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왜요?’는 다음 말을 끌어내는 말인데, 되묻는 ‘왜요?’는 오히려 말문을 막히게 한다. 예외가 있긴 하다. 아이가 묻는 ‘왜요?’는 다음 말을 잇게 한다. “여기선 뛰면 안 돼.” “왜요?” “여러 사람이 조용히 책 읽는 곳이거든.” 아이는 세상을 알아가는 단계에 있어 ‘왜’ 그런지 몰라서 묻는 것이고, 어른의 경우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따르기 싫을 때 반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왜요?”가 질문인지, 추궁인지, 따지는 것인지, 그 차이는 우리 스스로가 잘 안다. 알면서도 뾰족하게 반사적으로 “왜요?”라고 할 때가 있다. 부탁하는 사람도 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하고 “저기요, 죄송한데요”라고 신중하게 말하는 것을 아는데도 그렇다. 이렇게 “왜요?”라는 말의 사정을 잘 아는 나도 누가 뭔가를 지적한다고 느끼면 지레 무안해서 “왜요?”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흠칫 다시 생각해본다. ‘나를 존중하니 부탁도 하고, 지적도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 “저기요, ○○ 좀….”이라고 하는 말이 지적이 아니라 부탁으로 들린다. --- p.36~37
우리가 하는 말이 몸과 마음의 건강에 결정적이다. 무심결에 “이 무릎은 결국 고장이 날 거야.” “그 애가 내 심장을 찢어 놓았어”라는 식의 말을 하다보면, 결국 무릎이나 심장에 병이 생긴다는 바버라 호버먼의 명언을 메일로 받은 것도 그 즈음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나를 해친 말들이 떠올라 내게 미안해졌다. 그리고 따뜻한 공간에 들어왔다고 해서 금방 몸이 따뜻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B처럼 인정은 해야 한다는 것을 그날도 배웠다. “아, 따뜻해. 행복하다”라고 하던 B의 말과 행복해하는 표정은 보는 사람도 행복하게 했다. 그날 이후 긍정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자꾸 실천하려고 하는데 솔직히 잘 안 될 때가 많다. 그래도 나는 긍정을 자꾸 느끼고 싶다. 그리고 그 느낌을 말하고 싶다. 비 오는 날 10분 늦게 헐레벌떡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에게 “10분만 빨리 왔으면 지각이 아닌데” 같은 모호한 말은 안 하리라. 10분 정도 늦었는데 지각 체크를 해야 하는 안타까움을 담은 말이었지만, “비 오는데 오느라고 수고했지”가 나을 것 같다. --- p.40~41
‘혹시?’라며 남의 속을 궁금해하느니 “왜 그러냐?”라고 묻는 게 훨씬 속 편한데도 습관적으로 혼자 생각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아주 소중한 사람도 놓친 경험. 마음도 말도 잘 벼린 칼처럼 섬세하니 배려하고 조심하는 건 좋지만 정작 자신은 더 힘들었던 경험. 세심하고 민감하면 더 그럴 수 있다. 상대는 이미 상황들을 바다로 흘려 보냈는데 자신은 상황 하나하나를 호수에 가두고 계속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느라 힘들다. 그는 식사하는 동안 후배의 말간 얼굴을 보며 작은따옴표 안에 넣으면 좋을 말이 있고, 큰 따옴표 안에 넣을 말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선배님, 제가 낼게요. 그렇잖아도 점심 한번 대접하고 싶었어요.” 후배의 어깨를 가볍게 안으면서 그가 큰 따옴표를 사용했다. “내가 살 거야. 고마워서.” 저절로 작은따옴표가 따라 나왔다.‘미안해. 맘대로 오해하고 의심해서.’ 아, 미안하다는 말도 큰 따옴표에 넣어야 했나? 그는 또 웃었다. --- p.50~51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과 행복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선뜻 대답하기엔 무리한 질문에 순간 침묵. 대답을 원한 질문도 아니고 난센스에 가까운 것이라서 나는 얼른 답을 내놓았다. “자녀들에게 말 안 거는 거예요.” 청중이 크게 웃었다. 하지만 청소년 자녀와도 행복한 대화가 가능하다. 아이가 말 걸어올 때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다. 