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만큼은 /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컴컴한 새벽, 혼자 눈뜨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사무실에 도착해도 마주 보는 상대라고는 모니터와 파티션뿐. 매일 함께 밥을 먹는 동료들과는 영원히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고 얄미운 상사와는 더 멀어지고만 싶다. 서럽고 힘겨운 하루를 보낸 어느 날, 사람으로 꽉 찬 지옥철이 문득 나를 위로한다. 푹신한 부피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은 왠지 이렇게 부대끼는 게 좋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의 온기 덕분에 적어도 외로움은 느껴지지 않으니까. ---「나는 한 마리 외로운 선인장」중에서
/ 칫솔 / 썰렁한 욕실에 걸려있는 칫솔 하나. 그게 왜 그리도 쓸쓸해 보이던지. ---「오늘도 잘 울적했다」중에서
/ 우리가 먹는 술은 / 술을 마신다는 건 잊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 답답한 현실, 불안한 미래, 유난히 길었던 하루, 부정적인 감정, 가끔은 초라한 나 자신까지. 그런 것들이 너무 또렷해서 견딜 수 없는 날, 한 잔 두 잔 알코올을 털어 넣는다. 고민거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을 안주 삼아 고민거리를 풀어내는 건지. 쌓여가는 빈 병마다 묵혔던 고민이 가득 담긴다. 덕분에 잠시나마 마음이 개운해진다. 가끔은 이렇게 몽롱한 정신이라야 견딜 만할 때가 있다. ---「나부랭이라도 괜찮아」중에서
/ 꼭 이럴 때만 /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 연락했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개똥 같은 친구들. ---「나름 친구도 있는걸」중에서
/ 엄마 / 엄마와 통화하는 내 모습은 참 딱딱하다. “응. 잘 지내고 있어.” “별일 없어.” “밥도 잘 먹고 있어.” “아픈 곳도 없고.” 사실 자주 아프고 자주 별일이 있으며 자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한다. 아마도 다 아시겠지. 그러니 자주 전화를 주시는 거겠지. ---「가끔 성숙해진 기분이 들어」중에서
/ 헤어진 친구 / 매기가 실연당했다. 위로해주고 싶어서 당장 만났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어딘가 텅 빈 매기의 얼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도 매기도 몰랐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 끝에 한마디를 꺼냈다. “힘내 매기야. 세상에 여자는 많아!” “그런데 넌 왜 솔로야?” “….” “술이나 먹자.” 사실 이별한 친구를 위로하는 말이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 ---「연애가 고프더라도」중에서
/ 창가에서 / 창문을 열었다. 안의 공기가 나가고, 바깥 공기가 들어온다. 공기가 조금씩 자리를 옮기면서 은은한 바람이 불어온다. 마음을 환기하는 일은 창문을 열어두는 것과 비슷하다. 창가에 서서 멍하니 있는데 문득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혼자의 기술을 터득한 걸까」중에서
/ 좋은 하루란 / 이제는 뭐가 좋은 건지 좀 알 것 같다. 좋은 날씨란,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날씨다. 춥지도 덥지도 흐리지도 건조하지도 않아서 불평할 거리가 없는 날씨. 좋은 하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큰 사건에 휘말리거나 누군가와 갈등을 빚거나 상처 받은 일 없이 물 흘러가듯이 흘러간 하루. 특별한 일, 재밌는 일, 별일, 최고의 하루, 이제는 그런 기대에 목을 매지 않는다. 오늘 하루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럭저럭 보냈고, 심심하고 밋밋했지만 사실 그런 오늘이야말로 진짜 좋은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