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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리뷰 총점9.1 리뷰 8건 | 판매지수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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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가족 에세이 82위 | 감성/가족 에세이 top100 3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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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56쪽 | 624g | 148*217*30mm
ISBN13 9788984315150
ISBN10 898431515X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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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왜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 흔들리면서 꽃을 피우는 겁니다. 흔들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꽃 한 송이를 피우듯 그렇게 살았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벽을 만났습니다. 어떤 벽도 나보다 강하지 않은 벽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벽에서 살게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벽에서 시작하는 담쟁이. 원망만 하지 않고, 쉽게 포기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잎을 찾아가 손을 잡고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는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과 좌절과 절망과 방황과 소외와 고난과 눈물과 고통과 두려움으로부터 내 문학은 시작되었고, 그것들과 함께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많은 아픔의 시간을. 거기서 우러난 문학을. 나의 삶, 나의 시를. ---pp.7~8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습니다.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알았다면 그 꽃밭은 시시해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꽃들을 알고 난 뒤에 산맥을 보았기 때문에 산 너머를 동경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꽃을 보면 가던 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그래서 내 시에는 꽃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 ---p.21

헤맴 10년, 절망 10년, 방황 10년. 그렇게 10년을 보내고도 “절망이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반성할 줄 모른 채 졸렬과 수치 속에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문득문득 찔레 한 송이보다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아까시꽃만큼이나 향기를 지니고 살고 있는 것일까? 불두화만큼은 뿌리내리고 있는 것일까? 꽃 한 송이를 보며 그 생각이 치밀어오를 때가 있었습니다. ---p.93

젊디젊은 나이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황망한 일이었지만, 여기서 생이 끝나고 만다면 무엇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바르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런 날이 짧아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 성한 곳이 있다면 주고 가자고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다 가겠다고 했습니다. ---p.120

옳은 것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 것 또한 죄라고 성서에서는 말합니다. 고장 난 신호등을 고치지 않고 고장 나기는 했지만 신호등이니 계속 기다려야 한다고 하면 길에서 기다리겠습니까? 고쳐서 길 역할을 하는 길로 만드는 것이 잘하는 일 아닙니까? 그래서 교사들은 잘못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싸움에 몸을 던지게 되었고, 그 일이 아이들과 이 나라 교육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p.164

독방으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린 아들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나이인 데다 이런 일을 하며 다니느라 한글을 가르쳐주지 못해서 마음에 걸렸는데,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한글을 깨쳐 비뚤비뚤한 글씨로 보내온 편지였습니다. 감옥 안에서 죄를 짓고 끌려온 사람에게 한문을 가르쳐주면서 정작 제 자식에게는 한글조차 가르쳐주지 못한 아버지로 사는 게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남의 자식 가르치는 일 때문에 제 자식은 돌보지 못하는 것 또한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p.185

어떤 일을 책임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 되는지를 나는 두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생일 케이크에 머리를 박고 울고 싶었습니다. 밥상을 주먹으로 깨부수며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딸애에게 미안했고, 어머니께 죄스러웠고, 나 자신이 미웠습니다. 이런 시대가 미웠습니다. ---p.198

뿌리로 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붙들고 있었던 거지요.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던 거지요. 나도 힘들지만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이파리들도 다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저렇게 손에 손을 잡고 있는 거겠지요. 자기만 살길 찾겠다고 100발짝을 달려가지 않고, 100개의 이파리와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느라 저렇게 느리게 가는 거겠지요. 정말 견딜 수 없이 힘든 날도 있지만 말없이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나는 벽에 살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늦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텐데도 그 어려움을 과장하거나 떠들어대지 않고 말없이 그 벽을 오르는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믿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이파리들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며 벽을 오르는 거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꾸어 놓은 거겠지요.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회의 서류 뒷면에 연필로 조그맣게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p.206

그리고, 그래서, 담쟁이처럼 살기로 했습니다. 나 혼자 살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함께 손잡고 이 어려운 벽을 헤쳐나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반드시 벽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으면 힘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가면 됩니다. 피 흘리고 희생하며 싸워서 벽을 넘는 길입니다. 혁명적인 방법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서 한 시대의 벽을 넘어가는 때도 있습니다. 영웅이 나타나거나 위대한 과학자나 의학자가 나타나서 벽을 넘게 해주는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멀리 우회해서 가는 길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때나 혁명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구원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 나날의 일상에서 벽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 벽을 벽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마침내 절망적인 환경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담쟁이처럼 벽을 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pp.208∼209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습니까. 흔들리다가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지요. 제자리로 돌아와서 꽃을 피우는 거지요. 그러나 꽃을 피우고 나서도 또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꽃만 그럴까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젖으며 젖으며 따뜻한 빛깔의 꽃을 피우는 거지요. 그러나 늘 젖어 있기만 한 꽃은 없는 거지요. 문학도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은 거지요. ---pp.245∼246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걸까요?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는데, 우리가 있는 곳을 하루의 시간에 견주어본다면 우리는 지금 몇 시쯤을 지나가고 있는 걸까요? 내 인생의 시계는 오후 3시를 지나 5시를 향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12시 전후한 시간은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지쳐 있었으며, 의기소침한 채 오후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저무는 시간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오기 전 찬란한 노을이 하늘을 가득 물들이는 황홀한 시간이 한 번쯤 오리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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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보면 도종환은 바른 심성과 부드러운 감성의 서정시인이다. 꽃향기가 코에 닿으면 꽃이 말을 걸기 위해 향기를 흘려보낸 거라고 생각할 만큼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도종환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분꽃씨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조금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의 부드러움 안에는 강인한 투지가 들어 있다. 그는 헌신적인 교사이자 교육운동가였고 열성적인 문화운동가인 것이다. 사비를 털어 가난한 아이 학비를 대기도 했고, 비뚜로 나가는 아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에게 닥친 것은 ‘감시와 처벌’이었다. 《접시꽃 당신》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동안에도 학교에서 그가 당한 것은 몇몇 시구절에 대한 터무니없는 닦달이었다. “시를 쓰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 태어나 / 몇 편 시에 생애를 걸고 옮겨 딛는 걸음이 무겁다”는 그의 탄식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도종환의 인생 역정은 시련과 상처의 연속이다. 소년 시절에는 부모와 헤어져 굶주린 나날을 보내야 했고, 청년 시절에는 ‘한 마리 외로운 짐승’처럼 절망의 감정에 휩싸여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자학에 빠지기도 했다. 10년의 힘든 해직 생활 끝에 복직했으나, 자율신경의 실조로 더 이상 교단에 서는 생활을 지탱할 수 없게 된다.
놀라운 것은 도종환이 이 모든 곤경을 딛고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가난과 외로움, 좌절과 방황, 해직과 투옥, 고난과 질병 같은 현실적 악조건은 오히려 그를 더 높은 수준에서 자아의 완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시를 쓰는 일과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는 것을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종환의 이 자전적 에세이는 문학과 종교를 넘나드는 드문 감동의 기록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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