자녀의 말을 끊지 말고, 말머리 돌리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긴 이야기든 짧은 이야기든 아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때가 부모와 자녀가 대화할 적기다. 그런데 더 적기가 있다. 바로 평소다. 평소에 별 말 아닌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걸 나는 ‘수다’라 부른다. 수다를 떨어야 한다고도 표현한다. 수다라는 말이 진지하지 못하다는, 괜한 말로 시간 죽이는 것처럼 의미 없는 말로 해석되던 때도 있었다. ‘구글’의 아이디어는 티타임이나 수다 시간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차를 마시며 격의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나온단다. --- p.66~67
나는 안다. 친구의 맞장구치는 힘에 친구 남편이 지금처럼 말수가 많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친구 남편의 맞장구도 아내인 친구에게 배웠다는 것을. 그 중에서 백미는 역시 감탄사 맞장구인 “우와”다. 친구의 남편은 친구에게 배운 것을 적재적소에 넣어 이렇게 호응한단다. “우와, 이 음식 진짜 맛있다.” “세상에, 정말?” “우와, 좋았겠다.” 이 말이 별 말 아닌 게 아니란 것은 결혼하고 수년 살아 본부부라면 안다. 심드렁하기 쉽고, 나른해지기 쉬운 사이가 바로 오래된 사이다. “자기야, 내가 오늘 뭐 심었는지 봐봐. 좋지?” “우와, 예쁘다. 오늘 이거 심은 거야? 진짜 예쁘다. 자기 힘들었겠다.” 파울로 코엘료의 『마법의 순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생은 짧습니다. 그러니 가슴 안에만 담고 있는 말이 있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오늘 한 번 해보세요.’ 그래. 가슴에 담고 있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마법의 순간을 만드는 게 분명하다. 나는 짧은 인생에 꼭 해야 할 말 목록에 ‘맞장구’를 넣고 싶다. --- p.72~73
상대방의 말이 허공을 거쳐 내 귀에 들어와 이성뇌인 대뇌피질 ‘전두엽’에 가닿아 해독하고 이해의 과정을 거쳐 대답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진 않다. 이미 모국어 사용이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데, 이런 절차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숨을 쉴 때 ‘들이쉬고…, 내쉬고’를 의식하지 않듯 말이다. 종종 말이 쉽게 나와 문제일 때가 있다. 그것도 상대에게 오해의 소지를 주는 ‘방어적인 말’의 경우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빨리 나온다. 티끌 하나도 허용치 않는 본능적인 눈 깜박거림만큼이나 찰라적으로 나올 때도 있다. 특히 누군가 문제점을 지적할 때나 지적한다고 느낄 때 방어적으로 되어 과민반응하기가 쉽다. 상대는 그저 단순히 궁금해서 물은 것일 수도 있고, 다음 이야기를 위해 꺼낸 것일 수도 있으므로 그럴 때는 그 질문에 대해 팩트로 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여기 환기하나요?” “네, 환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공기가 탁하네요.” “아, 네. 그럼 한 번 더 확인할게요.” --- p.86~87
분노는 한 여자를 비참하게 만들었고, 한 남자를 죽였고, 한 가정을 파괴했다. 정확히 말하면 분노한 순간 해버린 말, 분노조절 실패로 쏟아낸 말이 인생을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꿈같이 다시 찾아온 사랑과 재기의 기회도 (거짓)말로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영화의 전체를 끌고 간 것은 ‘말’이었다. 누군가를 해하려는 분노의 말 -비리를 정의롭게 밝히고자 한 의도가 아니었다 - 이 그 누군가와 나를 동시에 죽인다는 것, 거짓말은 사랑도 떠나게 한다는 것, 홀로 쓸쓸하게 늙어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건 단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야.” 그렇게 말할 수만은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인생을 한 방에 날려버린 분노의 말을 쏟아낸 시간을 재봤다. 딱 참을 인忍자 3개 쓸 시간만 참았으면, 그녀의 모든 것을 날리지는 않았을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아니면 복식 호흡 3번만 했어도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분노의 순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아야 하는 순간을 넘길 ‘무슨 수’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참는다는 말 대신 ‘시간을 벌다’라는 말로 바꿔도 좋다. --- p.104~105
