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자 주인공 레트 버틀러의 세련된 취향과 매너, 나쁜 남자다운 기질과 매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고향 찰스턴은 무척이나 멋스러우면서 산뜻한 곳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유서 깊은 도시. 유럽풍의 우아한 저택(찰스턴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속하지만 그 저택들은 조지아 양식이다)들이 해안 야자수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비옥한 땅을 지닌 농장주들의 도시로, 남부의 여러 도시들 중 특히 보수적인 곳. 이 지역 명문가 자제인 레트 버틀러는 함께 야반도주했던 여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문에서도 쫓겨나고 지역사회에서도 배척당한다. 그러나 그는 남북전쟁 시기 찰스턴의 레이스며 옷감을 애틀랜타로 실어 날라 판매하는데, 그 거리가 장장 500킬로미터……. 전날 애틀랜타에서 다섯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찰스턴으로 온 나는, 찰스턴과 애틀랜타 간의 거리가 서울-부산 간 거리보다 더 멀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렇다면 전쟁 통에 찰스턴과 애틀랜타를 오가며 사업을 한 레트 버틀러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기차로 짐을 실어 날랐다 해도 19세기 후반엔 과연 며칠이나 걸린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강인한 여성을 만든 남부의 바람」중에서
낮 워킹 투어 때 서배너의 여권女權이 미국 다른 지역보다 강하냐고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더니 “특수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남부 조지아에선 18세기에 이미 여성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어서 여권이 셌고, 전쟁을 겪으면서 미망인들이 억척스럽게 활약했다고 한다. 서배너 도시 계획에 큰 역할을 한 여자도 미망인인데 두 번 결혼했다고. 또한 텔페어 미술관을 설립한 메리 텔페어는 서배너의 한 주요 기구 수장이 여자라는 조건하에 기금을 내겠다고 밝혀서 그 기구는 지금도 수장이 여자이고 텔페어 기금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스칼렛 같은 여성이 탄생한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어떻게 보면 농장이 주요 산업인 남부 특성상 여자가 농장 안살림을 다 해야 하므로 여권이 셀 수밖에 없었지 싶다. 다비드의 명화 「사비니의 여인들」에 필적할 만큼 용감한 ‘사바나의 여인들*’……. 그 여인들을 낳은 도시, 우아하고 꿋꿋한 엘런의 도시에서 또 하룻밤이 흘렀다.
---「당찬 여성을 빚어낸 우아한 어머니의 도시」중에서
“샬럿타운행 비행기가 곧 출발하니 승객 여러분께서는 탑승 바랍니다.”
몬트리올 공항Aeroports de Montreal에서 환승을 기다리다 영어와 프랑스어로 이 문장을 들었을 때 ‘샬럿타운’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꿈속에라도 있는 듯 어리둥절했다. 소설에서 일종의 ‘읍내’로 그려지는 곳, 시골마을 에이번리에 비해 번화한 대처로 묘사되던 그 샬럿타운에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마침내 그 섬,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의 땅을 밟았을 때, 아, 내게도 이런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그려왔었다.
몇 년 전 《빨강 머리 앤》을 국내에 처음 번역해 소개한 아동문학가 신지식 선생을 인터뷰하러 댁에 갔을 때 선생이 보여주시던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사진을 보면서 반드시 가보리라고 마음을 다졌을 때나, 연수 와서 여행 계획을 짜면서 각종 블로그에서 이 섬 여행기를 읽을 때도, 나도 꼭, 이 땅의 붉은 흙을 밟아보아야지, 했었다.
---「‘긍정의 아이콘’에게도 삶의 질곡은 있었다」중에서
그래서 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성 루이의 일생으로 구성돼 있었다. 성당 입구에는 성 루이 조각상과 함께 한 여인이 서 있었으니, 바로 오를레앙의 성녀 잔 다르크. 뉴올리언스New Orleans란 ‘새로운 오를레앙’이라는 뜻이라는 걸 나는 기억해냈다. 기독교의 역사란 기본적으로 전쟁의 역사이고, 기독교의 신은 그래서 전쟁의 수호신이다. 전날 갔던 우르술라 수녀원도 이 도시를 전쟁의 승리로 이끌어달라는 기원이 담긴 곳이고, 성모 마리아는 승리를 가능케 하는 위대한 모성인 것이다.
12시에 미사가 시작되었고, 열 명 좀 넘는 신도들을 놓고 사제는 미사를 집전하였다. 성가도, 파이프오르간도, 헌금도 없는 간략한 미사.
에어컨 바람에 덜덜 떨며 나는 기도했다. Lord, have mercy. Christ, have mercy.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가엾은 에밀리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네주고 싶었던 포크너와 같은 자비를.
---「에밀리에게 장미를, 뉴올리언스에 승리를」중에서
집을 둘러보며 내내 기분이 묘했는데 아마도 쿠바의 헤밍웨이 집을 미리 보고 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두 집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집필실이며 풀장이 있는 구조, 뜰의 고양이 무덤, 벽에 걸린 동물 박제까지. 두 집이 닮은 건 헤밍웨이의 취향 때문일까, 아니면 폴린의 취향 때문일까. 키웨스트의 집에 비해 쿠바의 집이 관리가 부실한 것이 눈에 띄어 속상하기도 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집권 후 쿠바 내 미국인들의 재산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고, 유럽에 있던 헤밍웨이는 다시 쿠바로 돌아오지 못해 수천 권의 장서가 있는 쿠바 집을 몽땅 빼앗긴다. 그 집 덕에 지금 쿠바 정부가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헤밍웨이의 여인들」중에서
‘유유히 흐르는 미시시피강’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초등학교 때 읽은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때문이다. 말썽꾸러기 톰 소여가 뛰어노는 곳, 불우하나 씩씩한 소년 헉이 뗏목을 타고 신나는 모험을 나서는 곳. 마크 트웨인이 유년 시절을 보낸 해니벌을 찾아가는 여행은 그래서 《빨강 머리 앤》을 찾아간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 기행과 또 다른 의미로 어릴 적 친구를 만나러 가는 여행 같았다. 앤이 마음속에 오래 품어온 단짝 친구라면, 톰 소여는 장난이 심하지만 악의는 없는, 초등학교 어느 교실에나 하나 있을 법한 남자 친구 같았으니까.
---「그 시절 소년이 좋아했던 고향의 소녀」중에서
창을 통해 멀리 저 편의 부두가 보였다. 이스트에그에 살았던 데이지는 개츠비의 순정을 누릴 만한 자격이 없는 부박한 영혼의 여자지만, 어쨌든 나는 개츠비와는 정반대의 장소에서 개츠비의 마음으로 아스라한 그리움을 지녀보기로 했다. 소설 속 개츠비가 살았던 동네인 킹스포인트는 사실 헴스테드 하우스나 팔래즈에서 바라보이는 시클리프Sea Cliff와는 반대편에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만을 끼고 그 너머 부두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욕망할 만한 여인이어서가 아니라 욕망하기 때문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