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서, 그러니까 모든 일이 불가능해졌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이 무의미하다면, 일하는 몸짓이 부조리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일은 기능하기로 대체되었다.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실현하거나 현실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는 어떤 기능의 담당 직원 역할을 한다. ?「기계의 저편에서」, 30쪽
만들기의 몸짓은 타자를 위한 손의 열림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결말의 시점에서 본다면, 만드는 몸짓 역시 타인에 대한 사랑의 몸짓이다. 결코 찾을 수 없으면서 손이 대상 속에서 찾는 완전함은 실망한 사랑의 몸짓이다. 그것은 인간 특유의 몸짓이다. 그것은 인간 조건의 극복을 추구하고, 체념을 넘어 사랑에서 끝난다. ?「만들기의 몸짓」, 70쪽
성의 인플레이션이 성의 가치를 깎아내렸기 때문에, 이 혼동의 결과로 사랑의 몸짓 또한 가치가 떨어진다. 또 우리는 점점 더 평정에 필요한 순진함을 잃고, 더 기술적이고, 더 가상적이고, 더 비판적으로 되기에, 사랑의 몸짓의 본질에 다가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극이다. 사랑의 몸짓은, 우리가 타인 속에 동화되고 소외를 극복하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몸짓 없는 모든 의사소통의 몸짓은 오류이다. 또는, 사람들이 과거에 말했던 대로, 죄악이다. ?「사랑의 몸짓」, 79쪽
파괴와 해체가 의도적으로 일어날 때, 그것들이 ‘실용적’일 때, 그 동기는 ‘불순’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순수한 악’이 아니다. 그리고 순수한 악이 아닌 것은 전혀 악이 아니고, 오히려 자유에 대한 좌절된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의도 없이, ‘순수한 동기’에서 일어난다면, 그것들은 사악하다. 드물긴 하지만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순수한 선’이 그렇듯이) 비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럴 때 그 파괴와 해체는 끔찍하다. ?「파괴의 몸짓」, 88쪽
사진 촬영의 몸짓에 대해 방금 말한 것은, 몇 가지만 바꾸면 철학하는 몸짓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철학하는 몸짓을 조사하면 우리는 아마도 비슷한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똑같은 세 측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사진 촬영은 철학의 입장을 새로운 맥락으로 번역하는 몸짓이라는 점을 말해야 한다. 사진에서처럼 철학에서도 위치 탐색은 분명히 나타나는 측면이다. 조명을 받는 장면의 조작은 늘 쉽게 인정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철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움직임들의 특징이다. 자기비판적인 측면은 우리가 이 조작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세 가지 양상을 가능한 한 세밀하게 관찰하면, 사진 촬영의 몸짓이 산업시대의 환경에서 철학의 진화라는 느낌은 더 강해진다. ?「사진 촬영의 몸짓」, 113쪽
면도를 한 뒤 면도기에 남아 있는 수염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존재론적 성찰을 피하기 어렵다. 수염은 면도의 몸짓에 의해 그 존재론적인 장소를 바꿨다. 이전에 그것은 내 몸의 일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내 면도기의 일부분이다. 존재론적인 장소의 변경은 일의 몸짓의 특징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으로 다른 어떤 것을 만드는 것, 예를 들어 자연적인 무엇으로 인공적인 무엇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면도의 몸짓은 일의 몸짓이다. 그러나 면도의 몸짓에서는 장소 변경과 관련되는 것이 사물이 아니라, 몸짓을 하는 사람 자신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곧바로 우리는 이 몸짓에서 본질적인 것을 지나쳐버림을 알게 된다. --- p. 54
파이프 흡연은 바로 그 세속성과 무해함으로 인해, 어떤 신앙에서 제의에 관한 논쟁들을 중재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 대통에 담배를 담을 때 처음에 단단히 누르고 나중에 느슨하게 눌러야 하느냐는 문제는, 토요일에 닭이 낳은 달걀을 먹어야 하느냐 아니냐와 같은 유형의 문제처럼 보인다. 이들은 뭔가를 얻으려는 의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이론적인 질문인 동시에, 완전하게 실천을 향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비이론적인 질문이다. --- p.177
우리의 몸짓들은 변화를 앞두고 있다.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 몸짓의 현상학에 대한 시론의 마지막 장이기도 한 이 글은, 우리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학문의 위기, ‘탐구의 몸짓’의 위기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는 뒷받침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자들, 연구소와 도서관과 학교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몸짓은 100년 전과 거의 같은 반면, 춤을 추거나 앉거나 먹는 것 같은 다른 몸짓들은 이와 달리 새로운 구조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이 제시하는 논지는, 우리의 모든 몸짓들(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은 과학 연구에 의해 구조를 갖게 되며, 우리의 몸짓이 변하고 있다면 그 변화의 이유는 탐구의 몸짓이 변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 213
아마 우리는 지금 혁명적 상황에 (우리가 이 상황을 조망할 수 없고, 또 그렇기에 그것이 ‘객관적으로’ 혁명적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처해 있을 것이다. 혁명 속에 있다는 우리의 이런 느낌은 무엇보다도, 어쨌든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방향을 새로 잡아야 한다는 느낌으로, 어쨌든 실천적으로 여기 존재하려면 새로운 유형의 이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몸짓 일반 이론에 대한 이 제안은 이러한 느낌에서 비롯되었다. 몸짓은 우리의 능동적인 세계-내-존재의 구체적인 현상의 문제, 자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결국 자유에 관한 것이다.
--- p. 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