말이야말로 사용 전과 사용 후가 있다. 말의 사용 전은 깨끗하고 안전하며 누구에게든 요긴하게 잘 사용되도록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런데다 말은 쓰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쓸수록 빛나면서 ‘존재감’이 커진다. 무서운 건, 말은 사람을 거치며 오염되고 버려질 수도 있는 양날의 검 같
은 존재라는 것이다. 함부로 써서 버려진 말들을 통에 담아 쏟아내면 쓰레기통을 뒤집어 쏟아낼 때의 민망함 정도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사용하고 난 후 책임질 말 중에 급부상하는 것이 댓글이다. 바야흐로 ‘댓글 시대’다. 그러고 보니 ‘문자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의 속도로 주고받는 문자라서 보낸 후의 뒷모습을 살필 겨를도 없을 때가 있다. 모음 ‘ㅑ’와 ‘ㅗ’ 음소 하나 차이로 중대한 실수를 한 경험, 수신인을 잘못 선택해 보낸 경험. 미처 뒷모습을 가다듬지 않고 보낸 문자 때문에 얼굴 벌개진 경험이 여러 번이다. 실수로 보인 말의 뒷모습은 그나마 수습이 가능하지만 댓글의 경우에는 누구도 실수라고 하지 않는다. --- p.138~139
‘아’ 다르고 ‘어’ 다른 사례가 참 많다. 말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아’와 ‘어’의 한 음절 차이가 말 전체를 다르게 하니 말 한 마디의 차이는 더 클 수밖에 없다. 최근에 들은 말 중에서 찾아낸 말의 섬세함으로 “그런 줄 알았더니”가 있다. 알래스카 여행을 다녀온 후배가 선물을 들고 온 게 계기였다. 선물은 내가 모으고 있는 관광 마그네틱이다. 냉장고 문 윗면에 여행지 마그네틱을 붙이는 게 오래된 취미인 것을 기억하는 후배가 2개나 가져왔다. 마침 나도 알래스카에 다녀온 터라 빙하며, 크루즈의 이곳저곳이 눈에 그려지는 듯 선한데, 입담 좋은 후배의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기를 듣자니 더 생생하다. 9일의 일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들려주던 후배가 눈을 감고 감동어린 마무리를 했다. “그런데 선배 블로그에서 이미 사진으로 봐서 좋은 줄 알았지만 그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어요. 와, 크루즈 안은 진짜 즐길 것, 먹을 것 천국이더라구요.” 그러곤 덧붙였다.
“진짜 그런 줄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그렇더라구요.” --- p.156~157
어찌 할머니, 할아버지 뿐이랴. 할 말이 급할수록 자꾸 명사보다는 나오는 대로 말하다보니 나이 불문하고 “그거, 여기, 거기, 아니 거기라니까”라고 하며 다그치는 사례도 심심찮다. 할 말도 많고, 바쁘니까 말도 급해져서 그렇다. 문제는 그렇게 말해놓고 상대한테 말귀 척척 못 알아듣는다고 뒤집어씌우기도 한다. 알아듣게 말하는 것이 먼저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어제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지 않는 법』이라는 책을 사오셨다. 그런데 오늘도 또 사오셨다. 이런 이야기 인터넷에서 보고 아차, 했거든요. 지금부터 그거, 그거 대신 단어를 떠올려 말해 버릇해야 해요. 그러려면 맘 조급하게 먹지 말고 말하는 게 중요합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영화 제목, 책 제목, 사람 이름이 안 떠올라 혼자서 “그거, 그거 뭐더라?”라고 하던 나도 명심해야 할 말이다. 기억력은 어쩔 수 없더라도 할 말이 급해서 ‘거시기’로 통일하면 그건 좀 아니다 싶다. 듣는 사람을 배려하고 의식한다면 도움이 될 것 같다. --- p.176~177
