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어 학습자들의 실수, 문제의 발견
한국어로 능숙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중?고급 학습자라 할지라도 대인관계 유지에 필요한 언어의 미묘한 기능을 실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이로 인해 다양한 실수를 하기 쉽다. 이러한 실수는 상대방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소통의 장애로 이어져 긍정적인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어 학습자들이 생산한 다음의 발화 예를 살펴보고, 대인관계 유지와 증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더 심각해 보이는 한국어 실수를 한번 찾아보도록 하자.
(1) 챠오: [곤부] 많이 했어요?
우성: 아니요, 별로 못 했어요.
(2) 엘레나: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
정은: 그래. 더운데 시원한 거 먹고 하자.
(3) (선생님이 학생에게 부탁을 하는 상황에서)
선생님: 오늘 수업 끝나고 잠깐 나 좀 도와줄래?
한스: 안 됩니다. 저는 오늘 바쁩니다.
(4) (학생이 선생님께 제안하는 상황에서)
피터: 선생님, 점심 먹읍시다.
선생님: 아, 그래요.
가장 심각해 보이는 실수는 무엇인가? (1)에서 챠오는 ‘공부’를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고 [곤부]로 발음하였으며 (2)에서는 엘레나가 ‘더운데’로 말해야 할 것을 ‘더워서’라고 잘못 말하는 문법적 오류를 일으켰다. (3), (4)에서는 특정한 음운적, 어휘적, 문법적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3), (4)에서는 외국인 학생이 선생님에게 부적절한 표현을 사용하는 화용적 실패(pragmatic failure)가 발생했다. (3)에서는 학생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선생님에게 사회문화적으로 부적절한 단정적인 태도로 ‘안 됩니다’를 사용하여 상대방의 체면(face)을 손상시켰고 (4)에서는 나이 차이가 있으면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선생님에게 식사 제안을 하면서 지나치게 직설적인 ‘-(으)ㅂ시다’ 표현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그런데 실제 한국인들이 학습자의 이러한 화용적 실패를 접하게 될 때, 이를 학습자의 한국어 지식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의 인성이나 태도의 문제로 오해하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이해영, 2009:226).
화자와 청자는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대화는 서로 간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향으로 흐르며 이를 위해 화자는 대화의 목적 달성을 위한 다양한 언어적 장치를 사용하여 공손성(politeness)을 나타내게 된다. 이해영(1996:18)에서는 이처럼 화자와 청자의 원활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증진시킬 목적으로 수행되는 화용적 기능을 부담줄이기라고 하였다. 공손성은 상대방의 체면 손상에 집중하고 있지만, 이와 함께 상대방의 체면보다는 사실이 아닐 경우에 훼손될 화자의 체면에 대해서도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명명된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상대방의 체면 위협을 극복하는 전략이라는 점에 집중하여, 그리고 보편적 용어 사용을 위해서 공손성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Brown & Levinson(1987:49)에서는 공손성을 사회적 관계성의 언어적 장치라고 하였는데, 대화 참여자들은 상호 간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공손성을 드러내게 되며 이것은 언어적 장치로 드러난다. 이때의 언어적 장치는 담화를 구성하는 담화 조각(segments) 중에서 표층에서 확인 가능한 음운적 요소, 어휘, 문법 항목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화용적 의도를 가지고 사용된 표현도 아우른다. 공손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적 장치들이 무엇인가를 밝힘에 있어 문법이나 어휘의 차원을 넘어선 화용적 의도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형태적, 통사적, 의미적 측면에서 다루어져 온 한국어 문법과 어휘적 표현들이 화용론의 관점에서 어떠한 기능을 할 수 있는가에 주목하는 것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어 학습자들은 한국인들과 대화를 할 때 무례하지 않은 표현의 사용에 대해 고민하며 어떤 언어적 장치를 사용해야 좋은지 알고 싶어 한다(이해영, 2016:92).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장치가 제대로 학습되지 않는다면 이를 적절히 발화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이는 단지 목표 언어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Bouton(1994:167)은 학습자들이 함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육적 개입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비모어 화자들은 언급되지 않은 비평, 연쇄, POPE 함축, 관련성 격률(maxim) 등의 함축 유형을 이해하는 데 무려 17개월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함축의 네 가지 유형 중 세 가지 유형은 4년 반이라는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겨우 습득된 것으로 나타났다(이해영, 2015:250). 결국 한국어 학습자들은 공손성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언어적 장치들을 명시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습자가 명시적으로 학습할 필요가 있는 이러한 언어적 장치들은 음운론적 현상에서부터 형태소, 통사적 구조는 물론 담화?화용적 현상, 감정의 전달에 기여하는 구어의 부차언어학적 자질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문법론에서 볼 때 다양한 층위에 속하는 것들로 구성된다. 다양하고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것들은 공손성을 나타내는 화자의 태도라는 점에서 동일한 기능을 한다. 한국어에서 공손성을 나타내는 언어적 장치의 예를 들면, 형태적 층위에서는 문법 형태소의 어미를 들 수 있으며 어휘 형태소로 ‘주다’, ‘보다’, ‘싶다’ 와 같은 보조 동사, ‘글쎄’, ‘좀’, ‘거기’와 같은 담화표지를 들 수 있다. 통사적 층위로는 피동문과 간접의문문, 간접인용 등이 공손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 역할을 한다. 한편, 담화?화용적 층위에서는 생략, 간접화행, 함축 표현, 수사적 표현 등을 통해 공손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제시된다.
이상과 같은 논지에서 본고는 1996년에 발표된 박사논문을 토대로 학습 항목으로서의 공손성을 나타내는 언어적 장치들을 조망하되, 어휘적, 문법적 차원에서 실현되는 언어적 장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즉 본고는 이러한 언어적 장치를 바라보는 관점을 문법론적 관점에서의 분석에서 벗어나 문법적 형태들이 갖는 고정함축적 의미와 공손성의 실현이라는 화용적 기능에 주목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