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 or No] 왕따당하는 아이 마음 헤아리기
--- 고현진(nica924@yes24.com)
『내 짝꿍 최영대』와 『까마귀 소년』은 둘 다 이른바 '왕따' 문제를 다룬 동화지만 접근 방식이나 문제 해결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들이다. 『내 짝꿍 최영대』의 '영대'는 헐렁한 웃옷에 다 해어진 운동화를 신은 꾀죄죄한 차림에, 늘 지독한 냄새가 나고, 말도 행동도 느려서 '굼벵이' 로 불리는 친구이고,『까마귀 소년』에 나오는 '땅꼬마' 또한 늘 뒤처지고 꼴찌라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톨이다. 둘 다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집단으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는, 어쩌면 우리 곁에 한둘은 있게 마련인 친구의 모습이다. 책의 결말은 아이들이 그동안 영대와 '땅꼬마'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깨닫고 눈물을 흘리게 되고, 두 아이는 비로소 집단적인 왕따에서 벗어나 아이들 곁으로 가까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왕따를 당하는 두 아이의 역할이나 작가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내 짝꿍 최영대』에선 왕따당하는 영대를 바라보는 '나'가 주인공이다. '나'는 영대를 불쌍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나서서 영대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나무라지는 못하는, 약간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한다. 영대는 왕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없다. 또 스스로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도 없다. 그러다가 영대가 수학여행지의 잠자리에서 방귀를 뀌었다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꺼이꺼이 울어버리자, 영대의 울음에 놀란 아이들이 그제서야 잘못했다며 사과하고 모두 울어버린다. 다음 날, 장면은 반전이 되고, 아이들은 더 이상 영대를 따돌리지 않는다. 그 뒤, 아이들은 영대에게 말을 가르치고, 옷차림이 좀 깨끗해진 영대는 "반에서 제일 소중한 아이가 된다."
독자들에 따라서는 도대체 영대가 뭘했길래 아이들이 잘못을 깨달았느냐고 의아해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울기만' 했는데, 어떻게 그토록 오래 따라다니던 왕따를 벗어던질 수 있느냐는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바로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런 해결책이 가능하다고 이해하는 시선도 있다. 아이들이니까, 아직은 마음이 맑고 여리고 미숙하니까, 영대를 놀리면서도 몰랐던 영대의 마음을 처음 듣는 영대의 괴로운 울음소리에서 헤아리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곧 논리로는 설명하기 힘든, 집단적인 카타르시스가 어떤 해결책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 짝꿍 최영대』가 왕따를 벗어나는 데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그다지 없었던 데 견주어, 『까마귀 소년』에선 선생님과 주인공의 역할이 자못 크다. '땅꼬마'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여전히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는 외톨이로서 시간을 보낼 방법을 스스로 찾아낸다. 그래서 책상의 나뭇결을 골똘히 관찰하기도 하고, 창 밖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변화,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벌레들을 유심히 살핀다. 또 자연의 소리에 귀를 열어놓는다. 그래서 어느덧 땅꼬마는 자연 박사가 되었고, 그런 점을 알아차리고 끝없는 격려를 해준 선생님의 배려로 학예회 무대에서 온갖 까마귀 소리를 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선생님의 설명으로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은 땅꼬마가 변화무쌍한 자연의 흐름에 귀기울이게 된 그의 외로움을 헤아리게 되었고, 비로소 길고 긴 6년 동안 자신들이 땅꼬마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제 '땅꼬마'는 '까마귀소년'으로 불리며 사람들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왕따를 벗어나는 방식은 두 작품이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둘 다 결국은 왕따당하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림으로써 자신들의 잘못을 알게 된다는 점에선 공통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고 보면 두 작품은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일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아가서 어린 시절, 또는 현재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나'는 영대나 땅꼬마를 놀리는 그룹에 속하지 않았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점에서 『내 짝꿍 최영대』와 『까마귀 소년』은 오랜만에 메마른 어른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