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은 1400년대 조선에서 활동한 과학자이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i, Galileo)는 150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과학자다. 장영실이 갈릴레이보다 100년 이상 앞서 태어나고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두 과학자는 하늘의 별을 통해 자연의 원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시간과 시계의 소중함을 드러낸 과학자들이다. 장영실과 갈릴레이는 반도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 면은 육지로 이어진 땅인데, 대륙에서 바다 쪽으로 좁다랗게 뻗은 육지를 말한다. 동해, 서해, 남해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장영실과 긴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의 갈릴레이는 태어난 시대는 다르지만 둘 다 하늘을 꿰뚫어 본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10쪽 중에서
장영실은 관노였지만 씩씩하게 자랐다. 취미는 밤하늘 별 관찰하기였고 특기는 대장간에서 각종 공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장영실이 청년이 되면서 그 재주 또한 성숙해졌다. 동래에서 장영실이 영특하다는 입소문은 멀리 퍼져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태종(조선의 세 번째 왕으로 세종의 아버지)이 관리들에게 지방 각지에서 특출한 인물을 추천하라고 했다. 이러한 추천 제도가 ‘도천법’이다. 도천법에 따라 동래 관청에서는 장영실을 추천했다. 그때부터 장영실은 한양 궁궐에서 일하며 살게 되었다.
-23쪽 중에서
갈릴레이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래 음악 학원을 했는데, 먹고살기가 빠듯해지자 옷감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의 장남이었던 갈릴레이는 아버지 권유로 의대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갈릴레이가 의사가 되어 많은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키길 바랐고, 어려서부터 똘똘했던 갈릴레이는 의대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의대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는 의학보다는 수학이나 물리학에 관심이 더 많았다.
-25쪽 중에서
측우기는 비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있는 기구다. 측우기를 장영실이 발명했다고 전해지지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세종의 첫째 아들 향(문종)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그는 1441년(세종 23년) 8월 호조에서 서운관에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우량계(세계 최초)로 비가 내린 양을 정확히 재어 적어 놓을 것을 건의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앞뒤 맥락으로 볼 때 장영실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47쪽 중에서
장영실은 과학자인데 악기 만드는 일에 왜 참여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악기 재료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금속이나 광물을 재료로 해서 일정한 음률을 갖는 악기를 만드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태평소 같은 금속 악기를 여러 개 만들 경우, 금속을 잘 아는 과학자가 필요했다. 여러 종류의 금속을 녹이고 틀을 만들어 악기가 일정한 소리를 내게 하고 여러 광물을 캐고 구별하여 다듬거나 혼합하는 일에는 과학 지식은 물론 금속을 다루는 기술도 필요했다. 장영실만 한 기술자가 없으니 세종은 박연을 장영실에게 보내 악기를 함께 만들게 했다.
-49쪽 중에서
지금은 흔하지만 갈릴레이가 발명할 당시에는 아주 희귀한 물건이었다. 갈릴레이는 대포나 총을 쏠 때 거리와 각도를 계산하기 위해 컴퍼스를 기하학적으로 개량해 군사용 컴퍼스를 만들었다. 이 컴퍼스는 2개의 판판한 팔을 묶어서 벌릴 수 있는데, 팔 길이는 각각 30cm, 폭은 3cm정도였다. 팔에는 산술적이고 기하학적인 여러 규칙에 따라 눈금을 새겨 놓았다. 90도 각도의 호가 붙어 있어서 직각을 그릴 때 직각자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또 그 호에는 각도를 새겨 놓았기 때문에 각도를 측량하는 도구로도 이용했다.
-57쪽 중에서
장영실이 살았던 조선 시대에 시계가 발명되기 전에도 시간을 보는 체계적인 방법이 있었다. 장영실은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었다. 그중에 가장 빛나는 발명품은 물시계와 해시계다. 시
계가 생겨나자 시간의 개념이 명확해지고 사람들은 그 시간에 따라 일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시계가 사라진다고 상상해 보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계만 사라졌을 뿐인데?’ 하겠지만 세상은 뒤죽박죽 전혀 다른 세상이 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시계가 없던 세상에 시계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뭔가 분명한 세계가 생겨날 것이다. 장영실은 시계가 없던 조선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준 셈이다.