“약 써서 안 먹을 거야.” 떼 부리는 남동생. “우리 손주, 뭐를 제일 좋아해?”라고 하던 할머니. “응, 축구.” “아이구, 우리 강아지. 축구 좋아해? 축구 잘하려면 몸이 튼튼해야겠네.” 그러면 고집쟁이 동생이 눈을 꿈벅이며 잠시 망설이다가 “알았어. 할머니”라고 하며 보약을 응시했다. ‘이심전심’이라더니 말이 통하나보다 싶은 순간, 동생으로 하여금 보약을 그야말로 ‘원샷’하게 한 할머니의 한 말씀. “축구공 들어간다, 들어간다.” 그럼 동생이 보약을 꼴딱꼴딱 마시고 빈 약사발 들어올리며 “할머니, 슛 꼬~린(골인) 했지?”라고 했다. 동생은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마셨다. 할머니와 손주 둘이 “할머니, 나 잘했지?” “어이구 내 새끼. 잘했다, 잘했어”라고 하며 웃고 박수까지 치는데, 언니와 나는 하나도 안 웃겼다.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았다. “할머니하고 너, 진짜 웃기지도 않았어”라며 웃다가 얼마전 은사님이 보내주신 보약 한 재가 떠올랐다. 문학상 시상식 초대 편지에 별지의 종이가 접혀 있었다. --- p.184~185
지난 겨울, 큰 맘 먹고 여행길에 올랐다. 큰 맘 먹었다는 건 한 달이라는, 그것도 여정이 쉽지 않은 남미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최종 목표지는 마추픽추. 얼마나 가고 싶었던 곳인가. 잉카, 마추픽추란 말만 떠올려도 설레던 곳이다. 그러니 그곳만 봐도 여행은 성공이라고, 다른 건 욕심 갖지 말고 쉬엄쉬엄 다녀오자고 다독이며 떠났다. 왜 아니겠는가. 여행을 떠나기 전 2, 3주 동안 여행하는 한 달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강행군으로 일정을 소화했기에 여행 전에 이미 피로가 쌓이고 쌓였다. 다행히 여행의 앞 일정은 크루즈였기에 잘 먹고, 잘 자고,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중간 중간 브라질과 페루의 더위에 지치기도 했지만 우리 일행들은 힘들 때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언제 또 여길 오겠어”라고 하며 서로 격려했다. 그런데 여행 중반에 접어들며 나의 여행 목적지는 더 이상 ‘마추픽추’가 아니었다. 동행한 네 쌍의 부부가 나의 여행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 p.214~215
언젠가 폴 매카트니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후배가 매카트니를 부를 땐 그냥 이름만 부르면 안 된단다. 반드시 ‘Sir’를 붙여야 한다나. 그리고 덧붙였다. “아니면 매카트니 경이라고 부르든지.” 영국에서는 매카트니가 앉을 의자에도 그렇게 표시한다나 어쩐다나. 우리는 “대통령도 그냥 이름 부르는 세상에 유난스럽기는”이라고 했지만 좋아하고 존경하는 누군가를 가슴에 품은 그를 부러워했다. 어쨌든 링고 스타는 1990년대 폴 매카트니가 받은 기사 작위를 20년의 간격을 두고 받았다. 왕세자의 검(칼)이 한 무릎을 꿇은 링고 스타의 왼쪽 어깨에 살풋 얹혀져 있는 사진을 보니 격식이나 형식이 왠지 ‘그딴 형식’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격식의 엄숙함이 그가 받은 작위를 사진이나마 실감나게 한다. 한참 전에 유명을 달리하고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는 듯한 존 레논이나 조지 해리슨, 폴 메카트니나 링고 스타. 이래저래 대단한 비틀스다. --- p.230~231
판소리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용어가 나온다. 추임새, 너름새, 발림, 창 같은 것들이다. 이 중 고수가 제일 잘 넣는 것이 추임새다. 판소리에서 나온 이 용어는 명창이 창을 할 때, 창과 창 사이에 넣는 ‘얼쑤’ ‘잘한다’ ‘그렇지’ 등의 말이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만큼이나 추임새의 역할은 그렇다. 바로 명창을 신명나게 하고, 명창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어 완창에 이르게 한다. 대화에 비유하자면 말하는 사람을 말하고 싶게 하고 신나게 한다. 말하는 사람을 말하게 하고 싶고, 공감받는 느낌을 충만하게 하는 추임새로 뭐가 있을까? 나는 ‘오구’를 추천한다. ‘그래?’ ‘그랬어?’ ‘그래서?’ ‘그 다음은?’ ‘그럼 어떻게 하지?’ 친한 사이라면 ‘그’ 발음을 할 때는 약간 유아어를 사용해서 ‘그’와 ‘구’의 중간 발음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오구’라고 해봤다. “구(그)랬어?” “구(그)래서?” 이 말의 맛은 맛깔나다. ‘그’ 앞에는 ‘오, 어머, 저런’ 등을 살짝 넣으면 더욱 좋다.
--- p.246~247