 내어 놓는 일이 쉬워져야 합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를 이룸으로 우리의 몸을 산 제물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쓰임 받아야 합니다.
--- pp. 160-161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기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기도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물론 특정한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것도 좋고, 특정한 시간에 특별한 시간을 내어 기도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과 기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단계는 수행, 즉 훈련이 필요합니다. 10분만 눈을 감고 있어도 힘든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성소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사는 것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도 기도가 삶이고, 삶이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따로 깊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셨습니다.
깊은 기도로 나아가기까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른 새벽에 기도하는 것도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고, 자기 육체의 본성과 싸워야 하는 일입니다. 육체의 본성은 끊임없이 나태하고,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자기의 육체의 본성을 꺾고 일어나서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일은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