-60쪽 중에서
1437년은 무척 중요한 해다. 왜냐하면 자격루가 일상생활에 사용된 지 3년이 지났고 이때부터 여러 시계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규표(圭表)’라는 기계가 있다. ‘규’는 단위를 뜻하는 말로 ‘시간 단위를 측정하는 기계’라는 뜻이다. 해의 높이와 해가 지는 것을 측정하는 일종의 해시계라고 할 수 있다. 해시계는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먼저 사용된 시계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1~13세기경부터 막대를 이용한 해시계를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신라 시대부터 해시계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세종 때 와서야 제대로 된 해시계를 사용하게 되었다.
-72쪽 중에서
혼천의(渾天儀)는 ‘혼미한 하늘을 관측하는 천문 기구’라는 뜻이다. ‘혼의’, ‘혼의기’라고도 한다.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는 별칭을 알면 무슨 기계인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선기’는 ‘별’이라는 뜻이고 ‘옥형’은 ‘옥으로 된 천문 관측기’라는 뜻이니까 ‘별을 관측하는 천문 기기’다. 혼천의는 1433년(세종 15년)에 정초, 정인지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 장영실이 만드는 일을 감독해 만든 기계다.
-82쪽 중에서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인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 이렇게 4개를 발견했다. 위성은 곧 달이다. 지구는 위성이 달 하나밖에 없지만 목성의 밤하늘엔 많은 달이 뜬다. 목성의 위성은 4개만 있을까? 사실 목성에는 무수히 많은 위성이 있다. 당시 갈릴레이는 가장 빛나는 4개의 위성만 발견했다.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발견된 목성의 위성은 63개나 된다. 어마어마하지만 이보다 더 있을 수도 있다.
-89쪽 중에서
장영실은 직접 만든 혼천의로 밤하늘의 별과 천체들의 위치를 관측했다. 갈릴레이도 직접 개량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다. 별의 밝기에는 실제 밝기와 겉보기 밝기가 있다. 이 두 밝기는 각각 절대 등급과 겉보기 등급이라는 단위로 나타낸다. 절대 등급은 모든 별이 같은 거리(32.6광년)에 놓여 있다고 가정했을 때 밝기를 나타낸다. 각 별들의 실제 밝기다. 겉보기 등급은 그 실제 밝기에 상관없이 단지 밤하늘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밝기를 나타내는 척도다.
-94쪽 중에서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으로 주장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약 2000년 전에 그리스의 아리스타르코스(기원전 310~230년)가 먼저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고 ‘지구는 하루에 한 번 자전하고, 1년에 한 번 원 궤도를 그리며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발견했다.
-100쪽 중에서
장영실이 살았던 시기를 대략 고려 말인 1390년에서 조선 세종 때인 1450년으로 잡으면 15세기 전반이다. 이때는 암흑 중세의 혼란과 근대 새벽인 르네상스가 공존하는 시기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중세 운동이 르네상스다. 그렇다고 17세기부터 근대가 열렸다는 것은 아니다.
-120쪽 중에서
갈릴레이는 1564년에 태어나 1642년에 운명하는데 중요한 활동을 한 시기는 1580년대부터였다. 우리나라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45년부터 1567년까지 외척의 횡포를 막지 못한 명종이 나라를 다스렸고, 1567년부터 1608년까지 환난을 막지 못한 선조가 다스렸다. 1608년부터 1623년까지는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광해군이 집권했다.
-120쪽 중에서
장영실이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책임자로서 곤장을 맞고 쫓겨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불경죄의 벌이 그 정도에 그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장영실도 갈릴레이 못지않게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궁궐에서 쫓겨난 이후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찬란한 업적에 비해 어둡고 쓸쓸한 마지막이다.
-121쪽 중에서
갈릴레이는 73세인 1637년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78세인 1642년에 운명했으니 무려 5년간이나 실명한 상태로 지냈다. 하지만 아들과 제자들의 도움으로 교육과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다.
-125쪽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